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든 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개혁행동 워크숍 일곱 시간
“아스팔트에서도 꽃은 핀다.” 이 말은 불교개혁행동 워크숍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난 여름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조계종 적폐청산을 외치던 때를 상기해서 한 말입니다. 사상최장의 폭염과 열대야에 모두 지쳐 있을 때 재가불자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열기로 가득한 아스팔트를 녹여 버렸습니다.
한화센터 6층으로
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한화센터 6층으로 향했습니다. 24개 단체가 망라된 불교개혁행동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무려 7시간 동안 열린 워크숍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약 80명 가량 모인 모임에서 낯익은 얼굴도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난 봄에 삼사십명 모여서 적폐를 외치던 때와 상황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재가불교단체 몇 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디수첩방영과 설조스님 단식 영향으로 새로운 단체가 속속 집결했습니다.
어느 모임이든지 모여야 모임이 성립합니다. 모이지 않으면 세가 약해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대불련을 모태로 하는 ‘대동행’, 또 대불청을 모태로 하는 ‘불청사랑’과 같은 새로운 단체가 결성되어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양상입니다. 이밖에도 포교사단과 불광사가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많은 깃발 중에 일부 깃발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2의 대승운동은 초심운동
뜨거웠던 여름은 지나갔습니다. 천고마비 사색의 계절 가을에 지난 시절을 되돌아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불교개혁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영국 공동대표는 인사말에서 “제2의 대승혁명을 위한 토론입니다.”라 했습니다. 부처님 사후 부파불교의 폐해가 극심했을 때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듯이, 현재 한국불교는 제2의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을 일으켜야 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종교의 타락이 극에 달하면 본래 교조가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찾게 됩니다. 불교라면 ‘가르침(Dhamma)’일 것입니다.
불자들은 불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기복으로 흘러 권승들의 탐욕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불자들이 깨어나려면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이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현실을 비교하여 괴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김영국대표가 말한 제2의 대승운동은 사실상 ‘초심운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워크숍 발제자로서는 김경호 지지협동이사장과 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가 선정되었습니다. 김경호 이사장은 ‘불교개혁운동의 평가와 성찰’에 대하여, 이도흠 상임대표는 ‘향후 불교개혁의 방향과 방안’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김경호 이사장은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이 싫다고 하여 퇴장해 버린다면 저들이 바라는 것이라 했습니다. 승려들을 자각시켜 승려들을 조직화 하고 끊임 없이 사회여론을 환기시켜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재가운동은 잘 했고 또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설정원장 퇴진 시킨 것만 해도 큰 성과임을 말합니다.
이도흠 상임대표는 파워포인트를 이용하여 설명했습니다. 요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종단 바깥에서 청정한 불교를 건설하는 것, 둘째, 꾸준히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것, 셋째, 내절 청정하게 바꾸기 운동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승가에 의존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승가에 맞서는 재가불교를 건설해야 함을 말합니다. 여법한 재가불교가 우뚝 섰을 때 승가는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에 불교개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임을 말합니다.
분노하는 자에게
두 명의 발제자가 발표하고 난 다음에 질의응답시간이 있었습니다. 질의 과정에서 거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분노에 가득 찬 어느 여성법우는 발제자 중의 한사람을 강하게 몰아 부치고 인식공격까지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장내가 술렁이었습니다. 이에 발제자 중의 한사람은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그것은 ‘자비의 분노’에 대한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에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에 이르려면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탐욕, 분노, 미혹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입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사홍서원에서 “번뇌를 모두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誓願斷)”라고 맹세합니다. 그럼에도 불자가 분노에 가득차서 해코지 하려 한다면 불편과 불쾌를 야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분노하는 자에게 이렇게 대하라고 했습니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5)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화내면 지는 것이라고. 분노하는 자는 이미 진 자입니다. 분노를 받아 주지 않으면 그 분노는 자신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분노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분노하면 인간관계가 단절됩니다. 망하고 싶거든 분노하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는 싸움이라 했습니다. 그렇다고 불의에 침묵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재가불교 역량을 키워야
발제자와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모둠토론 시간이 있었습니다. 참여한 자에 대하여 1개조에 10명씩 할당하여 모두 7개조가 구성되었습니다. 넓다란 강당 한켠에 네모난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과일과 과자와 음료가 준비 되었습니다. 저녁은 그 자리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모둠 토론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느 법우님에 따르면 “권승들은 우리를 지나가는 똥개로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재가불자들이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관심 보이지 않음을 말합니다.
권승들이 긴장할 때가 합니다. 그것은 승려들이 조직화 되는 것이고, 또 조계종 적폐가 사회여론을 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권승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타겟으로 삼아야 개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재가불교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승가에 맞서는 강력한 재가불교를 키웠을 때 지나가는 똥개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설정총무원장을 쫓아 낸 것에 대하여
모듬토론이 끝나고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설정총무원장을 쫓아 낸 것에 대하여 큰 성과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타종교인들이 재가불교 활동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 들라면 불자의식에 대한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지난 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설정원장 한사람 쫓아 낸 것 외에 별다른 성과가 없습니다. 처음 봄에 시작 했을 때 불과 삼사십명에 불과했지만 뜨거운 여름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되기 까지 재가불교단체가 참여하고 설조스님 단식 영향도 컸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그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재가의 분열입니다.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재가의 분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건 정말 아닙니다.”라 했습니다. 단식정진장에서 소란과 고성, 욕설이 난무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했습니다. 더구나 중상모략과 폭력사태를 보고서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재가청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폭력은 반드시 신체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친 말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정신적 폭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폭력에 대하여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해치지 않는 참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아힝싸까가 되리.”(S7.5)라 했습니다. 아힝싸까는 불해자(不害者)라는 뜻입니다.
언어폭력에 대하여
폭력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언어폭력입니다. 요즘은 에스엔에스 시대입니다. 실시간 통신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톡이나 밴드, 페이스북, 트윗 등 수 많은 실시간 소셜네크워크서비스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카톡 등에 글을 올리는 행위는 일종의 구업이라는 것입니다.
칭찬이나 격려 등 아름다운 말을 올리면 선업이 됩니다. 근거가 있는 또는 대안이 있는 건전한 비판은 장려 됩니다. 그러나 타인을 비난 하거나 욕설 등 거친 말을 하거나 심지어 중상모략한다면 이는 언어폭력에 해당되는 말로서 악업이 됩니다. 이럴 때 팔정도의 정어(正語)를 떠 올려 봅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거짓말을 하지 않고
2) 이간질을 하지 않고
3)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4)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S45.8)
팔정도에서 정어는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를 말합니다. 이 네 가지는 천수경에서 십악참회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또한 십계이기도 합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학습계율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재가불교운동을 한다고 하여 입에서 욕설, 이간질 등이 난무한다면 더 이상 불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정진이 있는 모임
모임은 화합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화하기 위해 있는 그런 모임은 없습니다. 그래서 승가를 ‘화합중(和合衆)’이라 합니다. 재가불교단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합중은 어떤 모습일까? 이는 초기경전에서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기를 바란다.” (Vin.I.352, M128)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화합의 모임이 있다면 불화합의 모임도 있습니다. 불화합의 모임에서는 마치 기름과 물과 같아 싸움 그칠 날 없습니다. 본래 기름과 물은 전혀 다른 성분이어서 합쳐지지 않습니다. 기름과 물은 불화합의 대명사입니다. 반면에 화합의 모임은 우유와 물과 같습니다. 우유와 물은 성분이 다름에도 화합합니다. 그러나 화합의 모임 보다 나은 모임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최상의 모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 한다.”(A3.93)
이것이 최상의 모임입니다. 불자들의 모임이라면 이런 모임을 지향해야 합니다. 최상의 모임은 다름 아닌 정진이 있는 모임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말씀 하신 “불방일정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최후로 말씀 하신 것은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정진이 있는 모임에서는 본받아 배울 사람이 있습니다. 구성원들은 그와 같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진이 없는 모임에서는 불화합의 모임이 되기 쉽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아 마치 입에 칼을 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고 중상모략하기 일쑤입니다.
레크레이션으로 기분전환을
오후 2시에 시작된 워크숍은 밤 9시가 되서 끝났습니다. 저녁을 도시락으로 때우는 등 진지한 토론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끝나기 20분 전에 레크레이션 강사가 올라 왔습니다. 무려 2시간 반 동안 기다렸다고 합니다. 강사는 아들뻘 되는 젊은 사람입니다. 먼저 옆사람 어깨 주물로 주기와 등두드려주기로 기분전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낱말 퀴즈, 영화퀴주, 음악퀴즈를 하여 상품을 주었습니다.
청정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승가가 청정하게 되면 한국불교는 중흥할 것입니다. 한국은 그 옛날 그랬던 처럼 불국토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승가는 물론 재가자도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재가불교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청정한 삶이 요청됩니다.
재가불교운동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취하지 않게 마시기’와 같은 조계종단의 캠페인은 폐기 되어야 합니다. 불자들은 천수경에 언급되어 있듯이 십악참회 중에 정어와 관련된 네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재가운동하는 자들이 거친 말을 하고 욕설을 하고 중상모략으로 일관한다면 청정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초기경전에서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 했습니다. 청정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깃발 든 것이 인연이 되어
일곱 시간 동안 긴 워크숍이 끝났습니다. 남들이 편히 쉬고 있을 때 자발적 참여자들은 한국불교 미래에 대하여 토론 했습니다. 이런 행위가 누군가의 눈에는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이라 하여 부질 없고 허망한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권승들이 지나가는 똥개 쳐다 보듯 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고귀하고 성스런 일이 됩니다.
불교개혁운동에 숫자가 많으면 힘을 받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요인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깨어 있는 자들이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메꾸는 일을 하는 것이 뜻있는 불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에서 보낸 나날이 비록 권승들의 카르텔을 부수는데 실패 했지만 훗날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 따르면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아이들 장난으로 풀 나무 붓이거나 혹은 꼬챙이로 부처님 모양 그린 이들 이와 같은 여러 사람들 공덕을 쌓아 큰 자비심을 갖추어 모두 성불하였나니”라는 게송입니다. 어린 아이가 막대기로 불상을 그려도 그 인연으로 성불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들이 아스팔트에서 깃발을 들었다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깃발 든 것이 인연이 되어 언젠가 청정한 불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불자들이 있기에 한국불교에서 희망을 봅니다.
2018-10-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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