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작은 절에 단 빈자일등(貧者一燈)

담마다사 이병욱 2019. 5. 12. 22:22

 

작은 절에 단 빈자일등(貧者一燈)

 

 

등을 하나 달았다. 가난한 절에 단 빈자일등(貧者一燈)이다. 백련암 순례를 마친 카니발은 다음 목적지 약수암으로 향했다. 청양에 있다. 청양하면 칠갑산이 생각나지만 앵봉산 약수암이다.

 

앵봉의 뜻은 무엇일까? 꾀꼬리 앵()에 봉황 봉()자이다. 꾀꼬리와 봉황,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름이다. 꾀꼬리하면 소리가 연상된다. 그럼 봉황은? 꾀꼬리 소리부터 봉황소리라 해야 할까? 상상속의 새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앵봉은 꾀꼬리부터 온갖 새소리가 들려 올 것 같은 이름이다. 앵봉산은 해발 300미터 되는 작은 산이다. 그곳에 절이 있다.

 

왜 약수암이라 했을까?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이라 한다.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들려 온다. 그래서일까 치유목적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일축한다.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 한다. 산에 와서 청정한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나은 것이라 한다.

약수암에 가게 된 것은 급작스럽게 결정된 것이다. 백련암 갔다가 돌아 가는 길에 약수암을 들르자고 했다. 지나 가는 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부로 가는 것이다. 지난 1월에 스님과 함께 담마마마까에서 수행했기 때문이다. 의리차원에서 가는 것이다.

 

김천 백련암에서 약수암까지는 134로미터 거리로 약 1시간 50가량 걸린다. 오후 2시 약간 넘어 출발했는데 오후 4시 약간 넘어 도착했다.

 








약수암은 작은 절이다.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주지스님의 19년 원력으로 오늘날 여법한 절이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팔작지붕 형태를 가진 전통사찰 모습은 아니다. 주택모양의 절이다. 그러나 대웅전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주지스님은 수행동기라 볼 수 있다. 2018년 끝자락인 12 31일에 미얀마행 비행기를 함께 탔기 때문이다. 담마마마까에서 함께 보냈다. 스님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항상 홍가사를 착용했다. 테라와다에서는 가사가 일상복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만 착용한다. 어디를 가든 항상 홍가사를 착용하는 스님 모습을 보았다.

 

스님과 인연이 있다. 작년 4월 나가노 금강사 순례 갔었을 때 처음으로 뵈었다. 미얀마에서는 두 번째이다. 미얀마에서 노트를 열심히 했는데 다 쓰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가지고 있는 새 노트를 건네 주었다. 빚진 것이다. 그리고 이번 부처님오신날 전날에 찾아 뵙게 되어 세 번째 인연이 되었다.

 




카니발에 탑승한 8명의 일행은 스님에게 삼배를 했다. 스님은 한사코 거부 했으나 테라와다식 삼배를 하기로 했다. 서로 삼배함으로써 상견례를 마쳤다.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법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천정에는 연등으로 가득하다. 꼬리표가 상당히 많이 붙어 있다. 벽면 이곳저곳에는 경책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한심이 보살 일대기가 있다. “대웅전에 천원넣고 일억벌게 빌었으며 관음전에 천원넣고 만사형통 기원하고로 시작되는 문구이다. 오로지 돈만 바라는 기복위주의 불자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약수암은 가난한 절이다. 찾아온 이들도 넉넉한 것이 아니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이 왜 수승한지 아는 수행자들이다. 수행자들은 등을 달기로 했다. 부자절에 다는 것 보다는 가난한 절에 다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

 

큰 절에 등을 달면 보이지도 않지만 작은 절에 달면 더 빛이 날 것 같다. 더구나 함께 수행한 스님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듯이, 알고 지내는 스님의 절에 등을 다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본 것이다.

 

가족등을 하나 달았다. 가족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알려 주자 태어난 해를 십이지방식으로 써 주었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달필로 그리고 꼬리표 반대편에는 축원문이 적혀 있다.

 






빈자일등이라 한다. 가난한 여인이 어렵게 등 하나를 마련하여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기복은 없다. 그러나 발원은 할 수 있다. 그것은 자타가 이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지혜만한 것이 없다. 지혜의 등이다. 작은 절에 빈자가 지혜의 등 하나를 달았다.

 

 


2019-05-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