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미륵이 꿈꾼 세상은? 미륵사지 석탑보수정비 준공식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9. 5. 1. 22:18

 

미륵이 꿈꾼 세상은? 미륵사지 석탑보수정비 준공식을 보고

 

 

에스엔에스(SNS)에서 글을 보았다. S선생이 올린 글이다. 영화사 전세버스 자리가 비었다고 한다. 미륵사지 보수정비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한 버스를 말한다.  그런데 날자가 평일이다. 평일날 근무시간대는 가급적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언제 전화 올지 모른다. 갑작스럽게 일감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럼에도 선뜻 응한 것은 회비가 없다는 것이다. 버스에 몸만 실으면 되는 것이다. 다만 먹을 것은 준비해 오라고 했다. 점심은 각자 해결하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끌렸던 것은 미륵사지라는 말이다. 반파된 채로 1400년동안 그 자리를 지킨 미륵사지 석탑과 마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었다.

 

2019 4 30일 화요일 금산사와 미륵사지로 성지순례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평일에 시간을 내는 것도 일인사업자의 자유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지는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교과서에서만 본 미륵사지 앞에 서고 싶었다. 이런 욕심이 평일임에도 전세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다.

 

영화사는 꽤 큰 절

 

영화사는 구의동에 있다. 처음 가보는 절이다. 아차산 영화사라 한다. 새벽에 출발했다. 전철로는 늦을 것 같아 차를 가져 갔다. 영화사는 생각보다 꽤 큰 절이다. 가람이 매우 웅장하고 터도 매우 넓다.

 










영화사에서 버스가 4대 출발했다. 영화사 신도가 아닌 사람들은 4호차에 탑승했다. 탑승인원은 절반이 약간 넘었다. 남자라고는 사무장과 나이 든 노거사 2명을 포함하여 4명이 전부였다. 지구촌공생회 봉사자들이 팜플렛을 돌리면서 회원가입을 권유했다. 만원부터 시작이다. 즉석에서 4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런 적극적인 노력이 있기에 불교계 최대 국제구호단체가 되었을 것이다.

 

오층석탑을 다시 보니

 

지구촌공생회는 월주스님이 원력으로 만든 국제구호단체이다. 그래서일까 이날 전세버스는 먼저 금산사에 들렀다. 금산사에서는 작년부터 지구촌공생회 활약상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작년 불교학회 학술대회에 참관 했을 때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민중들의 애환과 희망을, 금산사 미륵대불 스토리’(2018-10-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또 다시 금산사에 있게 되었다. 여러 차례 와보니 이제 가람이 익숙해졌다. 꽃피는 봄이어서일까 고향에 온 듯 포근하다.

 

점심식사를 했다. 각자 가져온 밥과 반찬을 모아 한군데에서 먹는 식이다. S선생 일행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나 음식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 먹게 되었다. 다 먹고 난 다음 고마움의 표시로 늘 준비하고 있는 음악씨디를 선물로 주었다.

 

점심식사후에 금산사를 이곳저곳 둘러 보았다. 이제 신록이 막 시작되는 금산사는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작년 10월에는 보이지 않았던 방등계단 5층석탑도 우뚝 솟아 있다.

 



 

불과 6개월 전이다. 그때는 5층석탑이 보이지 않았다. 보수 공사를 위하여 해체 작업했던 것일까? 꽃피는 봄날 다시 예전처럼 우뚝 솟은 탑을 보았다. 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종합병원 같은 금산사 대적광전

 

문화재 해설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종합병원같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절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과 보살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어가서 확인해 보았다. 5 7보살이 있었다.

 

불상을 바로보고 오른쪽부터 약사여래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하여 5불이 있다. 보살상으로는 좌측부터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월광보살, 일광보살 하여 7보살이 있다. 모두 수인이 다르다. 주불은 중앙에 있는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여 노사나불은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이 있다. 가장 끝 양옆에는 왼쪽에 약사여래불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로자나불-노사나불- 석가모니불-약사여래불- 아미타불 순이 된다. 왼쪽을 먼저 쳐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5불의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서열이 3위에 해당된다.

 



 

금산사 대적광전에 앉아 있으면 제불보살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 같다. 그래서일까 우스개 소리로 금산사 대적광전은 종합병원같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평지돌출형의 미륵산

 

금산사에서 버스가 1시에 출발했다. 미륵사지에서 2시가 정비보수준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가 교구본사인 금산사의 관할구역에 있기 때문에 전북불교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울 영화사는 금산사의 말사에 해당되기 때문에 신도들이 참여한 것이다. 그런 미륵사지는 어디에 있을까? 위성지도를 찾아 보았다.

 

 





지도를 보면 미륵사지는 김제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곳이다. 미륵사지 뒤에는 해발 430미터의 미륵산이 있다. 평지에 돌출된 산이다. 이와 같이 평지돌출형은 평야 어디서나 보이기 때문에 성지가 될 수 있다.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도 평야에서 보면 돌출형이다. 이처럼 평야시대에서 돌출된 산이 있으면 대개 미륵성지이기 쉽다. 미륵성지가 전북과 충남 등 평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미륵산은 평지에 돌출되어 있다. 평야지대 저 멀리서도 보인다.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한번 불길이 타오르면 삽시간에 번진다. 예로부터 농민반란이 자주 일어났던 것도 이와 같은 지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근대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이곳에 일어났고 각종 민족종교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미륵신앙은 매우 뿌리가 깊다. 민중들은 어떤 세상을 바랬을까?

 

20년만의 준공식

 

행사장에 도착하니 축제분위기이다. 바로 가까이에 밑면이 넓은 삼각형 모양의 산이 우뚝 솟아 있다. 민중들의 애환을 품어 줄 수 있는 거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곳에 미륵성지가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폐사지 미륵사지이다. 그곳에서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이 열렸다. 공사를 시작한지 20년 만이라 한다.

 



 

미륵사지는 오래 전부터 한번 와 보고 싶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사찰성지순례를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이곳에는 한번도 와 보지 못했다. 그것은 폐사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폐사지에는 석탑만 하나 덩그러니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면 당간지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찰순례 대상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제행무상이라 한다. 어느 것 하나 영원한 것이 없다.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 마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염되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폐사지에 서면 무상을 볼 수 있다. 한때 여법한 가람과 수많은 승려들이 북적였을 곳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행사장에서

 

행사장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차와 떡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금산사와 지구촌공생회에서 온 자원봉사들이다. 어느 행사를 가든지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두 공덕짓는 행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받을 줄만 알지 줄 줄을 모른다. 대부분 인색하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타인을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보시공덕을 잘 짓는 사람들이다. 그 보시공덕이 언젠가 커다란 과보로 돌아 올 것이다.

 



 

행사장에는 평일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방송사에서는 촬영을 했다.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편에는 반파된 서탑이 보였다. 보수를 마친 것이다. 이전에는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모두 깨끗이 걷어 내고 새단장을 한 것이다.

 



 

바위로 된 것은 천년 만년 남아

 

행사장을 빠져 나왔다. 탑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당간지주를 보았다. 어느 폐사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다. 돌로 된 것은 남아 있다. 목재로 된 것은 불타 없어지고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석탑이나 당간지주, 그리고 주춧돌과 같이 바위로 된 것은 천년 만년 남아 있다. 폐사지에서 그 흔적을 보았다.

 

 



가장 먼저 동탑을 보았다. 1992년 복원 된 것이다. 그때 당시 TV에서 복원 과정을 보았다. 9층탑이다. 반파된 서탑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복원이라 하지만 새로 만든 것이나 다름 없다. 기단 일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옛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화재로 쳐 주지 않는다. 내부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다. 중앙에 있었던 목탑의 흔적이라 한다.

 





 

강당지를 보니

 

탑 뒤로 가면 가람배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금당과 강당, 그리고 승방에 대한 것이다. 금당을 중심으로 하여 금당 앞에는 좌우에 탑이 있고, 뒤에는 강당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구조는 백제 폐사지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황룡사터에서도 볼 수 있다.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장인이 만들었다고 하니 백제의 가람 양식이 적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백제 가람배치 양식은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2012년 일본성지순례 갔었다. 그때 당시 야쿠시지(藥師寺)의 가람배치가 백제 폐사지와 매우 유사했다. 야쿠시지에도 커다란 강당이 있었다. 길이가 40여미터가 된다. 무척 큰 공간이다. 그런데 미륵사지 강당지는 길이가 65미터로 훨씬 더 크다. 폭은 20미터라 한다. 이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서 측량이 가능한 것이다.

 




미륵사지 강당지는 어느 정도 큰 것일까? 축구장 반 보다 더 긴 길이이다. 시골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것이다. 그러나 목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타버린 것이다. 1400년 지나 오면서 나라가 망하는 등 온갖 전란이 있었는데 온전히 보전 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은 돌로 된 기단 뿐이다.

 

일본불교 절에서 백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백제에서 불교가 일본으로 넘어 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본다. 그래서 야쿠시지에는 금당이나 동탑, 서탑, 강당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미륵사지에는 너른 벌판에 주춧돌만 보인다. 과거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다. 본래 백제 왕실 사찰에서 출발했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그 역할도 유명무실해졌다. 그럼에도 임진왜란 고려시대까지는 사격을 유지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줄어 들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폐허가 되었다.

 




폐사지에 덩그러니 수조가

 

석탑 뒤편으로는 너른 잔디밭이다. 행사가 진행중임에도 한가로이 이곳을 거닐었다. 폐허는 잘 가꾸어져 있다. 폐사지에도 봄은 왔다. 민들레가 지천에 피어 있다. 한 곳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로 된 수조가 있었다. 어떤 용도일까?

 

 



절에 가면 수조모양의 바위를 종종 본다. 밥을 지을 때 사용되는 것이라 한다. 얼마나 가람이 컸으면 이와 같이 커다란 수조를 사용했을까? 민들레가 피어 있는 폐사지에 덩그러니 수조가 방치 되어 있다. 저 멀리 준공식을 앞둔 반쪽짜리 석탑이 눈에 들어 왔다.

 

위풍당당 재탄생의 순간

 

서탑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준공식 테이프 커팅을 하는 것이다. 흰천을 사방으로 둘러 놓았다. 이날을 위하여 20년 기다렸다고 한다. 마침내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일제시대 때 덧붙인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걷어 내고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마침내 힌천이 걷어 졌다. 준공된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일제 잔재를 걷어 내는 것 같았다. 비록 반쪽짜리 모습이지만 존재 그 자체로도 위풍당당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불쑥 솟아 오른 동탑과는 비교 되지 않는다.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를 만들고자

 

미륵사는 왕실사찰이었다. 백제왕실에서 각별한 후원속에 무왕시대때 창건되었다. 대략 600년에서 641년으로 본다. 왜 미륵사라 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자산에 가던 무왕부부가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만난 것이 시작이다. 왕 부부는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왕비는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왕은 지명법사에게 절을 지으라고 했는데 하루 밤사이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고 한다.

 

미륵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메떼이야(metteyya)를 말한다. 미래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이 사라지고 난 다음 한량없는 세월이 지난 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정법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가르침이 오염되고 변질되어서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암흑의 시대이다. 법이 없는 무법천지와 같다.

 

삼국시대때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힘이 센 나라가 힘이 약한 나라를 정복하는 시대이고 힘의 곧 정의인 시대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위협 속에 있어서 수도를 여러 번 옮겼다. 무왕당시에는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그것은 미륵사지 옆에 있는 왕궁지로서도 알 수 있다.

 

전쟁의 시대에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만드는 것이다. 백제 왕실도 그랬을 것이다. 이는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王宮)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의 사리(舍利)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 사리)으로 일곱 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였다.

우리 백제황후(百濟王后)는 좌평(佐平) 사택적덕(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世世)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립〔王位(寶曆)〕은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
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永遠)토록 다함께 복이(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소서.” (사리봉영기)

 



 

사리봉영기를 보면 법왕정법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여기서 법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백제 무왕을 말한다. 무왕을 법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단어는 전륜왕을 떠오르게 한다. 문맥으로 보면 무왕은 전륜왕에 가깝다.

 

전륜왕은 어떤 왕일까?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D30)에 따르면 전륜왕에 대하여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폭력이 없고 약탈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번영하고 풍요하고 안온하고 평온하고 위해가 없는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D30)라고 했다.

 

무왕은 전륜왕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고대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까대왕을 떠 오르게 한다.

 

아소까 대왕은 담마비자야(Dhammavijaya)라 하여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온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부처님 가르침으로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백제 무왕은 전쟁없는 평화를 발원했을 것이다. 그것은 미륵사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미륵을 꿈꾸었다는 것은 정법이 무너진 약육강식의 세상임을 말한다. 무왕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미륵이 꿈꾼 세상은?

 

미륵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백제는 미륵사 창건 후 한세대가 지나서 무너졌다. 백제는 사라졌지만 미륵사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도 사격을 유지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명맥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폐허가 되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서탑은 반파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미륵사지 주춧돌에 앉아 정비보수를 마친 서탑을 바라 보았다. 파손 되어 일부만 남아 있어도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일어나 탑을 돌았다.  1400년 당시에도 이렇게 탑돌이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사람들은 탑돌이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미륵을 꿈꾸었을 것이다.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평화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아소까 바위칙령 13)



2019-05-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