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세상에 종말이 와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26. 08:38

 

 

 

세상에 종말이 와도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온 것처럼 두려워하는 것 같다. 방송에서는 실시간으로 재난방송을 한다.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갖가지 소문과 괴담, 심지어 가짜뉴스까지 떠 돈다. 또 한편에서는 정부를 비난한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다.

 

 

 

 

 

 

 

확진자가 천명 가까이 되었다. 앞으로 일이주가 고비라고 한다. 대구를 넘어 전지역으로 확산할 것인지 꺽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두려움이 일어난다. 마치 밤길을 걷는 것처럼 공포가 엄습하기도 한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는 것은 나도 걸릴 수 있음을 말한다. 최악의 경우 목숨마저 잃을 수 있다. 더구나 사는 지역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죽음의 사신이 성큼 다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심산유곡으로 피난 갈 수 없다. 생업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다.

 

 

 

가능하면 접촉하지 말라고 한다. 귀가하면 반드시 손부터 씻으라고 한다. 손씻기 하나만 잘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식당이나 시장을 가지 않을 수 없다.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경제활동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접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사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에스엔에스에서 어떤 사람은 정부의 대응방식에 대하여 맹비난 했다. 정부가 중국사람들의 입국을 막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대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심지어 파안대소하는 대통령부부 사진까지 올려 놓았다. 대구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한가하게 파티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사진은 출현하게 되어 있다. 나올 때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흠집 내고자 하는 악의가 엿보인다. 봉준호감독의 오스카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음에도 대구와 연계한 것이다. 접촉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괴로운 사람이 있다. 대체 괴로움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할까? 어떤이는 내탓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이는 네탓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내탓고 네탓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어디서 왔을까? 이는 벗이여, 세존께서는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납니다.”(S12.2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괴로움은 접촉에서 온 것이다.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발생한다. 내탓도 아니고 네탓도 아니다. 당연히 신의 탓도 아니다. 모든 괴로움은 여섯 감역에서 발생된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를 삼사화합촉이라고 한다. 이렇게 접촉이 발생될 때 세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의 발생은 다름아닌 괴로움의 발생이라고 했다.

 

 

 

왜 세상은 괴로움의 세상일까? 괴로움의 생겨남에 대하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의 발생과 괴로움의 발생은 동의어인 것이다. 모두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코로나로부터 안전하려면 될 수 있으면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어쩔 수없이 접촉했다면 손을 씻어야 한다. 손씻기 하나만 잘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눈과 귀 등 감각기관을 잘 단속해야 한다. 특히 악의적인 정치관련 종편, 유튜브, 에스엔에스 등을 차단해야 한다. 접촉하지 않는 것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신앙의 대상에 의지한다. 여기 난파되어 침몰직전에 있는 배가 있다. 유일신교도라면 신을 찾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올 때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짓을지 모른다. 불교인들이라면 불보살을 명호 할지 모른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접촉을 끊어 버리면 된다. 접촉하지 않으면 더이상 두려움이나 공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명상을 하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명상을 하면 어떻게 될까? 죽음의 공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 천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다음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때 울부짓으면 어떻게 될까?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했다. 죽을 때 두려움과 공포의 마음이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을 대상으로 결생식이 일어날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마음으로 인해 그런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지극히 평온한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 그 평온한 마음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선처에 나기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죽음의 순간에 명상을 하면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한번에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 首等)’라고 한다.

 

 

 

호랑이한테 먹히는 순간에도 집중하면 아라한과 완전한 열반이라는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마시시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경전에서는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고 했기 때문이다.

 

 

 

질병의 사마시시가 있다. 설명되어 있다. 질병에 걸린 자가 동시에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로가사마시신(rogasamasīsīn)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질병의 수등자’라고 번역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떤 자가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이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질병의 수등자라 한다.(Mrp.IV.6-7)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에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못되어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짓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생에서 한번 죽어 본 사람은 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크게 죽어 본 자만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상을 하면 큰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세상은 접촉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했다.

 

 

 

명상을 하면 세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세상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괴로움에서 해방된다. 코로나는 명상으로 극복할 수 있다. 어떤 서양철학자는 세상에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불교인이라면 "세상에 종말이 와도 명상을 하겠다.”라고 말 해야 하지 않을까?

 

 

 

 

 

2020-0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