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나?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1. 10:07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나?

 

 

 

 

 

나라가 앓고 있다. 매일 발표되는 확진자는 갈수록 늘어난다. 바이러스와 전쟁이다. 대체 이 전쟁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시림들은 행동수칙에 따라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 모든 모임은 취소되었다. 학교, 학원, 도서관 등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은 모두 문을 닫았다. 거리에는 마스크 착용자가 절반가량 되는 것 같다. 전에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귀가하면 손을 씻으라고 한다. 목이 건조하지 않게 물을 마시라고 한다. 뜨거운 물이 좋을 것이다. 이럴 때 차()만 한 것이 없다. 뜨거운 차를 마시면 속을 씻어내는 것 같다. 사람들은 바이러스와 총성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가격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이 어서 끝나기 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바이러스는 인정사정 봐 주지 않는 것 같다. 바이러스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고 끊임없이 폭발적인 자가증식을 한다. 어쩌면 물질문명에 대한 경종인지 모른다.

 

 

 

호모사피엔스는 짧은 기간동안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불과 백년 사이에 지수함수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동시에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마치 천적이 없어서 개체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과 같다.

 

 

 

요즘 자연다큐를 즐겨본다. 툰드라 지역에는 순록이 산다. 순록의 천적은 늑대이다. 늑대가 해롭다고 하여 마구 잡으면 어떻게 될까? 순록의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늘어난 만큼 먹어야 한다.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다보니 자연이 황폐화 된다.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다.

 

 

 

인간의 천적은 무엇일까? 옛날에는 호랑이와 같은 짐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바이러스인 것 같다. 인간을 숙주로 하는 변종이 출현할 때마다 몰살당하듯 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오만한 인류문명에 대한 경고 같다. 오로지 성장일변도의 사고방식에 제동을 거는 것 같다.

 

 

 

개체수가 급격하게 불어나면 생태계가 파괴된다. 천적이 없는 인간은 무한성장을 위하여 질주해 왔다. 자원이 고갈되든 말든 마구 써 버리고, 환경이 파괴되든 말든 마구 개발해 왔다. 그 결과 기후변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추세로 10년만 더 가면 온도가 상승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지구라는 생태계를 파괴해 온 것이다. 이럴 때 괴질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괴질로 인하여 숨 죽이며 살고 있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다.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락가에 가지 않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 보아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러스로 인하여 광화문 집회도 취소되었다. 법회와 예배모임도 취소되었다. 종교도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력화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바이러스를 퇴치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을 믿는 종교에서 바이러스 온상이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더 추가하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장로가 보시자에게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이라고 축원해 준다. 이 말은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라는 축원문이다. 법구경에서 유래한 말이다.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

 

 

 

 

 

세상에 이만한 축원이 없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이익과 명예, 권력을 바라는 기도를 한다. 또 이른바 사대축원이라 하여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바라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수, 용모, 행복, 건강 이렇게 네 가지 축원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장로가 장수축원을 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면 그뿐일까?

 

 

 

장로가 장수축원을 해 주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공덕 지으며 살라는 것이다. 어떤 공덕인가? 세 가지 공덕이 있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 정신적 향상을 위한 삶이다. 이 셋 중에서 수행공덕이 가장 수승하다. 여기서 수행공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말한다.

 

 

 

장수축원은 단지 오욕락을 즐기며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오래 살다 보면 그만큼 공덕지을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장수축원을 해 주는 것이다. 공덕을 지으면 이 세상의 행복뿐만 아니라 저 세상의 행복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삶을 바꾸어 놓고 있다.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두려워 사람접촉을 피하고 손을 자주 씻는다. 모임을 기피하다보니 종교행사도 자제하게 되었다. 종교가 바이러스 앞에서 무력화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미사가 중단된 일은 없었다고 한다. 대형교회 예배가 중단되는 일도 없었다. 대체 불보살은 어디에 있고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남의 안전을 고려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알 수 없다. 그가 착한 사람인지 불량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을 남에게 맡길 수 없다. 설령 그 사람이 성직자라고 해도 믿으면 안된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자신(Atta)과 가르침(Dhamma)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섬으로 하는 것이다. 격랑이 이는 바다에서는 언제 난파될지 모른다. 바다 속에는 상어가 출몰하고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섬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마치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추게 하듯이, 밖으로만 치닫는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 멈추고 가만 있어야 한다. 그러면 움직임이 보인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방석을 깔고 평좌한 다음 눈을 감으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수행을 하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자신에게 의지하여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수행공덕이다.

 

 

 

나라가 앓고 있다. 사람들도 앓고 있다. 거리는 썰렁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무리 바이러스가 무서워도 식당에는 가야하고 시장에도 가야한다.

 

 

 

안양중앙시장에 가 보았다. 노점상은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많이 줄었어요.”라고 말한다.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사람들은 타격이 크다. 때 되면 돈이 나오는 정규직이나 연금생활자와는 달리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들은 불안하다. 그런데 이번 대란이 이번 한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이는 바이러스 명칭으로 알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말은 2019년에 발생 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내년에 변종이 생겨 유행한다면 코로나21’이 될 것이다. 이렇게 바이러스명에 연도를 붙이는 것은 바이러스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말한다.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더 이상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자신과 담마에 의지해야 한다. 종국적으로는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멈추어야 한다. 멈추어서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의지처를 찾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진정코 자기자신이야말로 자기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2020-03-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