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불살조론(殺佛殺祖論)의 원형은 법구경에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이다. 살벌한 말이다. 자비의 종교라 일컬어지는 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조사들은 부처를 보는 족족 죽여버리고 또한 조사를 만나는 족족 죽여버리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개념타파’로 말하기도 하고 ‘우상숭배 타파’로 말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살불살조를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죽이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불경죄를 넘어 지옥에 떨어질 일이다. 이 세상 어느 종교치고 자신의 교주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신적 숭배를 한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살불살조라는 살벌한 말을 한다. 그렇다면 살불살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살불살조라는 말은 임제록에 근거한다. 임제의현(?~867)이 말한 것으로 “자신의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나 조사사라도 과감하게 버려야 된다.”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이 가르침이야 말로 불교의 핵심을 관통한다고 하여 선사들의 가장 극적인 가르침으로 꼽기도 한다.
살불살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인터넷검색을 하니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김한수님은 불교평론에서 살불살조에 대하여 ‘자등명법등명’과 같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교조의 본래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살불살조라는 것이다.
살불살조보다 더 살벌한
살불살조보다 더 살벌한 이야기가 있다. 운문문언(864-949)은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마자 주행칠보(周行七步)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쳤다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개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끔찍한 말이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개밥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분별하지 않게 하고 본래면목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 말이다. 무분별지를 알려 주기 위한 일종의 할과 방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매우 잔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논리라면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죽여 버려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선의 가르침은 그렇다.
부모까지 죽이라고 했는데
임제의현은 살불살조만 말한 것이 아니다. 임제록에서는 “逢佛殺佛、逢祖殺祖、逢羅漢殺羅漢、逢父母殺父母、逢親眷殺親眷、始得解脫”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그리하면 비로소 해탈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모까지 나왔다.
부처를 죽일 정도라면 부모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본스님은 “의식의 대상경계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으로만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중생들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몽상이라 했다. 금강경에 말하는 여몽환포영이라 한다. 착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라는 마구니가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본래면목으로 되돌아 가야 함을 말한다.
살부살조론의 원형 법구경
임제의현의 ‘살불살조론’과 운문문언의 ‘개밥론’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배경설명 없이 문자적으로만 접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교를 부정하고 부처님을 능멸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더구나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죽이라고 했다. 무엇이든지 보는 족족 죽이라고 했다. 마치 오역죄 저지르는 것을 용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살불살조론은 놀랍게도 초기경전에도 있다는 것이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Mātaraṃ pitaraṃ hantvā,
rājāno dve ca
khattiye,
Raṭṭhaṃ sānucaraṃ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Dhp.294)
이 게송을 보면 임제의현의 살불살조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임제의현은 살불살조뿐만 아니라 ‘봉부모살부모(逢父母殺父母)’라 하여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구경에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라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법구경 294번 게송은 임제의현의 살부살조론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수수께끼 같은 게송
법구경 294번 게송에서 첫번째 구절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Mātaraṃ pitaraṃ hantvā)”이다. 이 구절만 놓고 본다면 오역죄를 조장하는 말과 같다. 부모를 죽여서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상징어이기 때문이다.
법구경 294번 게송은 수수께끼 같은 게송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수수께끼 같은 게송을 종종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어느 하늘사람이 “어떤 것을 끊고 어떤 것을 버리랴? 그 위에 어떤 것을 더 닦고 어떤 집착을 극복해야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 부르랴?”(S1.5)라고 부처님이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섯을 끊고 다섯을 버린 뒤 그 위에 다섯을 더 닦고 다섯 가지 집착을 극복하면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 부르리.”(S1.5)라고 말씀했다.
대체 다섯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주석을 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다. 주석에 따르면, 다섯을 끊는 다는 것은 오하분결을 말하고, 다섯을 버린다는 것은 오상분결을 말하고, 다섯을 더 닦는 다는 것은 오근을 말하고, 다섯 가지 집착을 극복한다는 것은 오장애를 말한다.
수수께끼 같은 게송은 주석을 보아야 한다. 어머니는 갈애를 상징하고 아버지는 자만을 상징한다. 게송에서 어머니를 죽이라고 한 것은 “어머니가 사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갈애가 세 가지 세계[三界: tiloka]의 존재를 낳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것은 “ ‘내가 있다는 자만’은 ‘나는 이러이러한 왕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두 왕을 죽이라고 한 것은
임제록에서는 ‘봉불살불 봉조살조(逢佛殺佛 逢祖殺祖)’라 했다. 이와 대비되는 법구경 게송은 두 번째 구절‘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다(rājāno dve ca khattiye)’라는 말일 것이다. 부모도 살해 했으니 왕을 살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무간죄를 저지른 자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족 출신의 두 왕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백성들이 왕에게 가는 것처럼 모든 형이상학적 견해는 영원주의(常見: sassatadiṭṭhi)와 허무주의(斷見: ucchedadiṭṭhi)의 두 가지 견해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것들을 왕족의 두 왕이라고 한다.”(DhpA.III.454)라고 설명 되어 있다.
정견이 없으면 두 가지 중의 하나의 견해를 가질 것이다. 그것은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이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지형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일신교는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가 믿고 있고, 무신론자 또는 무종교인은 대체로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배제한다. 연기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에 따르면,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을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지게 된다.”(S12.15)라 했다. 연기의 역관을 관찰하면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견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반면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고 했다. 연기의 순관, 즉 조건발생을 관찰하면 단멸한다는 허무적 견해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견을 갖게 되면 유와 무라는 양극단은 배제되고 사견은 타파된다. 그래서 정견을 갖게 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두 왕을 죽이는 것과 같게 된다.
주석 없이는 알 수 없는
법구경 294번 게송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순다(Raṭṭhaṃ sānucaraṃ hantvā)’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역시 주석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왕국과 그 신하는 열두 가지의 감역(十二處: dvādasāyatanani)을 말하고 그것들의 편재적 성격 때문에 왕국이라고 불린다. 감역에서의 쾌락을 추구하는 갈애는 감역의 왕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하는 세무원처럼 신하라고 불리운다.” (DhpA.III.454)라고 설명 되어 있다.
법구경 294번 게송 마지막 구절은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anīgho yāti brāhmaṇo)’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라문(brāhmaṇa)이라는 말은 브라만교의 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재해석 한 말로서 번뇌를 부순 아라한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수수께끼와 같은 게송을 읊었을까? 이는 인연담을 보면 알 수 있다. 법구경 294번 게송 인연담은 ‘라꾼따까 밧디야와 관련된 이야기Lakuṇṭakabhaddiyattheravatthu)’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장로 라꾼따까밧디야가 부처님이 계신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보라. 이 수행승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거닌다.”라고 말씀 했다. 이 말씀에 수행승들은 어리둥절하고 의아해 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 보다가 “세존이시여,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Dhp.294)라고 말씀 하셨다.
법구경 254번과 255번 게송은 주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임제의현이 말한 살불살조론 역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결국 해탈을 위한 것이다. 임제의현은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고 부모도 죽이는 등 닥치는 대로 죽이면 ‘시득해탈(始得解脫)’이라 했다. 그러나 해탈로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르다.
정견이 다르면 목적지도
선불교나 초기불교나 해탈의 길로 간다. 그러나 정견이 다르다. 정견이 다르면 종착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선불교의 정견은 무엇일까?
선불교에서는 본래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믿은 다음에 자신이 부처임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간화선의 3요체라 불리우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요청된다. 이처럼 선불교에서 정견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본래불 또는 본래면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선불교의 정견이다. 반면 초기불교의 정견은 사성제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네 가지 고귀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정견이다. 그런데 사성제는 연기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나누어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따른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빠라맛타를 관찰하는 것이다.
정견이 다르면 목적지도 다르다. 선종에서는 본래면목을 말한다. 성본스님은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 자기본분사요 본래 면목이다. 자각하지 않으면 본래 면목은 없다.”라고 말했다. 본래면목을 정견으로 하는 것과 사성제를 정견으로 하는 것은 길도 다르고 목적지도 다르다.
아상(我相)을 부수기 위해
임제의현은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법구경에서는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두 왕을 죽이라고 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은 상징어는 설명 없이는 이해 하기 힘들다.
어머니를 죽이라는 것은 갈애를 죽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라는 것은 자만을 죽이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를 죽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22)라고 말씀 했다.
이것은 ‘나의 것’이라 했을 때 이는 갈애(taṇhā)를 말한다. 이와 같은 갈애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이것은 ‘나’라 했을 때 이는 자만(mana)을 말한다. 나와 상대방을 비교하면서 “내가 누군데”라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나의 자아가 있다’라고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나의 자아는 다름 아닌 유신견(有身見:sakkāyadiṭṭhi)이다. 그런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흐름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왕을 죽이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다. 임제록에서도 ‘살불살조’ ‘살부모’라는 말이 나오는데 법구경이 원형이라 본다. 공통점은 아상(我相)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선종의 가르침과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같다는 것이 아니다. 정견이 다르기 때문에 길도 다르고 목적지도 다르다.
2019-05-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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