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먹은 인연으로
장사진이다. 비빔밥 한그릇 먹기 위해 긴 줄이 형성되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안양권 최대 사찰에 갔다. 안양, 군포, 의왕, 과천을 생활권역으로 하는 안양권 120만명을 배후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경내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줄을 선지 20분 만에 비빔밥을 받아 들었다. 국은 열무김치국이다. 잘 배합이 되는 것 같다. 밥풀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 절에서 먹는 밥은 반찬이 없어도 맛이 있다. 왜 그럴까? 시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운동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길을 걸으면서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된 것도 큰 이유이다.
행사가 있는 날 봉사자들의 노고가 가장 크다. 연등 담당 봉사자, 기와불사 담당 등 각종 봉사자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봉사자는 배식 담당일 것이다. 설거지 담당도 해당된다. 이날 하루만큼은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준다. 가장 불교다운 자비의 실천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당연 하다는 듯 받아 먹는다. 주는 사람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겁다. 오늘만큼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이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비빔밥이다. 그럼에도 절에 와서 얻어 먹으려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년에 한번 절에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진수성찬 못지 않다. 비록 무늬만 불자이고 정서적으로만 불자일지라도 이날만큼은 ‘나도 불자이다.’라고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비빔밥을 서서 먹었다. 다들 그렇게 먹는다. 사람은 많고 장소가 없으니 피란민처럼 서서 먹는다. 그러나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일년 365일 중에 오로지 이날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자나 적게 배운 자나 구별없이 긴 줄을 지어서 비빔밥을 서서 먹는 장면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일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부처님 그분이 누구이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렇게 의문 하는 것이 자만일지 모른다. 혹시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불자들이 가르침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불자수 감소와 불교의 영향력 감소로 알 수 있다.
한국불교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체감 하는 불교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님오신날 하루만 북적이는것 같다. 하루만 불자처럼 보인다. 초파일날 비빔밥 한그릇 먹었다고 불자로 볼 수 있을까? 가르침(Dhamma)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 일생부터 알아야 한다.
말법의 시대가 있다. 말세에는 흔적만 남는다.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가사는 의식이나 행사 있을 때만 걸친다. 심지어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처럼 활용한다. 일본에서 볼 수 있다. 양복에 목걸이용 가사는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나이 든 노보살이 팔만대장경을 보고서 빨래판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최후의 시대가 되면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한다. 목판이나 석판에 써 있지만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암호문 같은 한문경전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금니로 사경된 경전을 해독할 수 없을 때 가르침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불교 역사가 1700년이라 한다. 200년도 안된 기독교의 역사와 비교하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 그러나 가르침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심오한 가르침을 알게 된 것은 오래 되지 않는다. 불과 이삼십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알리니까야가 한글로 번역 되고 나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암호문 같은 한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 되면서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원래 잘 설해져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모든 면에서 기독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두 개의 세력이 있는데 양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시장경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 승자독식을 말한다. 체감 하는 불교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불교는 본래 경쟁력 있는 종교이다. 유일신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종교이기 때문이다. 다신교, 일신교에 이어 무아의 가르침은 가장 발전된 형태의 종교이다. 무엇보다 진리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시장에서 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자들이 담마(가르침)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노비구니 스님이 “니까야가 뭐꼬?”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도 니까야가 무엇인지 모르는 스님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일반 재가불자들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불교가 유일신교에 비하여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담마(Dhamma)이다. 부처님 가르침이야말로 종교시장에서 최고 경쟁상품이다. 담마, 이것 하나만 있으면 불국토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널리 알려야 한다. 초기경전을 많이 사보아야한다. 초기경전 강독모임을 많이 만들어서 담마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산사에는 산사음악회가 한창이다. 부처님오신날 고요한 산사가 떠들썩 하다. 반라의 무희들이 관능적 율동으로 시선을 모은다. 흘러간 가수 김범룡에 열광하고 요즘 인기 있는 홍진영에 환호한다. 이것도 말법시대에 해당될까? 무지한 불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방편이라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형태만 남은 가사를 보는 것 같다.
산사에 야단(野壇)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법석은 없다. 산사음악회라는 이름으로 음악법석이 열리고 있다.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진 말세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부처님 그분이 누군지 몰라도 오늘 하루 비빔밥을 먹은 인연으로 언젠가 담마와 인연을 맺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9-05-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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