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지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19. 19:25

 

 

 

지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때로 한마디가 강렬하게 꼽힐 때가 있다. 그런 말 중에 하나가 존재자체가 민폐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보수야당의 어느 국회의원이 한 말이다.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당에 대하여 존속하는 것 자체가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자체가 민폐라는 말에 매우 공감했다. 어느 누구나 어느 단체이든지 공동체나 사회에 폐를 끼치는 행위를 했을 때 존속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사라져야 하고 단체라면 해체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사람들은 폐끼지 않고 살려고 한다. 대부분 남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일종의 소극적 공리주의이다. 큰소리로 말 하는 것을 실례라 여긴다. 아파트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소극적 공리주의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극도로 무관심해졌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은 당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독거노인이 고독사해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주변이 소란스러울 때가 있다. 서로 싸우는 것이다. 다툼이 있을 때 주변에 폐를 끼치게 된다. 그런데 상습적으로 다툼을 일삼는 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경우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강력한 제재해야 한다. 때로 격리할 필요도 있다.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공동체에 폐끼치는 사람이다. 그럴경우 존재자체가 민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행위가 불편과 불쾌를 유발하는지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다. 마치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행위인줄 모르는 것과 같다. 만일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안다면 그는 현명한 자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세상을 살다가 떠난다. 어쩌다 태어나다보니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세상은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예전에 부터 사람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 갈 것이다. 잠시 머물다가 가는 세상이다. 손님처럼 머무는 것이다. 세상것들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 없다. 마구 써 버린다면 다음 사람이 쓸 수 없을 것이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다.

 

 

 

해외여행가면 호텔에서 머문다. 어떤 사람이 흰 이불에다 실수로 커피를 쏟았다. 세탁비를 배상해 주어야 했다. 공공기물을 파손하면 처벌받는다. 자연보호구역안에 들어가면 벌금을 내야한다. 나그네가 머물다 가는 이 세상은 공공재나 다름없다.

 

 

 

술 취한 자가 전봇대 옆에 토해 놓은 것을 보면 구역질 난다. 손님처럼 왔다가 가는 세상에서 세상을 오염시킬 수 없다. 싸움을 하고 전쟁을 하여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자원이 고갈되든말든, 환경이 오염되든말든 막 살 수 없다. 기후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모든 재난은 탐욕으로 인해 발생했다. 탐욕이 치성하면 겁화(劫火)가 일어난다. 초기경전에는 태양이 두 개, 세 개 가 되다가 마지막으로 일곱 개가 되었을 때 세상이 불에 의해 망한다고 했다. 괴겁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 같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보면 심각하다. 이대로가면 이십년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탄소가스 배출에 따른 지구온난화는 현대판 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저상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동안 지수함수적으로 성장해 왔다. 특히 산업혁명기 이후 부터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다. 최근 몇십년동안 성장의 각도는 직선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없이 성장할 수 없다. 한번 시세분출한 주식이 정점을 찍듯이 이제 내려 갈 일만 남았다. 그것도 급격한 내리막이다. 지수함수적으로 성장했으니 지수함수적으로 내려가야 정상일 것이다. 아니 아예 원시시대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핵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돌도끼를 든 원시인이 될 수 있다.

 

 

 

물질문명은 허망한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라하여 손 안에서 세계를 보지만 그만큼 정신문명이 따라 간 것이 아니다. 물질문명은 편리와 안락을 위하여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욕망이 투영된 물질문명은 또 다른 욕망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인류가 지구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자체모순에 의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정신문명은 이미 형성되어 있다. 기축의 시대에 형성된 것이다. 기축의 시대는 스마트폰 시대의 관점으로 본다면 원시시대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문명은 이미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눗따라삼마삼보디(無上正等正覺)라고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말한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정신문명 또한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다만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설령 에이아이(AI)시대가 된다고 해도 부처님의 깨달음은 변함없다. 이천오백년전에 다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세상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금은 평화로워보여도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할 수 있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지 않는 한 멸망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들은 경고하고 다니다. 마치 청정도론에서 본 로까뷰하(lokabyūha)’천신이 비참한 모습을 하고서 여러분, 세상에 종말이 옵니다. 자애를 닦으십시오.”(Vism.13.34)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것 같다.

 

 

 

지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욕망을 줄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삶이다. 넓은 평수에 살고 고급숭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매일매일 잔칫날이고 하루하루가 파티날인 삶을 지양해야 한다.

 

 

 

너른 평수에 살며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맛집만 찾아 다닌다면 지구온난화에 기여하게 된다. 맛에 대한 갈애는 공멸로 몰고 갈 것이다.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관찰해야 한다. 멈춤과 통찰이다. 이 시대는 부처님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이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땅을 정복하고 번식하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버려야 한다. 그 자리에서 멈추어서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관찰해야 한다. 욕망을 줄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구원이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과 같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 하루 묶을 곳에서 여장을 풀면 다음 사람을 위하여 잘 사용해야 한다. 이 땅은 우리만 사는 곳이 아니다. 후손들도 살 곳이다. 후대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르침이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가르침에는 생존할 수 있는 지혜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경전이라는 것은 케케묵은 구닥다리정도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열어 보면 놀라운 것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이천오백년 전에 이렇게 심오한 가르침이 있었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접했을 때 인식의 지평은 넓어진다.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지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정신문명은 물질문명과 달리 궁극에 이르렀다. 다만 모르고 살고 있을 뿐이다.

 

 

 

 

 

2020-01-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