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스리랑카식 점안식은 어떻게, 성원정사 이전개원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0. 14. 10:56

 

스리랑카식 점안식은 어떻게, 성원정사 이전개원법회

 

 

일요일 성원정사에 갔다.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절이다. 상가 2층에 있는 작은 절이다. 송위지선생의 원력으로 약 10년전에 세워졌다. 삼년전 재를 이곳에서 봉행한 것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작년 부처님오신날에는 법요식에도 참석했다. 그로부터 1년 반만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전개원법회에 대한 것이다.

 

성원정사가 이전했다고

 

송위지선생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성원정사 이전안내에 대한 문자이다. 주소가 대학동 1538-13 치안센터근처 시레기국밥집 2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 위치에서 가까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안양에서 20번 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에서 1515로 갈아탔다. 고시촌입구정거장에서 내렸다. 사이길을 약 삼백미터 가량 올라가자 치안센터가 보였다. 시레기국밥집을 찾으면 된다. 찾아보니 시레기해장국집으로 되어 있다. 그곳 2층에 성원정사가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간판서체는 궁서체와 유사하여 서체가 동일하다.

 

 



신림동은 고시촌으로 유명하다. 서울대 근처에 있어서일 것이다. 성원정사가 고시촌에 입주하게 된 것은 고시생들을 돕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십년동안 수많은 고시생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송위지선생에 따르면 고시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수행을 지도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 그결과 사법고시, 행정고시, 공무원시험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합격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이서일까 집안에서도 합격자가 나왔다. 비록 하위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지만 성원정사와 인연을 맺고 나서부터이다.

 

스리랑카 스님들이

 

법당은 상가건물 2층에 있다. 들어가 보니 넓직하다. 이전 법당 보다는 약 1.5배 가량 넓은 것 같다. 한쪽 벽면 중앙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고, 천정에는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너른 방안에는 주방도 있고 책상과 컴퓨터도 있어서 원룸형 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날 이전법회 하는데 스리랑카 스님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 송위지선생과 인연이 있어서일 것이다. 송위지선생은 젊은 시절 스리랑카에 약 칠년가량 유학한 바 있다고 했다.

 

 



스리랑카 스님은 네 명이다. 밝은 주황색가사를 입었다. 그 중의 한스님의 법명은 와치사라스님이다. 양주 마하보디주지스님이다. 스리랑카스님이지만 한국에서 전법활동을 하고 있다.

 

와치사라스님은 불교박람회장 스리랑카 부스에서 본 적 있다. 매스컴에도 여러 번 소개 된 적이 있어서 얼굴이 익다. 무엇보다 스님은 한국말을 잘한다. 억양이 부드러워서 한국인이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이렇게 모두 네 명의 스리랑카 스님이 왔는데, 네 명은 상가를 구성하는 최소 숫자이다.

 




송위지선생의 스리랑카사랑

 

이전법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동네에서 이사한 것임에도 새로 법당을 오픈한 것이 때문에 여법하게 봉행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식으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리랑카식으로 하는 것은 성원정사를 창립한 송위지선생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선생은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시 태어나면 스리랑카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스리랑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열살에 출가하여 스무살에 비구계를 받고 한국으로 건너와 전법하겠다고 말했다. 송위지선생의 스리랑카사랑에 대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스리랑카는 테라와다불교의 종가집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온 불교를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소까대왕당시 빠딸리뿌뜨라에서 제3차결집이 있었는데 삼장이 고스란히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 대하여 교학의 나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날 이전법회에 약 육칠명 가량 모였다. 그 중에는 자애명상으로 유명한 김재성선생도 왔다. 성원정사와 인연이 있는 불자들이 왔는데 그 중에는 고시생들도 있었다. 나이가 든 불자들도 여럿 보였다. 스리랑카 재가불자들도 네 명 왔다.

 

송위지 선생이 간단히 성원정사에 대하여 설명했다. 송위지선생은 절을 소개 할 때 소원을 이루는 집 성원정사라고 말했다. 한자어로 성원이라는 말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라는 뜻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고시생들의 소원이다. 각종 시험에 합격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송위지 선생은 종종 전국 유명기도처에서 고시생을 위한 기도를 해 주고 있다.

 

와치사라스님의 법문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와치사라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한국어로 느릿느릿 말하는데 발음이 정확하고 억양도 자연스러워서 한국인과 다를 바 없다. 스님은 먼저 송위지선생의 노고에 대하여 치하했다. 십년동안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오늘날 불교가 이렇게 전승되어 온 것이 송위지법사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치사라스님은 법문에서 오천년불교를 말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여 지금까지 2,500년이 지났고 앞으로 2,500년이 남았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금강경에 후오백세라는 말은 있어도 후오천년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테라가타 주석에 가르침이 쇠퇴하는 다섯 단계가 있다. 이를 해탈의 시대, 삼매의 시대, 계행의 시대, 학습의 시대, 보시의 시대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첫 번째 해탈의 시대인데, 그것이 사라지면, 계행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학습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보시의 시대가 전개되는데, 학습의 시대때 부터가 최후의 시대에 해당한다. 학습의 시대에는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논의의 주제를 끝으로 하는 학습이 일체 사라지면, 그로부터 흔적만 남을 것이고 그 때 부터는 재물을 모아서 보시로서 베푼다. 이것이 최후의 올바른 실천이다.(Thag.III.89)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다섯 가지 시대를 각각 천년으로 본다면 지금 시대는 계행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계행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계행도 사라지고 학습만 남게 되었을 때 최후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는 불교흔적만 남게 되는데 보시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테라와다불교는 계행이 살아 있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지금도 탁발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고 가급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불교는 본래의 부처님 가르침과 멀어져 있다. 기후적 요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탁발의 전통이 없다. 가사모양도 다르다. 또한 교리도 다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가르침이 쇠퇴하는 다섯 단계 중에서 어쩌면 최후의 단계에 와 있는지 모른다.

 

테라와다 이주민 불교공동체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주황색가사는 검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오로지 회색승복입은 스님만 볼 수 있었으나 불과 이삼십년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더욱도 놀라운 것은 남방 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절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절도 있고 태국절도 있고 스리랑카절도 있다.

 

테라와다불교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글로벌화의 영향이라고 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정착해서 살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십년전부터 알 수 있었다. 종로거리에서 연등축제를 하면 미얀마, 스리랑카, 네팔 들 이주민불교공동체 행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는 수 많은 테라와다불교권 국가들의 이주민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쉼터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곳저곳에 테라와다불교 절이 생겨났는데 와치사라 스님의 마하보디사도 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식 점안식

 

성원정사 이전점안식은 스리랑카식으로 했다. 그래서일까 모든 의식을 빠알리어로 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빠알리어 삼귀의부터 시작하여 삼보공덕예찬, 망갈라숫따(축복경), 라따나숫따(보석경), 멧따숫따(자애경)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경은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다. 마치 한국스님들이 염불하듯이 테라와다스님들은 빠알리경을 독송했다.

 




테라와다스님들이 빠알리경을 독송할 때 몇 가지 특별한 의식이 있었다. 첫번째로 참석한 모든 대중을 흰끈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네 명의 스님부터 시작하여 참석자 모두를 묶는 것이었다. 이때 끈이 바닥에 닿으면 안된다. 그래서 두 손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


 


 

이전개원법회의식의 하이라이트가 있었다. 그것은 점안식이다. 와치사라스님은 흰천을 준비했다. 이를 두 개로 나누었다. 원활한 진행을 하기 위해서이다. 스님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흰천을 씌어 주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눈만 나오게 하고 상체를 흰천으로 완전히 가리는 것이다. 마치 이슬람에서 말하는 차도르가 연상되었다.

 




흰천에 둘러싸인 사람은 불단 앞으로 인도된다. 앞이 가로 막혀 있는 불단에는 거울이 준비 되어 있었다. 거울을 보면 뒷편에 있는 불상이 보인다. 장미꽃을 들고 거울에 비친 불상을 물로 닦아 주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오신날 관정의식처럼 보이지만 거울을 통해서 한다는 것이 다르다. 이와 같은 세정의식은 처음 보았다. 아마 스리랑카에서는 이런 식으로 의식을 하는 것 같다.

 

세정의식이 끝나자 또 다른 의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가지 의식이 있었다. 하나는 머리에 손을 대는 관정의식이고, 또 하나는 머리에 물을 묻혀 주는 의식이고, 마지막으로 흰끈을 오른 손에 묶어 주는 의식이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빠짐 없이 해 주었다.

 










점심은 카레밥으로

 

모든 의식이 끝났다. 의례 그렇듯이 의식이 끝나면 점심을 먹는다. 성원정사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소박한 음식이다. 보통 절에 가면 비빔밥을 먹는데 이날은 카레가 나왔다. 갖은 나물이 곁들였다.

 






10 20일 마하보디사 까티나법요식

 

식사가 끝나고 와치사라스님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매스컴에서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낯익지만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다. 와치사라스님에 따르면 10 20일 양주 마하보디선원에서 까티나법요식을 개최한다고 했다. 그래서 법문중에 많이 참석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에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작년 의정부 담마까야사원에서 열린 까티나축제에 참석한 바 있다. 태국전통에 따라 열린 까티나축제는 장엄했다. 이를 글로 남긴바 있다. 올해에는 미얀마나 스리랑카 불교공동체 까티나축제에 가 보기를 바랬었는데 뜻하지 않게 좋은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와치사라스님에 따르면 10 20일 열리는 까티나축제에는 스리랑카 스님 20분 가량 참석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리랑카 이주민 노동자들도 이삼백명 가량 올것이라고 했다.

 

까티나축제는 봄에 열리는 웨삭데이와 함께 가을에 열리는 테라와다불교 최대의 불교행사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사공양법요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안거가 끝난 스님에게 보시공덕 지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성원정사 이전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스리랑카불교의식도 보고 까티나축제에 대한 정보도 얻는 이중의 행운을 가졌다.

 

 

2019-10-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