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금강경을 읽어도
금강경을 모두 외운 적이 있다. 십사년전의 일이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본격적으로 신심을 냈을 때이다. 아는 것은 대승밖에 없었기 때문에 금강경이 최고로 좋은 경전인줄 알았다. 금강경을 외운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 금강경 외기 도전을 한 것이다.
금강경 외는데 45일 가량 걸렸다. 하루에 한분씩 외면 계산상으로 32일이면 끝이 난다. 그러나 긴 분의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렇다고 한 분 외고 그 다음 분으로 건너갈 수 없다. 이전 분 왼 것 확인하고 다음 분으로 넘어 가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마지막 분 욀 때 전부 다 외게 되었다. 벽돌쌓기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후 경이나 게송을 욀 때 이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빠알리 원문으로 된 라따나경(Sn2.1), 멧따경(Sn1.8), 망갈라경(Sn2.4), 초전법륜경(S56.11), 자야망갈라가타, 법구경 1품과 2품 등을 외게 되었다.
금강경을 왼다고 하여 금강경을 다 알고 다 이해 했을까? 암기력 테스트하듯이 왼 것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나도 따라 외워 본 것이다. 이런 금강경 독송에 대하여 빤딧짜 스님은 자신의 책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에서 “수행을 하지 않고 금강경을 평생 읽어 보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읽어도 아상은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385p)라고 말했다.
금강경에 여러 핵심적인 가르침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 아상 깨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아상(無我相)’이라는 단어가 수 없이 나온다. 금강경만 줄줄이 외면 아상은 깨지는 것일까? 금강경을 외웠다는 아상만 더욱 더 강화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행이 뒷받침 되지 않는 경전이나 교리공부는 사상누각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빤딧짜 스님은 이어지는 글에서 “그런데 이 물질과 정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는 순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곧바로 사라집니다.”(385p)라고 말했다. 이는 다름 아닌 십육단계 위빠사나 지혜에서 첫번째 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석적으로 말하면 오온이라 한다. 오온은 색이라는 물질과 수, 상, 행, 식이라는 정신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명색이라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정신적-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말한다. 이는 좌선과 행선을 하면 알 수 있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 했을 때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은 물질적 작용에 대한 것이고, 이를 아는 마음은 정신적 작용에 대한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을 들어서 놓았을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정신적-물질적 작용만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我) 또는 사람, 중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실재 하는 것은 움직임과 아는 마음뿐이다. 명색과정만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물질적 과정만 있다는 것만 알게 된다면 나, 사람, 중생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역시 실재 하는 것이 아니다. 단어로서만 존재 하는 것이다.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발을 들 때 의도가 있어서 드는 것이다. 저절로 들어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의도가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 가려고 하니까 가는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오래 앉아 있다 보면 통증이 생겨난다. 그럴 때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잘 관찰하면 의도가 실려 있는 것이다.
명색과정은 의도와 결과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법칙에 대한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연기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지금 삶에서 모든 과정이 십이연기의 삶과 다름이 아니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까운 원인일 수도 있고 먼 원인일 수도 있다. 과거 전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가 위빠사나 두번째 단계의 지혜이다.
위빠사나 첫번째 단계의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위빠사나 두번째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를 알게 되면 두 가지 이익이 있다. 그것은 사견과 의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 알고 보면 정신적-물질적 과정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알았을 때 나, 사람, 중생이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사견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나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사견이 깨졌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정신적-물질적 과정에 대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의도가 실려 있어서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에 따라 정신적-물질적 과정이 있게 된다. 이는 위빠사나 지혜 두번째 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지혜가 생겨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어떤 의심인가? 이에 대하여 빤딧짜스님은 책에서 “그렇게 되면 많은 의심들이 사라집니다. 정말로 선업 불선업이 있을까. 선업의 과보 불선업의 과보가 있을까. 전생이나 다음생이 있을까…, 이런 의심이 사라집니다.”(384p)라고 말했다.
사견과 의심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큰 진전에 해당된다. 특히 의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법에 대한 의심이다. 특히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겨나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다. 그런 것 중에 윤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불교학자는 윤회는 없는 것이라 한다. 그 증거로서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실려 있는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에 대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경에 따르면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로 시작되는 15가지에 대한 것이다. 공통적인 의문은 “나는”이라는 말이 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나를 바탕으로 하여 삼세에 대하여 의문하는 것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라 하여 번뇌를 야기하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이를 윤회를 부정하는데 설명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할 줄 알고 원인과 결과를 식별할 줄 아는 지혜가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생이나 다음생이 있을까?”라는 의문은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명색에 대하여 정신적-물질적 작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그대로 ‘이름-형태’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경전을 중도체계로 이해 하려는 학자가 있다. 그는 명색에 대하여 우빠니샤드 방식으로 해석하여 이름-형태로 보았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신-물질로 보는 것과 명백히 다른 것이다. 만약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본다면 생각 한번 돌리면 된다.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일까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자신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평생 금강경을 읽어도 수행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상이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이 할을 하고 방망이질을 했는지 모른다. 이는 다름 아닌 명색과정을 알려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방망이로 머리를 맞았다면 아픈 것과 아픈 것을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것이 정신적-물질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순간에 나, 사람, 중생은 실재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명색에 대한 과정은 이미 수천부터 논장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빠알리 삼장이라 한다. 빠알리 경장과 율장만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니라 논장도 동등하게 중요시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정신적-물질적 과정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알면 사견이 사라진다. 그리고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법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다. 이 두 가지, 즉 사견과 의심이 사라지면 ‘작은 수다원(cūla Sotāpanna)’이라 한다. 이는 위빠사나 지혜 십육단계에서 불과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의 지혜에 해당된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과정에서 유치원 과정에 해당된다. 작은 수다원이 되면 다음 한생은 사악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2019-04-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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