독후기

여덟 가지 좌초하는 삶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9. 4. 9. 10:48

 

여덟 가지 좌초하는 삶에 대하여

 

 

수다원을 흐름에 든 자(預流者)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흐름에 드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흐름의 든 님의 경에서는 오온의 유혹과 위험과 여윔을 분명히 아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한번 흐름에 들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 (S22.109)라고 했다.

 

한번 흐름에 들어가면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그 방향 그대로 감을 말한다. 흐름에 든 자의 삶의 길은 결정되어 있어서 인간계나 천상계에서 최대한 일곱생을 윤회하더라도 올바른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 (S15.10)이 있다. 경에서는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거룩한 진리,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보는 자가 있으니, 그는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모든 속박을 부수고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이리.”(S15.10)라고 되어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음을 말한다 

 일곱 번 윤회와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수미산의 경에서는 사성제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를 꿰뚫으면, 그에게는 이미 부서져 소멸해버린 괴로움이 많고 남은 것은 적어서 많이 잡아 일곱 번 더 윤회하더라도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S56.49)라고 했다.

 

흐름에 든자, 수다원이 되면 남아 있는 번뇌 어느 정도가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손톱 끝에 있는 흙의 비유를 들었다. 파괴 되어 버린 번뇌는 대지의 흙과 같이 많지만 남아 있는 번뇌는 손톱끝에 있는 먼지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흐름에 든 자가 되면 악처에 떨어질 위험은 전혀 없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 한다.

 

수다원이 되면 설령 다음 생에 외도의 가르침에 빠질지라도 언젠가 자신이 흐름에 든 자였음을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는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러운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어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Sn2.1)라고 되어 있다. 커다란 잘못이라 하여 악처에 떨어질 정도의 잘못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외도의 가르침에 빠질 정도의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흐름에 들었기 때문에 잘못을 곧바로 알아채고 계속 진리의 길로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통나무가 떠 내려 가는 것을 보고서

 

한번 흐름에 들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난다. 여덟 번째 생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흐름에 드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 가는 것으로 비유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커다란 강이든 예를 들어 갠지즈 강, 야무나 강, 아찌라바띠 강, 싸라부 강, 마히 강이든 그들 모든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기울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수행승들이여,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하면, 이와 같이 수행승은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간다.”(S45.96)라고 말씀했다. 이는 강물의 속성을 말한 것이다. 강물은 본래 바다를 향해 흐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통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통나무가 이 언덕에 도달하지 않고 중간의 흐름에 가라앉지 않고 땅위로 올라가지 않고 저 언덕에 도달하지 않고 인간에게 탈취되지 않고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도 탈취되지 않고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고 내부가 썩어버리지 않는 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통나무는 바다로 향하고 바다로 나아가고 바다로 향할 것이다.”(S35.241)

 

 

부처님은 갠지스강에서 제자들에게 통나무가 떠 내려 가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갠지스 강의 물은 결국 바다로 합류하게 되어 있다. 통나무가 강의 흐름에 따라 내려간다면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여덟 가지 장애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1)이 언덕에 도달하는 것, 2)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 3) 중간의 흐름에 가라앉는 것, 4) 땅위로 올라가는 것, 5)인간에게 탈취 되는 것, 6)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탈취 되는 것, 7)소용돌이에 말려 드는 것, 8)내부가 썩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장애는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는 열반을 향하고 열반에 나아가고 열반에 들어갈 것이다.” (S35.241)라고 말씀 하셨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여덟 가지 장애를 벗어나 열반의 바다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여덟 가지 좌초하는 삶

 

올바른 견해는 사성제를 말한다. 사성제는 팔정도로 실천된다. 한번 흐름에 들어가면 열반의 바다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통나무가 바다에 이르기 까지에는 여덟 가지 장애가 있다. 이와 같은 장애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떤 수행승에게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수행승이여, 이 언덕이라는 것은 바로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을 말한다.

 

2)수행승이여, 저 언덕이라는 것은 바로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을 말한다.

 

3)수행승이여, 중간의 흐름에 가라앉는다는 것은 바로 환락과 탐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4)수행승이여, 땅위로 올라선다는 것은 바로 나는 있다.’는 교만을 말한다.

 

5)수행승이여, 인간에게 탈취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수행승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세속인과 뒤섞여 살면서 기쁨을 같이하고 슬픔을 같이하며 즐거운 사람 가운데 즐거워하고 괴로운 사람 가운데 괴로워하고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 모든 일에 관여한다면 수행승이여, 이것을 인간에게 탈취되는 것이라 한다.

 

6)수행승이여,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탈취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수행승이여, 세상에 어떤 자들이 어떤 하늘사람의 무리에 들어가길 원하여 청정한 삶을 살며 나는 이러한 계율이나 수행이나 고행이나 청정한 삶을 통해서 신이나 다른 하늘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수행승이여,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탈취되는 것이라 부른다.

 

7)수행승이여, 소용돌이에 말려든다는 것은 바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비유이다.

 

8)수행승이여, 내부가 썩어 버리는 것은 어떤 것인가? 수행승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의심스런 행동을 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전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는 자는 안으로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본성이 부정한 것이다. 수행승이여, 이것을 내부가 썩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S35.241)

 

 

통나무는 정견을 갖지 않은 범부를 상징한다. 여덟 가지 장애 또는 과실에 휩쓸려 사는 삶을 말한다. 설령 강물의 속성이 바다로 향하듯이, 모든 존재들이 열반의 바다로 나아간다고는 하지만 정견을 갖지 못하면 도중에 좌초하는 삶이다.

 

왜 세속인과 뒤섞여 살지 말라고 했을까?

 

여섯 번째 항을 보면 인간에게 탈취되는 것이 있다. 출가수행자가 세속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세속인과 뒤섞여 살면서 기쁨을 같이하고 슬픔을 같이하며 즐거운 사람 가운데 즐거워하고 괴로운 사람 가운데 괴로워하고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 모든 일에 관여한다면이라고 했다.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출가자는 깊은 산중에서 신선처럼 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런 삶이 바람직할까? 이에 대하여 찬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령 빅쿠가 해야만 하는 일들 즉 경을 배우는 것, 수행하는 것, 법문하는 것, 제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제자들에게 그들의 해탈을 위해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것 등을 하지 않고 재가신자와 부적절한 방식으로 교제한다면 빅쿠는 인간에게 취해져서 바다에 이를 수 없습니다.”(위빳사나 수행 28, 371p)

 



 

출가수행승에 대하여 세속인과 교제 하지 말라고 하여 세속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출가자는 세속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탁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접촉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세상사람들 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만일 관여한다면 애착이 생겨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그는 세상일에 애착해서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아닛짜(비영속), 둑카(괴로움), 아낫따(무아)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흐름에 운반되어져서

 

부처님은 여덟 가지 장애 또는 과실을 지니지 않는다면 열반의 바다에 이를 것이라 했다. 강물의 속성이 바다로 향하듯이, 정견을 가져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열반에 이를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찬먜사야도는 여기서 강의 흐름이란 바로 팔정도를 말합니다.”라고 말했다.

 

팔정도에 대하여 뗏목의 비유로도 설명된다. 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갈 때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넓은 물이라는 것은 네가지의 거센 물결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 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두렵고 위험한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체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안온하고 평온한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가지의 고귀한 길이다.”(S35.238)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통나무의 비유에서는 팔정도가 강의 흐름으로 설명되고 있다. 강은 바다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정견을 가지게 되면 흐름에 들게 되어 열반의 바다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팔정도를 계발하려면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여 정신적-육체적 과정의 고유한 특성과 일반적 특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수행을 하면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일반적 특성을 찰할 수 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진 빠라맛따를 관찰했을 때 어느 것도 영속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상, , 무아를 통하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어느 쪽에도 걸리지 않고 열반의 바다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찬먜사야도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주의기울이거라. 또는 너희들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거라. 그러면 너희들 모두는 가운데 흐름에 의해 운반되어져서 열반이라는 바다에 이를 것이니라.” (위빳사나 수행 28, 382-383p)

 

 

2019-04-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