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을 개무시하는 종단에서, 한태식총장 연임반대 고공농성 소식을 듣고
오늘 새벽 날씨가 영하로 뚝 떨어졌습니다. 아침에 기상캐스터는 추우니 두꺼운 옷을 껴 입으라고 마무리 멘트합니다. 절기상으로는 늦가을이지만 초겨울에 들어 선 것 같습니다. 작년에 입었던 두터운 외투를 꺼내 입고 일터로 향했습니다.
고공농성 소식을 듣고
거리는 스산합니다. 해마다 11월 20일을 전후하여 낙엽이 집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우수수집니다. 차의 천정에 소낙비가 내리는 것처럼 은행나무잎이 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모든 것이 스러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때 고공농성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국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안드레님입니다.
이름이 왜 안드레일까? 천주교세례명 같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인일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종단편향의 교계 언론에서는 이교도프레임으로 가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불자라 했습니다. 그가 동국대 조명탑에 올라간지 8일째 되었습니다.
(사진: 불교포커스)
그는 왜 고공농성을 하는 것일까? 교계언론에 따르면 한태식총장 연임반대입니다. 여기서 한태식은 보광스님을 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년전 자승 전총무원장의 지원을 받아 편법으로 총장이 된 스님을 말합니다. 온갖 비리와 의혹의 상징인 전총무원장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번 더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전동국대총학생회장이 차가운 날씨에 스스로 고공의 조명탑에 올라갔습니다. 무기한 고공농성입니다.
스님이 대학총장하는 시대에
전에부터 늘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님이 공직을 맡는 것입니다. 스님이 재단 이사장을 하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스님이 기업체의 사장을 맡는 것과 같습니다. 스님이 불교방송 사장을 한다든가, 불교방송이사장을 맡는 것도 해당됩니다. 스님이 총장을 맡는 것도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번 상상해 봅니다. 기업체 사장 자리에 스님이 앉아서 결재하는 모습입니다. 회사는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맡아야 효율적입니다. 그럼에도 창업자의 자녀라 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장래가 없습니다. 종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스님이라 하여 학교이사를 하고 더구나 총장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족벌경영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력과 관련 있습니다.
벤처로 성공한 기업인이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있으나 자금이 없을 때 은행의 돈을 빌리게 됩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줄 때 여러 가지 고려합니다. 그 회사의 기술력, 자금력 등을 살피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최고경영자(CEO)의 자질입니다. 최고경영자의 역량에 따라 회사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사장을 하고 이사장을 하고 총장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족벌회사처럼 능력과 자질이 되지 않은 스님이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된다면 그 조직은 퇴보할 것입니다.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사람관리에 따른 인사문제, 자금관리에 따른 재정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여기에 노사문제까지 터질 수 있습니다. 전문경영인이라면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가족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이 사람문제, 돈문제, 노사문제 등 온갖 현안이 가득한 조직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종단의 이사, 이사장, 사장, 총장 자리는 재가전문가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스님이 이런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은 재가자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님 ‘본분사’와 맞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출가한 스님이 다시 복작한 세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갓 쓰고 양복 입은 것처럼 영 어색하기만 합니다.
스님이 대학총장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이 보기에도 어색하기만 합니다. 물론 기독교나 천주교 계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스님은 출가수행자입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출가정신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계율이 무시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니 계율이 ‘개무시’ 당하고 있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계율을 개무시하는 종단
한국불교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태생적으로 잘못 태어난 종단입니다. 정화라는 명목으로 절빼앗기의 과보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스님이 되어서는 안될 자들이 중진이 되고 이제는 큰스님이 되어 삼배를 받고 있습니다. 종단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스님 같지 않은 스님이 나가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천년 만년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되길 바랍니다.
무언가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기득권 집단에 맞서는 강력한 세력이 출현해야 합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가불교단체의 성장이고, 또 하나는 계율 중시의 교단의 성장입니다. 특히 계율중시의 종단에 관심을 갖고자 합니다.
한국불교에 조계종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갖가지 전통의 불교가 혼재해 있습니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단만 해도 수십개나 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있는가 하면 ‘대한불교 조계종’이 있습니다. 띄어 쓰기 하나로 종단이 갈립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붙여 쓴 이름이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라 일컫는 조계종을 말합니다.
십여일전 어느 행사에서 스님으로 명함을 받았습니다. 명함을 보니 ‘종정’이라 되어 있습니다. 수백개나 되는 종단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종단이 난립 되는 것일까? 이는 재산권과 관계 있다고 보여집니다. 소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재산을 지키고자 종단을 만든 것이라 보여집니다.
소유를 하게 되면 욕망에 지배받기 때문에 처자식을 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최대 종단에서도 소유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계율무시의 종단이 되었습니다. 아니 무시 정도가 아니라 계율을 ‘개무시’ 하는 종단이 되었습니다.
계율중시의 종단을 육성해야
조계종단은 경쟁상대가 없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막대한 토지와 문화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신도들의 도움 없이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임승택선생은 “승단의 운영에서 재가자들의 존재가 불편하게만 여겨지는 듯이 보이는 한국불교계의 현실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라 했습니다.
스님들은 자립자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립자족 시스템은 그들만의 리그를 더욱 공고히 하는 요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타개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있지만 계율을 중시하는 교단을 육성하고 성장,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좋은 예입니다. 이에 대하여 임승택선생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는 전통적인 실천 방식을 옛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포교 활동보다 더욱 강력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붓다의 전형적인 포교 방식은 외부적인 강압보다는 자발적인 수용과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한국불교와의 원만한 관계 정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듯하다. 전통적인 실천 방식의 유지는 테라와다불교 자체뿐만이 아니라 한국불교 전체를 위해서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양자는 경쟁자적 관계가 아닌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자의 동반자적 관계는 어느 쪽이 먼저라 할 것 없이 정법(正法)에 의한 진리 수호에 매진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굳건히 정착될 때 그 감화력은 한국불교계 전체의 밝은 앞날을 널리 비추게 될 것이다.”
(임승택, 한국불교의 현실에 비추어 본 테라와다불교(Theravāda Buddhism)의 현황과 과제)
임승택선생은 ‘동반자적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조계종단이 자립시스템을 갖추고 독주하는 현실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데, 조계종단의 최대 아킬레스 건이라 볼 수 있는 계율에 있어서 차별화가 되는 테라와다불교를 육성, 성장, 발전 시키는 것입니다.
임승택선생은 조계종단과 테라와다불교를 경쟁관계가 아니라 동반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절 빼앗기 하듯이 서로 싸우는 관계가 아닙니다. 계율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인하여 차별화 하는 것입니다. 계율중시의 종단을 육성함으로 인하여 계율경쟁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경우 보수성향이 있기 때문에 계율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보수적입니다. 계율을 중시하는 종단이 성장해 갈 때 계율무시의 조계종단은 각성하게 될 것입니다. 계율중시의 테라와다불교의 성장은 계율무시의 조계종단을 스스로 개혁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의 성장은 경쟁관계가 아니라 동반관계라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잘못된 것을 잘 못되었다고 말하는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요즘 전기장판을 깔고 자야 할 정도로 잠자기에 추운 날씨입니다. 그럼에도 조명탑에 올라가 고공에서 농성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건강도 염려 되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패기가 있는 젊은 사람이 용기를 내었습니다. 한국불교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 못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 한 한국불교는 살아 있습니다.
한국에서 불자로 산다는 것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가면 갈수록 신도는 줄어 들고 반면에 스님들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춘 스님들은 재가신도들이 귀찮은 존재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작년과 재작년 조계사 우정국로 길거리에서 그렇게 외쳐 대었건만 그들만의 리그는 끄덕 없습니다. 마치 쇠귀에 경읽기 같습니다.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도들이 없어도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계율을 중시하는 종단을 육성하는 것입니다. 재가불교단체의 활동과 병행하여 계율중시의 종단을 지원, 육성, 성장, 발전 시키는 것입니다. 계율중시의 종단이 성장했을 때 계율무시의 종단은 각성하게 되고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Dhp.11)
2018-11-20
담마다사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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