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잡아야
뒤척이다 잠을 깼다. 어두컴컴한 새벽이다. 더 잘 수 있으나 그만 두었다. 더 자려 한다면 잠에 대한 욕심내지 갈애일 것이다. 반드시 일정시간 자라는 법은 없다. 잘 잤으면 그만이다. 잠 잘 때는 뒤척이지 말고 송장처럼 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뒤척일 때 는 깨라는 말과 같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반이다. 깰만한 시간이 된 것이다. 남들 다 잠 잘 때 깨어 있는 것은 즐거운 느낌이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 앉은 듯이 마음도 착 가라 앉아 있어서 평온하다. 잠을 잘 자면 몸도 마음도 편안하고 안락하다.
어제 품었던 생각에 대한 해법이 떠 올랐다. 잊지 않기 위해서 스마트폰 메모앱에 키워드를 쳐 놓는다. 연쇄적으로 생각이 떠 오른다. 옹달샘에서 물이 솟듯이, 좋은 생각이 샘 솟는다. 역시 기록해 둔다.
우리 불가에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불교의 개방성이다.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는 것과 같다. 실제로 산사에 가면 담이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누구든지 법당에 가서 참배할 수 있다.
담이 있다면 함부로 들어 오지도 못하고 함부로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가는 사람 잡지 말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가는 사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과거의 것이다. 오래 전의 일이라면 더 많이 변했을지 모른다. 매순간 시시각각 변한다. 하물며 며칠전, 몇달전, 몇년전의 일이랴! 우리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들고 사는지 모른다. 과거에 나빳던 것, 불쾌했던 것, 불편했던 것, 괴로웠던 것에 대한 기억에 매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사람은 옛날 그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 기억하는 영어 구절이 있다. 그것은“I am not what I was.”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라는 뜻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배운 것이다. 그때 당시 이 말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주문처럼 외웠다. 무얼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왠지 이 말이 좋았다.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너무나 다가왔다. 꼭 나에게 적용되는 말처럼 생각되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말버릇처럼 영어로 “I am not what I was.”라며 중얼거린다.
그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산냐’에 해당된다. 오온 중에서 상온에 속한다. 과거 기억이나 이미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가 있다. ‘이것’에 그 어떤 것도 대입할 수 있다. 그사람 이미지를 대입 할 수도 있다. 그사람의 과거 이미지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세포분열하는 것은 나의 의지와 관계가 없다. 살아 있는 한 저절로 분열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장기도 되고, 뼈도 된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절로 일어난다. 통제불능이다. 해야 할 것이라고는 지켜 보는 일이다. 사띠(sati)하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일 외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오는 사람 막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막아서는 안된다. 다만 둘이 간다면 함께 갈 수 없다. 법구경에서도 어리석은 자와 길을 함께 가지 말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걷는 자는 오랜 세월 비탄에 젖는다.”(Dhp.207)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와 우정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길을 가려거든 나보다 낫거나 동등한 자와 함께 가라고 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 우정은 없으니.”(Dhp.61)라고 했다. 그러나 모임이나 단체에서는 다르다. 설령 그가 돌출행위를 했거나 감정상하게 했더라도 오계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면 막아서는 안된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모욕을 당했다. 그는 올린 글에 대하여 맹렬히 비난했다. 더구나 인신공격까지 했다. 글을 읽었을 때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그는 반박해 주기를 바랬다. 싸움을 걸었으니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견해차이로 본 것이다. 다만 “글 잘 읽었습니다.”라고만 짧게 답했다. 이것이 그 사람 화를 더 돋구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거는 것이었다.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저의 한계이고 저의 업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사람의 저격에 몹시 불쾌했다. 싸움을 걸어서 망신시켜 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더 이상 말려들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이 생각났다. 화내는 이에게 화내지 말라고 했다. 화를 내면 동급이 되어 진흙밭에서 뒹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밥상론’이다. 그가 차려 놓은 밥상을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받지 않으면 그사람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S7.2)라고 말씀 했다.
어리석은 자와 둘이서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나 모임에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 꼴보기 싫어서 안나갑니다.”라고. 그러나 본인만 손해이다. 그사람 보다 더 좋은 사람, 더 아름다운 사람, 더 훌륭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사람이 여전히 말썽 피운다면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말 걸지도 않고 말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 마부출신 ‘찬나’처럼 대하는 것이다.
부처님 유성출가를 도운 마부출신 찬나는 자만심으로 가득했다.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도 무시할 정도로 자만이 대단했다. 이에 부처님은 ‘브라흐마단다(brahmadaṇḍa: 梵罰)’라는 조치를 내렸다. 말걸지도 말고 대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시키는 것이다.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스스로 잘못을 알게 될 것이다.
불가에서는 “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라고 했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잡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사람은 바뀌기 때문이다. 그사람은 더이상 옛날의 그사람이 아니다.
2019-08-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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