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
귀지가 있다. 귀똥이라고 볼 수 있다. 귀속에 있는 이물질이 때가 되어 쌓이고 쌓인 것이다. 인위적으로 긁어 내기도 하지만 저절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느낌은 ‘시원하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귀지가 크면 클수록 느낌도 좋다. 새끼손가락마디만 하다면 어떠할까?
아침에 꿈을 꾸었다. 선잠에 꿈을 꾸면 대부분 안좋은 것들이다. 어떤 것은 너무 생생해서 오래 기억할 정도이다. 그래서 눈을 뜨면 일찍 일어나고자 한다. 새벽에 일어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이번 꿈은 대단히 상쾌했다. 새끼손가락마디만한 귀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오염물질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유쾌하고 상쾌한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나서 복기해 보았다. 어제 잘 산 것이었다. 일요일임에도 하루 종일 바빴다. 월요일 납기를 맞추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집중했다. 추석연휴를 포함하여 3일째 작업한 것이다. 마침내 밤늦게 작업이 완료 되어서 파일을 이메일로 발송했다. 이번만큼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살피고 또 살폈다. 한곳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손실로 이어진다. 이것은 학습효과에 따른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말이 있듯이 다시 한번 확인 하는 것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 하면 좋은 것이다. 싸띠(sati)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에 집하면 잡념이 없어진다. 일을 하면 일인사업자에게 여러 가지 이익이 있다. 수익이 생겨서 좋고, 잡념이 없어서 좋다. 그러나 일도 일 나름이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단순반복적 작업도 있다. 단순작업은 마치 호미들고 밭매듯 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럴 때 유튜브를 듣는다. 두 눈은 모니터를 향하지만 두 귀로는 유튜브 소리를 듣는다.
유튜브는 본다기 보다는 듣는다는 말이 나을 듯하다. 소리로 전달 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특히 작업을 할 때는 라디오처럼 듣는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 닥치는대로 보고 닥치는대로 듣는다. 때로 유익한 것도 있다. 어제 작업중에 들었던 것들이 그렇다.
유튜브를 듣다보면 ‘세상은 넓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감각적 영상을 떠나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많다. 헤게모니 다툼을 하는 수탁과 관련된 영상을 보면 조직이나 단체에서 파워게임을 보는 것 같다. ‘성호육묘장’에서 본 것이다. 몇 개 안되는 구독채널이다. 돈과 관련된 경제동영상을 보고서 은행의 출생비밀을 알게 되었다. 예금보다는 부동산이 낫고, 먼 미래를 본다면 금(金)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젊은 사람들의 활약이다. 이삼십대 유튜버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철학에 대한 것이다.
이것저것 클릭하다 걸린 것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것이다. 어느 철학과 교수가 만든 것이다. 그 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정리 된 듯 했다. 오래 기억해 두기 위해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는 말이다.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임을 알았다.
비트겐슈타인 동영상을 보면 세계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안’과 ‘세계밖’에 대한 것이다. 세계안이라는 것은 언어로서 설명될 수 있는 수학, 논리학, 과학 같은 것이다. 반면 세계밖이라는 것은 언어로서 설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 윤리, 종교, 예술 같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밖은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세계밖에 대하여 말로 설명하려 한다면 ‘넌센스’라고 했다. 우리말로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종교에 대하여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 있다. 내생과 윤회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신통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믿게 하려면 내 눈 앞에서 보여 달라.”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따진다면에 모든 종교적 이야기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학적 실증주의자들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말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말하고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는 것이다.”라고 말 했다.
귀지가 떨어져나간 꿈을 꾸었다. 시원한 꿈이다. 어제 하루를 잘 산 것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하루 종일 일 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치고 들어 오는 것이 적었다. 그렇다면 평상시에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그것은 싸띠하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 행위에 대하여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싸띠가 끊이지 않았다면 잘 산 것이다. 그러나 업력이 있어서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을 지각한다면 큰공덕이라고 했다. 하물며 하루종일 알아차림이 유지된다면 그 수행공덕은 어떠할까.
‘존재냐 소유냐’라는 말이 있다. 이를 ‘존재냐 싸띠냐’로 바꿀 수 있다. 범부들은 소유로 살 것이다. 그러나 담마를 따르는 사람들은 싸띠하며 살 것이다. 싸띠는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림할 뿐이다. 평상시에도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면 그는 도인이라 볼 수 있다.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
2019-09-16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3년만에 또 다시 촛불을 (0) | 2019.09.25 |
---|---|
축제의 계절에 특산품 팔아주기 (0) | 2019.09.21 |
정의는 이런 것 (0) | 2019.09.15 |
불로소득을 부끄러워하자 (0) | 2019.09.14 |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말자 (0) | 2019.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