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민중들의 애환과 희망을, 금산사 미륵대불 스토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21. 12:52

 

민중들의 애환과 희망을, 금산사 미륵대불 스토리

 

 

일인사업자에게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일이 있으면 일을 하지만 일이 없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글쓰기입니다. 일하는 날 보다 노는 날이 더 많은 개인사업자에게 글쓰기는 시간 보내기에 딱 알맞은 취미입니다.

 

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김성철교수로부터 받은 메일입니다. 금산사에서 열리는 불교학회에 참여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메일입니다. 이런 메일을 받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자도 교수도 아닌 자가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담당에게 문의 해 보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메일을 받게 된 동기는 아마 십년전에 김성철 선생 홈페이지에 남긴 흔적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좀처럼 열어 보지 않는 네이버 메일에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최근 불교학회장이 된 김성철 선생이 주도하는 학회모임입니다.

 

정각원을 향하여

 

2018 10 19일 금요일 집결지인 동국대 정각원으로 향했습니다. 7 50분까지 모이기 때문에 안양에서 새벽같이 출발했습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 보니 캠퍼스에 이곳저곳에 단풍이 본격화 되고 있어서 가을이 완연합니다. 청명하고 선선해서 매우 상쾌하고 기분 좋은 이른 아침입니다.

 

시간이 남아서 교내 이곳저곳을 돌아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정각원에서 참배했습니다. 동국대에 있는 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양을 보니 궁궐형식입니다. 돌계단 문양도 그렇고 법당안의 천정에 있는 문양도 그렇습니다. 마치 작은 근정전을 보는 듯 합니다. 왕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부처님이 계신 것 같습니다.

 

본관 앞에 있는 불상으로 향했습니다. 여래입상이라 하여 보기에도 매우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불상은 중학교 시절에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보았을 때도 참 잘생겼다고 느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다시 쳐다 보아도 눈매하며 옷주름 등이 옛날에 느꼈던 그대로입니다.

 



 

중학교를 동국학원 산하의 종립중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 당시 부처님오신날 동국대에서 동국체전을 했는데 카드섹션 연습하느라 매일 오후에 동원되었습니다. 종로 5가 부근 연지동에서 장충동 동국대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동국대는 무척 가파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산 위에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때 그 시절의 대운동장 계단도 그대로입니다. 그때 당시 계단이 높고 가파르게 보였는데 지금도 마찬가지 느낌입니다. 동국체전이 끝나고 제등행진에 참가 했습니다.

 



 

금산사로 이동중에

 

21명을 태운 우등고속버스가 금산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학술세미나는 오후 12 40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동 중에 이서 휴게소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대와 참가비는 무료입니다. 단지 몸만 실으면 됩니다. 이런 것도 참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바깥 바람 쐬고 싶은 욕망도 작용했습니다. 무엇보다 불쾌했던 일을 씻어 버리고 싶어서인 것도 있습니다. 자유로이 시간 낼 수 있는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동 중에 선물을 하나 했습니다. 참석자 전원에게 준비한 음악씨디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씨디에 대하여 설명하는 대신 들어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성철선생은 운전기사에게 부탁하여 그 자리에서 씨디를 들려 주었습니다.

 

씨디 첫번째 곡이 중국계 말레이시아 불자가수 이미우이(Imee Ooi: 黃慧音)의 자비송(The chant of metta)입니다. 이 자비송에 대하여 김성철 선생이 특별히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이 음악을 널리 유포시킨 장본이라 했습니다. 플레시를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것이 시초라 합니다. 그런데 이미우이의 자비송을 가장 먼저 발견하여 국내에 소개한 사람이 이승훈선생이라 했습니다. 재야의 고수라 하는데 이번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간단하게 인사 나누고 씨디 전달해 주었습니다.

 

11년 만에 찾은 금산사

 

정오 조금 지나 금산사에 도착했습니다. 십일년만에 다시 와봅니다. 어디를 가든지 후기를 남깁니다. 블로그를 열어 보니 2007 3월에 마이트레야(Maitreya,彌勒)를 기다리며… 모악산 금산사(母岳山 金山寺)’(2007-03-11)이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때 당시 개인적으로 찾았습니다. 마침 디카를 구입하게 되어서 이곳저곳 사찰순례 다닐 때입니다.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한참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때 입니다. 우리나라 유명사찰이나 전통사찰을 다 둘러 보자는 소박한 원력을 세웠을 때입니다.

 



 

지금으로터 11년 전 기록을 열어보니 미륵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국보 미륵전과 미륵불에 대한 이야기가 금산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이번 불교학회의 추계특별학술대회 명칭은 금산사 보살계 사상의 전승과 실천에 대한 것입니다. 모두 미륵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중에 윤범모 교수는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 했습니다.

 

이번 불교학회 세미나는 네 명의 발제자와 네 명의 평론자로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 5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김방룡 충남대철학과교수는 금산사를 빛낸 중흥조 고승들의 업적과 시대적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박광연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고려전기 불교교단에서 금산사의 위상에 대하여, 이수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금산사 방등계단과 진표율사에 대하여, 윤범모 동국대석좌교수는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동명이인 이병욱 고려대 교수는 보살사상의 사회참여적 측면과 월주스님의 사회참여활동에 대하여 발표했습니다.

 



 

금산사가 왜 미륵신앙의 메카가 되었을까?

 

금산사 하면 미륵전이 떠 오릅니다. 자연스럽게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와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11년 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남긴 글에서 이런 학정에 시달린 민초들은 저 멀리 솟구쳐 있는 모악산을 바라보며 미륵의 세상을 꿈꾸며 고통을 참아 왔는지 모른다.”라며 모악산과 미륵신앙을 언급했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도 김방룡교수는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메카라고 표현했습니다.

 

금산사가 왜 미륵신앙의 메카가 되었을까? 이에 대한 발제자들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호남평야와 관련 있을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평야를 볼 수 있습니다. 마침 가을이라 들판은 황금색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김제지역입니다.

 



 

예로부터 곡창지대는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망무제로 끝없이 펼쳐진 들녁에 황금물결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만 그 속에 사는 민중들은 헐벗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미륵은 일종의 메시아와 같았습니다. 미륵을 뜻하는 마이트레이야는 기독에서 말하는 메시아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악산은 평지돌출형의 산

 

같은 불교를 믿어도 호남의 곡창지대의 사람들은 미래 구원불의 성격으로서 미륵불을 믿었습니다. 지주들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벗어나고픈 바램이 미륵신앙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 금산사가 있었습니다.

 

금산사는 모악산에 있습니다. 그런데 모악산은 평지돌출형의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보입니다. 저 멀리 평원 아득한 곳에서도 모악산이 보일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랜드마크가 모악산입니다. 그런데 평원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면 삽시간에 퍼진다는 사실입니다.

 

산중에 있는 마을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산중에서 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평원에서는 모든 소식이 급속하게 퍼져 갑니다. 동학농민운동이 호남평야에서 일어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농민봉기는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한사람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하여 삽시간에 평원전체로 퍼져갑니다.

 

호남평야 민중들에게 있어서 모악산은 일종의 랜드마크이자 정신적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민봉기가 일어날 때는 평지돌출형의 모악산과 같은 지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김방룡교수는 모악산 금산사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미륵의 성지라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증산교의 성지라 했습니다.

 



 

증산교의 성지이기도 한 금산사

 

이번 학술대회에서 금산사가 미륵성지일 뿐만 아니라 증산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이는 윤범모교수가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이라는 제목으로 말한 것에서도 확인 되었습니다.

 

윤범모 교수는 다른 발제자들과 달리 논문을 읽어나가는 식이 아니라 파워포인트를 이용하여 요점만 설명하는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청중들의 집중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윤범모교수는 미륵전의 미륵불이 1930년대 김복진의 작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국보인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타 버린 것을 인조때 재건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범모교수에 따르면 17세기 때 가운데 목조 미륵본존상이 실화로 불에 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 김복진이 약 11미터에 달하는 소조 미륵본존불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 미륵불이 조성된 배경에 대하여 윤범모교수는 각주에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일제하 금산사와 그 일대는 증산교도들의 운집으로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증산교도들은 금산사를 하나의 거점으로 삼아 미륵전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등 교세를 크게 떨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렇다면 미륵전 본존상을 제작하던 김복진이 이들 증산교의 존재에 대하여 몰랐을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신종교인 증산교에 대한 이해와 특히 증산교에 있어서 본존상의 의의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는 물론 이와 같은 증산교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서 미륵전 본존상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 , 31번 각주)

 



 

 

윤범모교수는 강연도중에 김복진의 아들이라고 농담삼아 소개 했습니다. 그 정도로 김복진을 높게 평가하고 선양사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산사 미륵전 미륵대불이 증산교의 영향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김복진이 미륵불 제작에 임한 것에 대하여 금산사의 미륵신앙이나 증산의 사상을 이해하고 제작에 임했을 것이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금산사가 미륵도량인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평지돌출형의 모악산 안에 조성된 미륵성지는 놀랍게도 증산교의 성지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 세미나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인근 마을에서 했는데 식당 입구에 증산교본부 50m’라고 써진 석판을 발견했습니다.

 

조계사 대웅전의 유래

 

금산사는 증산교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증산교본부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1928년 이상호가 창시한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라고 소개 되어 있습니다. 증산교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칭별칭으로 훔치교라 되어 있습니다. 설립자는 강증산입니다.

 

증산교는 1902년 강일순이 창시한 종교입니다. 증산교는 일반적으로 그로부터 갈라진 교파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 합니다. 일제시대 때는 훔치훔치…”로 시작 하는 것을 본떠 훔치교(吽哆敎)라 합니다.

 

증산교의 발생은 동학혁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동학혁명에 참가 하였던 급진적 성향을 가졌던 농민들이 주축이었는데 강일순이 조직화 하여 모악산 부근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세를 확장 했는데 그 중에 차경석의 보천교가 가장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합니다.

 

인터넷백과 사전에 따르면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60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계사 대웅전은 1936년 보천교의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 합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일제시대 당시 증산교 계열의 종교가 세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김복진이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을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김복진의 미륵대불

 

우연한 기회로 불교학회 버스에 탑승하게 되어 금산사에 가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금산사에 갔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너른 마당에 전각이 드문드문 있고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 약간은 황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곳이 민중들의 애환이 담긴 미륵성지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증산교도들의 성지기이도 했다고 합니다. 윤범모교수에 따르면 강증산은 내가 죽으면 금산사 미륵이 되리라.”라 했는데 이런 영향이어서인지 30년대에 미륵사에는 사하촌이 크게 발달했다고 합니다.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 조성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휴식시간에 미륵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높이가 약 1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은 보기만 해도 경외감이 들게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불상이 1936년 김복진이라는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근래 보기 드문 대작인 미륵본존불은 미래지향적이고 당당한 자세입니다. 본래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지만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림과 같은 작품에는 플레시 터뜨리면 안되지만 돌이나 흙, 철로 만든 불상에 카메라를 대는 것은 훼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중들의 애환과 희망을

 

어느 발제자는 금산사의 주인에 대하여 이름없는 민중들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호남 민중들의 애환과 희망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곡창지대에서 수탈과 업압에 눌린 농민들이 들불 같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평지돌출형의 모악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산중에 있는 미륵불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을 벗어나 저 머나먼 이상적 세계에 이르고자 발원한 것이 오늘날 금산사를 미륵의 성지와 증산교의 성지로 만들었다고 보여집니다.

 

 

 

 

2018-10-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