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加虐)을 즐기는 사람들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이슈를 집어 삼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전시상태나 다름없다. 경계에서 심각으로 격상된 이후 사람들은 내편과 네편으로 나누어 싸우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차별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금기시되는 정치이야기, 종교이야기, 지역이야기가 에스엔에스 상에서 걸림없이 노출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되면 문제가 없다.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 설령 그것이 인간으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 할지라도 책임을 묻는다. 요즘 코로나 사태가 그렇다.
코로나는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질병이다. 교통이 발달한 글로벌시대에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경을 봉쇄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규모가 작은 몽골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사람을 차단하지 않았다고 하여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계속 말한다면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좋게 말하면 책임을 묻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분노를 즐기는 것이다.
요즘 TV를 보지 않는다. 인터넷 뉴스도 제목만 본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 전하는 소식을 듣는 정도이다. 분명한 사실은 정부나 국민이나 확산방지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부에 총질하는 듯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전시에 아군에 총질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네탓’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청원이 백만명이 넘었다. 반대청원도 백만명이 넘었다. 마치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세력 대결하는 것 같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 ‘혐오’하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국민들은 분노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분노한 것이다.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일각에서는 괴질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확산되었음에도 중국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막지 못한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마치 화풀이를 하는 것 같다. 마치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세월호 달리 최선을 다 하고 있음에도 보수신문이나 종편채널의 논조 대로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때리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초기경전에 이런 게송이 있다.
“분노를 끊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사람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S1.71)
게송을 보면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라고 했다. 이 말은 마두락가(madhuragga)라고 한다. 우리말로 ‘꿀 같은 분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 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난다.”(Srp.I.97)라고 설명해 놓았다.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을 말한다.
여기 잘못한 사람이 있다. 잘못했다고 화를 내면 더욱 위축될 것이다. 더구나 매질까지 하면 두려움과 공포에 질릴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화를 내고, 매질한다면 즐기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있다. 마치 사디스트(sadist)와 같은 가학(加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분노하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는 분노를 즐기는 사람이다. 욕하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역시 욕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된다. 매질하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는 가학을 즐기는 자와 같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정부와 대통령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학을 즐기는 사람들 같다.
분노하면 모든 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분노하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는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분노할 때 쾌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을 파멸하는 ‘독’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분노에 대하여 ‘꼭지의 꿀’과 ‘뿌리의 독’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분노의 속성 때문에 분노하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이처럼 분노에는 쾌감과 독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사고가 터졌을 때 잘잘못은 따져야 한다. 잘못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반대편이라고 하여, 기분 나쁘다고 하여 호불호와 쾌불쾌로 분노하고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면 분노를 즐기는 가학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종편채널과 보수신문, 그리고 일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사고가 터졌을 때 잘잘못은 따져야 하지만 내편과 네편을 갈라서 책임공방으로 지샌다면 현명하지 못하다. 사고가 일어난 것은 엄밀히 따지면 내탓도 아니고 네탓도 아니다. 단지 접촉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접촉이 일어난 이유는 가까운 원인도 먼 원인도 있다. 하필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들이 사고를 당한 것은 하필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린 것도 하필 그 시간에 거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고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고가 났으면 먼저 수습해야 한다.
지금 독화살을 맞았다면 먼저 독화살을 뽑고 보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코로나라는 독화살을 맞았다. 네탓을 하는 것보다 먼저 수습이 먼저이다. 동시에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잘못이 있다면 처벌받아야 한다.
사고가 난 것은 내탓도 아니고 네탓도 아니다. 단지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면 한손에는 시뻘건 숫불을 들고 또 한손에는 똥을 들고 던지려고 하는 것과 같다. 분노하는 사람에게는 분노하지 말라고 했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시뻘건 숫불을 든 손은 타들어 갈 것이고, 똥을 쥔 손에서는 구린내가 날 것이다.
분노하는 자는 마치 바람을 맞고 재를 던지는 것과 같다. 분노한다고 하여 일시적으로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마음의 뿌리에서는 독이 생겨나서 그 독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가 파괴를 일삼으면 쉽게 부수든 어렵게 부수든 중에 분노가 떠난 후에 연소된 것처럼 괴로워하네.”(A7.64)라고 했다.
누구나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분노를 즐겨서는 안된다. 분노를 즐기면 가학이 된다. 요즘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을 보면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분노를 즐기려 하는 것 같다. 마치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또 때려서 분노의 쾌감을 즐기는 가학을 보는 것 같다.
2020-03-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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