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방방곡곡 불국토 아닌 곳이 없었던 것처럼, 한국불교발전연구원 개원 25주년 심포지엄
“ ‘우리는 소수종교다’라고 포교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이 말은 심포지엄에서 김응철 교수가 한 말입니다. 중앙승가대 김응철교수는 ‘한국불교의 포교현실과 전법포교의 전략’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 했는데 현재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지금부터 다수종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018년 11월 5일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했습니다. 한국불교발전연구원 개원 25주년 심포지엄입니다. 월요일 그것도 오후 1시부터 열린 토론회입니다. 평일임에도 특별한 일이 없어서 명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탔습니다. 개인사업자의 자유입니다.
모두 네 명의 발표자가 있었습니다. 제1주제는 박병기교수의 ‘한국불교의 현실과 사회적 신뢰구축’이고, 제2주제는 김응철교수의 ‘한국불교의 포교현실과 전법포교의 전략’이고, 제3주제는 우희종교수의 ‘종단현실속에서 재가운동의 현황과 전망’이고, 제4주제는 이덕진 교수의 ‘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하고 화합할 것인가’입니다. 한마디로 ‘한국불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승가에 대한 애정인지, 분노인지, 비방인지
한국불교가 위기라고 합니다. 재가불교활동을 하면서 위기를 절감합니다. 불교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대로 가면 한국불교가 멸망할 것이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날 이사장 혜총스님도 기조강연에서 수차례 위기를 강조했습니다. 더구나 혜총스님은 지난해와 올해 총무원장 후보로 나섰다가 두터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여 좌절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모릅니다.
혜총스님은 모두발언에서 작년과 올해의 재가불교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승가에 대한 애정인지, 분노인지, 비방인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애정, 분노, 비방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야단도 관심이 있기에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무관심으로 일관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종단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분노하고 비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혜총스님은 자료를 읽어 나가면서 가장 말미에 “원로스님을 중심으로”라는 말을 했습니다. 스님은 모든 것에 대하여 “원로스님 중심으로 수행가풍을 진작하고, 원로스님을 중심으로 사부대중이 화합하며, 원로스님을 중심으로 전법교단을 조성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원로스님은 원로의원스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존경받는 ‘장로스님’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현재의 문제를 알려면 과거를 알아야
제1주제에서 박병기교수는 ‘한국불교의 현실과 사회적 신뢰구축’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한국불교의 위기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박병기교수는 교계신문의 컬럼과 포럼자료 등을 인용하여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문제점을 열거했습니다. 이를 크게 한국불교의 ‘역사성’과 ‘현재성’으로 설명했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알려면 과거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박병기교수는 “위기는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명상문화의 확산 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계율’일 것입니다.
오계는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 오계는 ‘학습계율(sikkhāpada)’입니다. 구족계 역시 학습계율입니다. 오계의 불살생계가 “살생하지 말라.”라가 되면 지키기 힘든 것이 됩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이라면 안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살생계를 학습계율로 보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가 됩니다.
마치 깨달음으 단계적으로 완성되듯이, 마찬가지로 계율도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법회할 때마다 계를 받아 지니는 이유입니다. 승가에서 포살일에 계목을 합송하는 것도, 포살일에 재가불자가 팔계를 수지하는 것도 일종의 학습계율입니다.
계를 어기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됩니다. 평생 걸려서 훈련으로 완성되는 것이 학습계율(學戒: steps of training) 입니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여법한 승가가 출현한다면 요즘 한국불교 스님들에게 볼 수 있는 온갖 범계행위는 사라질 것입니다. 계율에 바탕을 둔 승가가 성립되었을 때 중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출가자절벽과 신도절벽
이번 심포지엄에서 가장 관심 있게 들은 것은 제2주제 김응철교수의 ‘한국불교의 포교현실과 전법포교의 전략’입니다. 김응철교수는 여러가지 인상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 있어서 노트해 두었습니다. 그런 말중에 실감나는 말이 ‘출가자절벽’과 ‘신도절벽’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인구절벽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월출생자가 3만명 이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경우 한해 출생자가 백만명에 육박 했습니다. 요즘처럼 월출생아가 3만명이하가 된다면 연출생자는 삼사십만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런데 절벽은 불교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응철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1993년 출가자는 510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151명으로 급감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면 두 자리대가 될 것입니다. 김응철교수는 1990년부터 승가대 교수로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출가절벽을 실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출가자절벽 못지 않게 신도절벽도 심각하다는 사실입니다.
김응철교수의 자료를 보면 종교인구에 대한 표가 실려 있습니다. 연도별로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의 비교표가 있습니다. 불교는 갈수록 줄어 들고 있는 반면 개신교와 천주교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작년 종교인구총조사에서는 불교인구가 3백만이 줄어들어 개신교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현재 한국종교지형은 개신교가 19.7%로서 1위이고, 불교가 15.5%로 2위이고, 천주교가 7.9%로서 3위입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2025년 종교인구 총조사에서 불교는 12%로 예상합니다. 이는 신도절벽을 의미합니다.
김응철교수의 자료에 나타난 비교표를 보면 불교는 비관적입니다. 불과 한세대만에 역전당하고 이제는 소수종교의 위치에 내몰렸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다수 종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우리는 소수종교다’라며 포교전략을 수립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은 10년 입니다.”
절벽의 시대에 손 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대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포교입니다. 자료집을 보면 ‘포교대상에 대한 접근방법’, ‘포교내용의 재정립’, ‘포교방법의 개선방안’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치 포교학교과서를 보는 듯 합니다.
한줄 한줄 의미가 있어서 금과옥조라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포교내용의 재정립’에서 “니까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경전과 전통적으로 수용된 대승경전들을 종합하고 취사선택하여 현대사회의 불자들이 독송할 수 있는 경전들이 등장할 필요가 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대승경전 위주에서 탈피하여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을 곁들이자는 것입니다.
포교와 관련하여 부처님만한 분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 바로 포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응철교수는 “부처님 설법은 포교적 설법입니다.”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절벽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절벽의 시대에 포교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김응철교수는 재도약의 길이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은 10년 입니다.”라 했습니다. 10년 동안 교육포교, 복지포교, 문화포교, 수행포교를 하지 않으면 영원한 소수종교를 면치 못할 것으로 들립니다.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는 글을 실어도 되는지
제3주제는 우희종교수의 ‘종단 현실 속 재가운동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것입니다. 우희종교수의 글을 보면 ‘용주사비대위’의 활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7년과 2018년 재가불교활동의 시작이 용주사비대위에서 시작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희종교수가 소속되어 있는 바른불교재가모임(바불재)의 활동상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특정한 재가불교단체에 대하여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오래오래 기록으로 남을 심포지엄 논문에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는 글을 실어도 되는지 의문입니다. 초기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남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남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남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하물며 묻지 않았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뜨리고 머뭇거리고 불완전하게 대충 남의 장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하물며 묻지 않았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뜨리고 머뭇거리고 불완전하게 대충 자신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자신의 장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A4.73)
할 말이 있을 때는 당사자에게 말해야 합니다. 여럿 있을 때는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해서 칭찬해야 합니다. 뒤에서 험담하거나 칭찬하거나 모두 당사자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 입니다. 현명한자는 뒤에서 남말 하지 않습니다. 없는 곳에서는 칭찬하고 있는 곳에서는 지적해 줍니다.
시스템중심으로 돌아가야
제4주제는 이덕진교수의 ‘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덕진 교수는 종단의 현실에 대하여 마치 성토하듯이 비판했습니다. 세월호사건이 났을 때 종단의 늑장 대처와 보여주기 식에 대하여 “왜 우리는 현장에 발 빠르게 가지 않을까?”라며 의문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상(相)이다”라 했는데 이는 ‘스님상’을 말합니다. 스님들은 모두 하나씩 스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님이 스님상을 가지고 있을 때 사부대중의 불교가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이에 이덕진교수는 출가자가 재가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계급이 부활했다.”라 했습니다. 출가자에 대한 삼배 등을 예로 들면서 한국불교에 새로운 카스트가 형성된 것을 말합니다.
이덕진교수는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풀기와 더불어 살기, 사부대중의 위치 바로잡기,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덕진 교수가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은 질의응답시간에 “시스템중심으로 돌아가야”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큰스님중심이 아니라 재가자수요중심의 불교를 말하고, 재가법사에게도 일정수준의 급료를 지급해야 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이러한 불교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옛날 방방곡곡 불국토 아닌 곳이 없었던 것처럼
심포지엄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열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서 충분한 질의응답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앞 발표자가 시간을 초과했을 때 누적되다 보니 뒤 발표자는 쫓기듯이 말해야 했습니다. 5시 이후에 곧바로 다음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의 현안과 진로모색, 광범위한 주제입니다. 주제를 좀더 좁혔더라면 심도 있는 논의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가 위기라는 사실에는 모두 공감했습니다. 특히 김응철교수는 “앞으로 남은 시간은 10년입니다.”라는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2등 종교로 전락한 한국불교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때 3등 종교는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다.
네 가지 주제가 모두 감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희종교수는 ‘24개 단체를 하나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현실성 없는 말입니다. 재가불교단체는 각각 고유한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대는 가능할 것입니다. 각단체의 고유성은 유지하면서 사안별로 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화합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글을 올린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요즘 누구나 한국불교 미래를 걱정합니다. 나라사랑하는데 있어서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 미래걱정에 승가와 재가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이 없음을 아는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한국불교가 다시 도약하기 바랍니다. 그 옛날 방방곡곡 불국토 아닌 곳이 없었던 것처럼 한국불교가 중흥하기 바랍니다.
2018-11-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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