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담을 쌓으면
요즘 일체 접촉을 하지 않고 있다. 본래 혼자 일하기 때문에 접촉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접촉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밥먹으로 갈 때는 식당에 가야 한다. 자연인처럼 사는 사람도 시장에는 가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임을 자제하고 있다. 종교모임, 단체모임 등 각종모임이 취소되고 있다. 사람들은 가능하면 이동을 삼가고 있다. 마스크는 기본이고 심지어 장갑까지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마치 눈만 마주쳐도 바이러스에 걸릴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 안양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1명 발생했다. 시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안전안내문자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정보를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는 사람들이 줄은 것 같다. 대형마트도 이전과 달리 한산한 것 같다. 문자한방에 사람들은 더욱 더 위축된 것 같다.
에스엔에스(SNS)에서는 온갖 얘기가 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 동시에 괴담수준의 얘기도 많다. 가짜뉴스로 판명 난 것도 있다. 질병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타자화(他者化)하는 것이다.
대구와 청도에서 코로나19가 집단발병 했다고 한다. 하필 왜 거기였을까? 이에 대하여 신천지가 공격받고 있다. 신천지가 바이러스 유포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신천지는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알려져 있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신천지가 바이러스 온상이 됨에 따라 사람들은 신천지의 대응방식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다. 신천지 교주에 대해서는 악마화 하고 있다. 신천지 전체를 타자화 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화는 요즘 지식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 타자화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악마화’ 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와 다른 것을 넘어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견해가 달라도 타자화 되고, 지역이 달라도 타자화 된다. 인종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타자화와 반대되는 말은 동일화(同一化)일 것이다. 그래서 내편과 네편으로 가른다. 내편이면 감싸지만 네편이면 배척하는 것이다. 타자화는 악마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상대방을 악마화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다. 농경민족이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한족은 북방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만리나 되는 긴 성을 쌓았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 유목민족둘이 장성을 타고 넘어온 것이다. 만리나 되는 성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을 쌓고 있다.
성을 쌓으면 공성전과 농성전이 벌어진다. 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은 타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을 쌓는 것은 다름아닌 타자화라고 볼 수 있다. 성 안의 사람과 성 바깥의 사람을 확실히 구별하는 것이다. 성 안은 내편이고 성 바깥은 네편이다. 농경민족이 장성을 쌓은 것도 유목민족을 타자화하기 위한 것이다. 또 성을 쌓아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성을 쌓는 행위는 ‘성을 타고 넘어오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타자화는 악마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악마와 같은 유목민족이 성을 타고 넘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자꾸 담장이 높아진다. 부자집 담장이 높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집은 축대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마치 성채를 보는 것 같다. 담장에는 철조망이 있다. 최근에는 CCTV와 함께 침입경보시스템도 갖추어 놓고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 보는 저택도 그렇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쌓는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 것일까? 상대방을 타자화하여 담을 쌓으면 상대방은 반드시 담을 타고 넘어오게 되어 있다. 모든 경우가 그렇다. 이번 코로나사태도 그렇다.
사람들은 신천지를 타자화하고 있다. 그런 신천지는 이미 타자화 되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간주하여 성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연기법적 관점으로 본다면 모두 영원주의라는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법적으로 조건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담을 쌓지 않는다. 다만 연민으로 지켜볼 뿐이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Dhp.130)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인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럴 때 ‘죽음의 명상’을 하라고 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사수념(死隨念)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자의 얼굴은 다름아닌 미래의 내얼굴이다. 병들어 괴로워하는 자의 얼굴도 내얼굴이고, 형편없이 늙어 버린 자의 얼굴도 내얼굴이다. 마찬가지로 폭력에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도 내얼굴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Dhp.130)라고 했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항상하지 않다. 이를 한자어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삽베 상카라 아닛짜.(sabbe saṅkhārā aniccā)”(Dhp.277)라고 한다. 모든 것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라고 지혜로써 관찰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이것이 청정의 길이라고 했다.
어느 것도 가만 있지 않다. 지구도 꿈틀거린다. 지각변동이 일어나면 지진이나 쓰나미가 일어난다. 신이 노한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도 가만 있지 않는다. 복제되는 과정에서 변종이 생길 수 있다. 이를 돌연변이라고 한다. 신종코로나는 돌연변이에 띠른 것이다. 이런 것도 제행무상의 법칙에 해당될 것이다. 신이 내린 형벌이 아닌 것이다.
대구와 청도에서 발생한 코로나 집단발병은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의 무지(無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를 신천지라는 종교에 책임을 물어 타자화 하는 것은 악마화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정부의 방역실패로 보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 역시 정부를 타자화하여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 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을 타자화 하면 반드시 타고 넘어온다. 철옹성을 쌓으면 쌓을 수록 더욱더 타고 넘어온다. 담을 쌓기 보다는 자애와 연민으로 대해야 한다.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네 얼굴을 보라.”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의 얼굴에서 내얼굴을 보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하여 ‘너는 틀렸다’라고 타자화 하여 악마로 만든다면 이는 다름아닌 폭력행위에 해당된다. 법구경에서는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Dhp.130)라고 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자의 얼굴에서 네얼굴을 보아야 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자애와 연민으로 대했을 때 담을 타고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2020-02-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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