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꽃을 보며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앞에 산이 있으면 ‘앞산’이라 하고, 뒤에 산이 있으면 ‘뒷산’이다. 아래에 마을이 있으면 ‘아랫말’이라 하고, 위에 마을이 있으면 ‘윗말’이라 한다. 산천초목에도 이름이 있다. 누군가 붙여 준 것이다. 자주 사용하다 보면 이름이 된다.
저 창문 밖에 있는 관악산은 ‘관악산’이라고 이름 붙여 달라고 한적이 없다. 누군가 그렇게 불러서 관악산이 된 것이다.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이름을 붙여 주었기 때문에 이름이 된 것이다. 별명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이름이 있다. 이름이 한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면 사람들이라 할 것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생명을 가진 유정물이라면 ‘중생’이라 한다.
중생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욕계 중생과 색계 중생이 그렇다. 무색계 중생은 정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중생의 특징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경우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색은 물질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에 대하여 오온이라 한다. 오온에는 남자나 여자, 사람이나 중생과 같은 명칭이 붙지 않는다. 단지 정신적-물질적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정신-물질을 빠알리어로 ‘나마-루빠(nāma-rūpa)’라 한다. 그런데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이름과 형태로 구별 지어짐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도 정신-물질이 아니라 이름-형태로 본다.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것을 개념화 된 것으로 본다. 여기 상이 있다. 공부할 때 쓰인다면 ‘책상’이 되고, 밥 먹을 때 사용된다면 ‘밥상’이 될 것이다. 사람에게 적용하면 집에서 부르는 이름 다르고, 직장에서 부르는 이름 다르다. 어느 것이 진정한 이름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서 개념을 부수어야 된다고 말한다. 어떤 명칭도 붙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분별하지 말자고 말한다.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보는 자들은 일체 언어적 행위를 부수자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한심하다는 투로 말한다. 오로지 개념타파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말한다. 부처님이 이런 가르침을 펼쳤다고 주장한다.
초기경전에서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오온으로 분석하여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ṇava)” (M99)라 하여 스스로 분별론자(Vibhajjavādin)라 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색, 수, 상, 행, 식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누고, 또한 십이처와 십팔계로 분석하여 설하였다. 그래서 분석론자 또는 분별론자라 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분별을 설하는 자들과 정반대이다. 그 출발점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보느냐 아니면 정신-물질로 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지 이름-형태로 보아 단지 이름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마음 하나만 돌리면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신-물질로 보아 이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분석하여 관찰한다면 수행을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한다. 좌선이나 행선 할 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신, 수, 심, 법이라는 네 가지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단지 정신-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빠라맛타라 불리우는 근본적인 성품을 보는 것이다.
욕심이 생겨나면 탐욕이라는 성품을 보고, 화가 나면 성냄이라는 성품을 보는 것이다. 좋으면 즐거운 느낌을 보고, 싫으면 괴로운 느낌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빠라맛타의 특징은 ‘생멸(生滅)’한다는 사실이다. 생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 수행이다. 생멸을 봄으로 인하여 빠라맛타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빠라맛타를 보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한다.
학인 아지따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아지따는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Stn.1036)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아지따여, 그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Stn.1037)라고 말씀했다.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도 소멸한다고 했다. 그래서 명색을 끝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필요로 한다.
안양문예회관 앞에는 칠옆수가 한그루 서 있다. 해마다 오월 이맘때쯤이면 꽃이 핀다. 꽃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생겼다. 그래서 ‘아이스크림꽃’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이를 누군가는 칠엽수꽃이라거나 마로니에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아이스크림꽃은 이름과 형태로 기억된다. 나마-루빠가 이름-형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형태는 같을지라도 이름은 수도 없이 많게 불리운다.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그렇다고 모든 꽃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기능이 있는 유정체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온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된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사람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보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보면 거기에는 수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부쩍 많아 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 보지 말고 자신의 말만 들으라고 한다. 초기경전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다 보니 논장과 주석을 모두 부정한다.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주장하는 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는 외도에 지나지 않는다.
2019-05-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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