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첨탑은 자꾸 높아지고 광신자들은 자꾸 생겨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28. 12:39

 

 

 

첨탑은 자꾸 높아지고 광신자들은 자꾸 생겨나고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만 몸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아프다는 것이다.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독감에 걸린 것처럼, 중병에 걸린 것처럼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나라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개인의 감염이 집단감염이 되었을 때, 그것도 지역을 넘어서 나라 전체가 감염될 위기에 처 했을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재난방송에서는 매시간 코로나19관련 감염자, 완치자, 사망자 숫자를 발표하고 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감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수칙을 알려 주고 있다.

 

 

 

감염자는 폭증하고 있다. 어느 2천명을 훌쩍 넘었다. 어떤 이는 조만간 만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대체 이 질병은 언제 꺽일까? 한가지 희망 섞인 보도를 보았다.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질병퇴치에 가장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진단 숫자로 알 수 있다.

 

 

 

바이러스 검사에 있어서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비교 되지 않는 수치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검사하는데 수백만원이 든다고 한다. 일본은 올림픽을 생각해서인지 자꾸 숨기려고 든다고 한다. 한국에서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퇴치를 위한 것이다. 조만간 매일 증가하는 숫자만큼이나 매일 완치자가 나올 것이다.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한국은 가장 청정한 나라가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거나 자꾸 숨기려고 하는 나라가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될지 모른다. 요즘 감염숫자가 늘어나면 날수록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갖는다.

 

 

 

몸이 쇠약해지면 병에 걸리기 쉽다. 몸안에는 갖가지 바이러스가 살고 있는데 면역력이 약해지면 병들기 쉽다.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보면서 나라가 병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신건강에 대한 것이다.

 

 

 

여기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주변에 미치광이가 있을 때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은 불안해할 것이다. 주변에 광신집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당장은 피해를 주고 있지 않지만 잠재적인 위험요인이 된다. 마치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이번 코로나사태로 드러난 신천지교단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된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우리나라는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다. 크게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렇게 세 개의 종교가 있지만 기독교와 천주교를 합한 숫자가 불교보다는 두 배 가량 많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다음으로 기독교세가 강한 나라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득세하다 보니 크고 작은 사회문제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종교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 대다수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인지 잊을만 하면 한차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사람 치고 교회에 한번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 다녔다. 하루가 멀다하고 예배와 찬송이 끊이지 않았다. 미션스쿨 3년 다니면서 기독교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피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에 그다지 의지하지 않는 것 같다. 옛날에는 종교가 사회를 이끌어 갔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사회의 부담이 되고 있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게 되는 역전적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 종교로 인하여 해악이 발생된다면 종교는 이제 사회적 흉기나 다름없다. 신천지가 이를 말해준다.

 

 

 

기독교에서는 신천지를 이단이라고 한다. 인터넷 사전에 따르면, 이단이라는 말은 정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의나 교파를 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통은 주류이고 이단은 비주류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단의 세력이 커져서 주류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단이 정통이 될 것이다. 이런 예를 한국의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다. 어쩌면 기독교는 정통세력과 이단세력의 투쟁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이단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 그것은 종말론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종말론이 있었다. 이번 신천지교단도 종말론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세계의 대부분의 종교가 종말론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강조되어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일생도 태어남부터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의 시작을 창조주로부터 보고 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도 창조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신이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바이블을 보면 종말론도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말론은 조직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조직신학은 원죄론, 대속론, 구원론, 종말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직신학의 종착지는 종말론이다. 아니 기독교 신앙의 종착지는 종말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종말론으로 인하여 수많은 교파가 생겨났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광신집단의 상당수는 종말론에 따른 것이다.

 

 

 

불교에서 보는 하느님(Brahma)

 

 

 

불교에도 종말론이 있다.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에서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괴멸하는 시기가 있다.”(D27.5)서 알 수 있다.

 

 

 

종말이 있다는 것은 생겨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우주가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생성하는 시기가 있다.”(D27.5)라고 했다.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우주가 괴멸되고 생성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기독교와는 달리 창조주가 등장하지 않는다. 업과 윤회로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생겨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경에 따르면 하나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세상이 생성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서 사멸하여 이곳에 온다.”(D27.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어떤 존재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남을 말한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눈을 떠 보니 어떤 세상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경에서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서 왔다고 한다. 극광천을 말한다. 색계 2선천이다. 색계 2선천에서 색계초선천으로 떨어진 것이다.

 

 

 

색계초선천에 대범천(mahabrhma)이 있다. 수명이 1겁이다. 그런데 이곳에 가장 처음 온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복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수명이 8겁인 극광천에서 수명이 1겁인 대범천에 태어났을 때 혼자였다. 태어나보니 자신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색계초선천이 열리는 것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성겁기로 보고 있다.

 

 

 

기독교에 창세기가 있다면 불교에는 성겁기가 있다. 1겁을 주기로 하여 성주괴공하는데 성겁기는 4분의 1에 해당된다. 그래서 우주는 성주괴공한다고 말한다.

 

 

 

성겁기가 되었을 때 한존재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 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뭇삶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D1.39)라고 했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 梵天)를 번역한 것이다.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에서 믿는 창조신을 말한다. 오늘날 유실교의 창조주와 매우 비슷한 개념이다.

 

 

 

그는 어떻게 창조주가 되었을까?

 

 

 

하느님(Brahma)은 윤회하는 존재이다. 그는 과거 인간으로 있을 때 선정수행을 하여 색계천상에 태어났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17개의 색계천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색계이선천에 해당되고 수명이 8겁인 극광천에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윤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아래 세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마침 우주가 성겁기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아래 세상에서 눈을 떠 보니 수명이 1겁에 해당되는 대범천에 태어난 것이다.

 

 

 

그가 대범천에 태어나 보니 자신 혼자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심심했을 것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더욱더 적적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경을 보면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오 다른 뭇삶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불만을 갖고 동요를 일으킨다.”(D1.39)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하느님이 동요한 것이다. 홀로만 오래 살다보니 무료해진 것이다.

 

 

 

마침내 한존재가 나타났다. 색계에서는 태어나는 것을 화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도 역시 위의 천상에서 복과 수명이 다하여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계속해서 뭇삶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최초로 태어난 자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하느님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39)

 

 

 

 

 

그는 창조주가 되었다. 그는 수명이 1겁인 대범천에서 가장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창조주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런 착각은 나중에 태어난 자들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다. 나중에 태어난 자들은 먼저 태어난 자에 대하여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39)”라고 한 것이다.

 

 

 

어느 곳이든지 먼저 온 사람이 서열이 높다. 학교에서는 학번을 따지고, 군대에서는 군번으로 서열을 매긴다. 사회에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 형이 되고 언니가 된다. 세상이 생겨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윤회하는 한존재가 복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세상에 태어났는데 태어나 보니 혼자였다. 나중에 뒤이어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서 자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심심하던 차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른 존재들이 차례로 태어난 것이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태어나 보니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먼저 온 사람이자신이 이 세상과 모든 존재들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M49)라고 칭송한 것이다.

 

 

 

영원주의가 왜 사견인가

 

 

 

초기경전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요즘과 같은 상황을 묘사해 놓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유일신교에서 나타난다. 오늘날 유일신교는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의 브라만교와 매우 유사하다.

 

 

 

브라만교에서는 브라흐마(梵天: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고 있다. 이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대펴적으로 디가니까야 하느님의 그물의 경’(D1)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이다. 맛지마니까에서는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에서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일곱개의 태양의 경’(A7.66) 등 수없이 많다. 부처님이 이렇게 니까야 도처에서 하느님에 대하여 말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영원주의가 사견임을 말한다.

 

 

 

크게 두 가지 극단적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영원주의이고 또 하나는 허무주의이다. 이 양극단은 절대유와 절대무에 대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유와 절대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기의 조건소멸을 관찰하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영원주의는 거짓이 된다. 또한 연기의 조건생성을 관찰하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 역시 거짓이 된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5)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짜야나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5)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십이연기를 말한다.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이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를 알면 삿된 견해에 빠지지 않는다.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와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디가니까야 하느님의 그물의 경에서는 모두 62가지 사견을 소개하고 있다. 연기법적으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머리속에만 있는 개인적 견해(私見)’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삿된 견해(邪見)’가 될 것이다.

 

 

 

누군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영원주의는 사견이다. 더구나 극히 소수만이 구원 받는다고 말하는 종말론은 사회의 질병과도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사견은 연기법적으로 관찰하면 드러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오온에서 일어나는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했을 때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명상을 하면 사견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어떤 뭇삶은 그 무리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오는 경우가 있다. 이 세상에 와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바로 전생의 삶의 형태를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를 창조한 이 존귀한 하느님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영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에 온 것이다.’라고 말한다.”(D1.39)

 

 

 

 

 

 

여기 어떤 수행자가 있는데 그는 삼매에 들어 전생을 보았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어떤 존재가 있었는데 그 존재에 대한 전생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에 대하여 창조주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당시 브라만교 사제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오늘날 유일신교 사제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하여 부분적 영원주의-비부분적 영원주의(ekaccasassatika-ekaccasaassatika)’라고 한다.

 

 

 

부분적 영원주의-비부분적 영원주의는 중생에 대한 일부영속-일부비영속론자들과 상카라에 대한 일부영속-일부비영속론자들을 말한다. 이 말은 경에서 자아에 세계가 부분적으로는 영원하고 부분적으로는 영원하지 않다.”(D1.39)라고 표현 되어 있다. 창조주는 영원한 것이고 피조물은 영원하지 않음을 말한다.

 

부분적 영원주의-비부분적 영원주의는 특정한 세상에서 이곳에 먼저 온 자들이 그 세상에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신이 자기를 창조한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견해를 말한다. 이런 견해는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른바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절대자설과 창조설에 대한 설명이다. 이렇게 영속개념의 창조주와 비영속개념의 피조물이 있을 때, 피조물은 전지전능한 창조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분적 영원주의-비부분적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창조주는 영원하고 피조물은 영원하지 않음을 말한다. 광신집단은 이 틈을 노린다. 종말론 등으로 피조물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것은 휴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교단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갈망을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창조주라 여기는 자도 알고 보면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하느님 바까의 경’(S6.4)에서 드러난다.

 

 

 

 

경에 따르면 하느님 바까는 망상가형 하느님이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전생에 바로 위 8겁의 극광천에서 복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 1겁의 대범천에 태어났다. 불과 1겁에 지나지 않지만 오래 살다보니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하느님도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려 주고자 했다. 그래서 바까 하느님의 전생을 알려 주었다.

 

 

 

바까 하느님은 언젠가 인간으로 살 때 공덕을 지어서 그 과보로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성겁기가 되었을 때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더구나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것보다 높은 다른 벗어남은 없습니다.(S6.4)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런 영원주의 태도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느님 바까가 두려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오래오래 영원히 사는 것으로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창조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때 충격 받은 것이다.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윤회하는 존재임을 알려 주었다. 이는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S6.4)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이 무명에 빠졌다는 하느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무명에 빠진 것과 같다. 니까야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무명의 존재이고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눈먼 자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온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괴질로 인하여 전쟁아닌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괴질을 유포한 집단이 영원주의 계열의 광신교단이라는 것이다.

 

 

 

광신은 무지에서 기인한다. 사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광신집단의 무지는 영원주의에서 기인한다. 이렇게 본다면 광신집단은 무지에 무지가 중첩된 것이다. 무지에 무지가 중첩되면 중중무지가 된다. 이를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지한 자들은 자신들이 무지한 줄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이 잘못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런 종교는 사견이기 쉽다. 진리의 한쪽면만을 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 보인다.

 

 

 

눈이 있는 자들은 전체적으로 본다. 마치 눈 뜬 사람이 코끼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눈이 먼 자들은 코끼리를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이 만진 것만이 코끼리라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눈먼 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광신자들은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눈먼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눈먼 사람의 뒤를 따라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눈먼 자의 뒤를 따라 가면 어떻게 될까? 청정도론에서는 그는 무명에 의해 눈이 멀면 이처럼 망상하면서 예를 들어 맹인이 땅위를 가면서 길이건 길이 아니건 고지대이건 저지대이건 평탄하건 울퉁불퉁하건 걸어가듯, 이와 같이 공덕행작도 악덕행작도 부동행작도 도모한다.”(Vism.17.118)라고 했다.

 

 

 

교회첨탑은 자꾸 높아지고 광신자들은 자꾸 생겨나고

 

 

 

대한민국이 광신집단으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광신집단은 괴질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감염자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방역수준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는 진단검사 횟수가 말해준다.

 

 

 

감염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질병을 퇴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조만간 감염자 숫자만큼이나 큰 폭으로 줄어 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더 이상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 특히 영원주의적 종교가 그렇다. 이는 잘못된 견해에 따른 것이다. 창조주는 영원한 것이고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어서 영원을 바라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이런 견해는 사견이 된다. 연기법적으로 관찰하면 영원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교회첨탑은 자꾸 높아지고 광신자들은 자꾸 생겨 나고 있다.

 

 

 

 

 

태어나면서 맹인인 자는

 

남이 인도하지 않으면,

 

어떤 때는 길로 가고

 

어떤 때는 길 아닌 곳으로 간다.

 

 

윤회속에서 유전하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자가 없는 것처럼

 

어떤 때는 공덕을 짓고

 

어떤 때는 악덕을 짓는다.

 

 

 

그가 가르침을 알고

 

진리를 관찰하면,

 

그때는 무명이 그친 까닭에

 

적정에 들어 살게 되리라.”(Vism.17.119)

 

 

 

 

 

2020-02-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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