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죽어야만 할까? 돌아 가신 부처님과 영원히 사는 부처님
사람은 왜 죽어야만 할까? 이런 의문은 누구나 가질 것이다. 자아 의식이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특히 청소년기에 이런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 죽음을 불쾌한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만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볼 때 두려움도 생겨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속 시원히 풀지 못한다.
출가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출가했다고 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출가했다고 말한다. 제대로 발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도 생사문제를 풀기 위하여 출가했다. 그런 부처님도 죽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죽음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관련 지침서를 보고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위빳사나 수행 28일’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다. 편역자는 케마 김도희선생이다. 미얀마 찬먜사야도의 영어 인터뷰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책은 일종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데 이제까지 고민했던 생사에 대한 문제가 말끔히 정리 되어 있다. 그 중에 부처님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여러분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비영속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닙바나를 제외한 빠라맛따(궁극적 실재)의 성질입니다. 그래서 약 2500년 전에 궁극적 실재인 정신적-육체적 과정으로서 존재하셨던 부처님께서도 돌아가신 것입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323-324쪽)
찬먜사야도는 부처님의 죽음에 대하여 명색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정신적-물질적 과정만 있을 뿐 그 것 외 다른 것은 없음을 말한다.
삶과 죽음은 정신적-물질적 과정으로서 생멸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중생이라거나 사람, 나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가차 없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명색으로 존재하였던 부처님도 죽음을 맞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념으로서 나(我)는 존재하지만
개념으로서 나(我)는 존재한다. 나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는 실명이 있고 인터넷에서는 필명이 있다. 가정과 직장에서는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어떤 때는 숫자로 부르기도 한다. 요즘은 숫자와 문자가 섞인 아이디를 권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명칭은 죽지 않는다. 한번 부여된 명칭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색으로 존재하였던 2500여년 전의 부처님은 죽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이 죽음으로 끝나듯이 부처님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물질적 과정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도 존재한다.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념으로서의 부처님은 영원히 존재하지만 정신적-물질적 존재로서의 부처님은 오래 전에 죽었다. 마찬가지로 개념으로서 나는 존재하고 영원불멸이지만, 오온으로서 나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생사문제로 출가했다는 그 스님의 의문은 풀렸을까?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은 자 없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죽음은 정신적-육체적 과정에 대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죽음에 대하여 의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히야의 경(Ud.6)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ī”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Ud.6, S35.95)
보고, 듣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보인 것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 여기서 뿐이라고 말한 것은 빠알리어 ‘맛따(matt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는 ‘as much as’의 뜻으로 ‘① 만큼 ② 가능한 ③ 정도’의 뜻이 있다. 그래서 딧타맛따(diṭṭhamatta)라는 복합어는 ‘보인 것만’의 뜻이 된다. 이어지는 단어 ‘bhavissati’와 결합하여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가 되면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가 된다.
게송에서 중요한 것은 ‘만’과 ‘뿐’이라는 말이다. 보인 것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고, 들린 것에는 들린 것만 있을 뿐이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보는 것에 개념이 들어 갈 수 없다. 대상을 보긴 보지만 그것이 단지 형상인 것만 아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 대하여 ‘사람이다’ ‘여자다’ ‘남자다’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대상이 있음을 아는 것일 뿐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냄새 맡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자와나(javana: 速行)’ 전단계로 본다. 따라서 이 단계의 경우 업을 짓지 않는다.
바히야의 경을 수행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찬먜 사야도는 바히야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명색에 대하여 설명했다. 사야도는 게송의 한 구절인 “딧테 딧타맛땀 바위삿띠.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를 인용했다. 이에 대하여 “그대들이 어떤 것을 볼 때, 그대들의 마음은 보이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바히야의 경(Ud.6)’이나 ‘말룽끼야뿟따의 경(S35.95)’에 실려 있는 게송과 일치한다. 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이 문구에 대하여 인식과정 17단계에 있어서 자와나 전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사야도는 이 문구에 대하여 수행적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잘 집중되어 꿰뚫어 보는 지혜가 예리하고 날카로워지면 여러분은 그런 결과, 즉 약간의 정신적 오염원이 부분적으로 제거 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부분적 청정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장미를 보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할 때마다 주의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지금 장미를 보는 것에 주의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요? (수행자들 대답) 그렇습니다. ‘봄-봄…’이라고 명명하며 보는 의식을 계속적으로 주의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장미를 보면서 ‘봄-봄…’이라고 명명하며 관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경우 여러분은 장미의 색, 형태, 꽃잎의 구조 등을 매우 잘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발생할까요?
네, 여러분이 장미의 질을 더 분명하게 알수록 여러분은 그것에 애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손을 뻗어서 그것을 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발생합니까? 가시에 찔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웃음) 그것이 여러분이 장미를 애착함으로써 받는 첫 번째 괴로움입니다. (웃음)
그러나 ‘봄-봄…’이라고 명명하며 장미를 관찰하면 보는 의식은 장미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관찰하는 마음이 보는 의식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관찰하는 마음이 보다 더 강력해지면 그에 따라 보는 의식이 점점 더 약해져서 보는 질 또한 현저하게 약해집니다. 봄은 점점 희미해져서 마침내는 그것이 장미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눈앞에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단지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볼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딧테 딧타맛땀 바위삿띠.”, 즉 “그대들이 어떤 것을 볼 때, 그대들의 마음은 보이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310-311쪽)
누구든지 예쁜 꽃이 있으면 ‘꽃이다’라며 보고 또 보게 된다. 마음에 들면 소유하고 싶어 꺽게 될 것이다. 꽃 대신에 사람을 넣어도 된다. 대상을 보았을 때 ‘남자다’ ‘여자다’라 한다면 개념으로 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실재를 볼 수 없다. 개념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하여 단지 ‘봄-봄…’라고 명명하여 관찰한다면 생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빠라맛타(paramattha)는 생멸하기 때문이다. 빠라맛타는 오온을 말한다. 오온이라는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빠라맛타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런 빠라맛타는 아비담마에 따르면 82가지에 달한다.
색온에 대한 빠라맛타는 지, 수, 화, 풍 등 물질에 대한 것 등 28가지가 있다. 수온, 상온, 행온에 대한 빠라맛따는 느낌이나 지각 등 52가지 마음부수가 있다. 식온에 대한 것으로 마음 한 가지가 있다. 여기서 마음은 세간적인 마음의 경우 89개의 마음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무위법에 대한 것으로 열반이 있다.
열반을 제외하고 나머지 빠라맛타는 모두 생멸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실재하는 것임을 말한다. 탐욕이나 성냄 등과 같이 조건에 따라 발생한 빠라맛따는 소멸한다. 이는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빠라맛타를 아는 것이 수행이다. 개념을 대상으로 하면 사마타수행이 된다. 위빠사나수행은 빠라맛타의 생멸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봄-봄…’이라고 명명하여 주의기울여 관찰하면 남자나 여자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오온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는 그것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것 안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Ud.6, S35.95)라고 말씀했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탐욕이나 성냄 등 생멸하는 빠라맛타가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빠라맛타를 관찰하면
찬먜 사야도는 바히야의 경과 말룽끼야 뿟따의 경에 실려 있는 “딧테 딧타맛땀 바위삿띠.”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설명했다. 그런데 사야도에 따르면 이 문구에 대하여 “이 어구는 불교학자들 사이에 아주 유명하지만 그들은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어구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311쪽)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분이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보는 의식을 관찰할 때 집중은 충분히 깊어지고 그 결과 꿰뚫어보는 지혜가 예리해지면 여러분은 보는 의식이 있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은 보는 의식이 하나씩 차례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즉 보는 의식의 비영속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나머지 두 특성인 괴로움과 비인격성(무아)도 깨닫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 28일. 311쪽)
사야도는 수행적 관점에서 바히야의 경 문구를 설명하고 있다. 대상을 개념이 아닌 빠라맛타를 관찰하면 생멸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그 순간에 그 보는 의식을 사람(존재, 자아, 영혼)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 여러분에게는 사람(존재, 자아, 영혼)의 개념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욕망이나 혐오와 같은 어떠한 정신적 오염원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311쪽)라고 말했다.
개념으로 보지 않아야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장로가 스리랑카 꾸란다까 지방의 동굴에 살았다. 그런데 그 동굴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장로는 60년 이상 그 동굴에 살면서 벽화를 보지 못하였다. 장로는 눈을 치켜 뜨고 그 벽화를 쳐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로가 왕의 초대를 받았다. 장로는 왕이 예경하든지 왕비가 예경하든지“대왕이여, 행복하소서.”라며 축원했다. 장로는 왕의 옆에 왕비가 옆에 있었음에도 왜 “왕비여, 행복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장로는 “벗들이여, 나는 왕이라고 왕비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Vism.1.107)라고 말했다.
장로는 눈앞의 대상에 대하여 ‘남자다’ ‘여자다’라며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바히야의 경이나 말룽끼야뿟따의 경에서 보는 것처럼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Ud.6, S35.95)라고 보았을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생멸하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로 본 것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는다. 개념은 죽지 않는 것이다. 죽는 것은 오온이 죽는 것이다.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빠라맛타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태어난 모든 존재들은 죽었다.
오온으로서의 부처님도 죽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어서 궁극적 실재를 보았기 때문에 오온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죽음을 완전한 열반이라 한다. 그러나 개념으로서 부처님은 살아 있다. 가르침과 함께 현전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고 마네.
그래서 형상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안에서 자라나
마음이 혼란하게 되어
탐욕과 분노도 더불어 자라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운다면
그에게 열반은 멀다고 하리.”(S35.95)
2019-04-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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