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두려움과 죄의식을 주는 정언명령(定言命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13. 10:04

 

 

 

두려움과 죄의식을 주는 정언명령(定言命令)

 

 

 

 

 

모임을 갖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일이주정도 지나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으나 또 일이주연장 되는 나날이다. 언제 이 병란은 끝날 것인가?

 

 

 

뉴스에서는 홍수난 것처럼 연일 재난방송을 하고 있다. 저녁 메인뉴스에서는 접촉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특히 교회 예배를 갖지 말기를 당부했다.

 

 

 

찬송과 예배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가급적 종교집회를 삼가라는 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대부분 일요예배를 강행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중형급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밀집된 곳에서 그것도 찬송가를 부르면 자연스럽게 입을 통하여 바이러스가 나갈 것이다. 이를 비말에 의한 전파라고 한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 공기중에 계속 바이러스가 퍼져 나갈 것이다. 교인들은 어쩌면 목숨걸고 예배에 참석하는지 모른다. 무엇이 그렇게 절박했을까? 목사가 나오라고 강요했을까? 관행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나가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시절 산동네달동네에 살았다. 산비탈에 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서 난민촌 같았다. 일요일만 되면 교회에서는 스피커를 크게 틀었다. 스피커에서는 산동네달동네가 떠나 갈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요즘 같으면 민원이 들어가 고발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어쩐 일인지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것 같았다. 교인들에게는 복음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아닌 사람들에게는 참기 힘든 소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날 이브 심야에 새벽송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날에 교회에 갔었다. 교회에 가면 빵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짜는 없었다. 처음 온 아이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찬송가 같지 않은 찬송가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가사이다. 지금도 잊지 않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예수 믿다 안믿으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라는 구절이다. 어린 마음에 몹시 두려웠다. 하나님을 믿다 안믿으면 정말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느니 안믿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녔다.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속된말로 뺑뺑이로 들어간 것이다. 미션스쿨은 교회의 축소판 같았다. 학교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안될정도로 하루걸러 예배와 찬송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교훈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적 인격이다. 마치 이 문에 들어온 자 모두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바이블과 찬송을 나누어 주었다. 하루걸러 예배가 있기 때문에 늘 가방에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예배시간에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을 뿐이었고 찬송시간에는 입만 벙긋벙긋할 뿐이었다.

 

 

 

교목은 예배시간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을 말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초등학교 시절 산동네달동네에서 부른 찬송가에 대한 기억이 크다고 본다. 하나님을 믿다 안믿으면 정말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떨어질 것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끝까지 부정했다.

 

 

 

미션스쿨 다닐 때 하나님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정안명령(定言命令)도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정언명령은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 정언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의 명령에 나약한 피조물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을 때 따라야 할 것이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내야 할 것이다. 안내면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어느 교회 목사는 하나님 것을 가져가는 도둑놈이라고 했다. 또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않았을 때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12년전의 일이다. 블로그에 쓴 글이 대문에 실렸다. 업무를 통해 알게 된 사회친구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는 벤처사장을 했는데 부도가 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자 했다. 이런 글을 올렸을 때 조회수가 10만 이상 됐고 댓글이 천개가량 달렸다.

 

 

 

댓글을 보니 교회와 관련된 글이 꽤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특히 벌 받을 것 같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유황불 이야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아마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가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늘 두려움과 죄책감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심하면 벌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다.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다. 이번 코로나사태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반드시 이단이라고 말해지는 곳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모든 종교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정언명령과 관계가 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다.

 

 

 

기독교에서 십계명(十誡命)이 있다. 십계가 아니라 십계명이다. 이는 정언명령이다.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명령이다. 무조건적으로 반드시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 그래서 하지말라.”라든가, 또는 해라.”라고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오계(五戒)와는 다른 것이다. 도둑질의 경우 도둑질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면 정언명령이다. 달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만일 작은 것이라도 훔쳤으면 벌받을 것 같은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와 다르다.

 

 

 

불교에서는 오계를 지킨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정언명령처럼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오계중에 불투도죄가 있다. 이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삼가다는 말이 중요하다. “도둑질 하지 말라.”라고 퇴로를 차단하는 정언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살다보면 도둑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경우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어기면 또다시 받아지니면 된다. 계는 근본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아다. 그래서 계행이 완성될 때까지 평생 받아지니는 것이다. 이를 학습계율(sikkhāpada)라고 한다. 계는 한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완성됨을 말한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법회할 때마다 오계를 받아지니도록 한다.

 

 

 

계를 어겼을 때는 다시 받아 지녀야 한다. 반드시 복귀해야 학습계율로서 효과가 있다. 이렇게 학습계율을 지키면 두려움이나 죄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스님들의 구족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언명령을 어기면 심적 부담을 가질 것이다. 심약한 사람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하지만 이를 어기고 일요일 기어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20-03-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