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죄의식을 극복하려면
교회가 징검다리? 이말은 저녁 메인뉴스에서 자막에 뜬 것이다. 구로콜센터 집단감염으로 인한 파장을 말한 것이다. 업무특성성 계속 말을 해야 하는 콜센터 직원이 밀집된 공간에서 집단감염된 것이다. 그 중의 일부가 일요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목사를 비롯한 신도들이 또 집단감염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가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중간매개체 내지는 징검다리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개학이 연기 되는 등 전에 없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일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다. 전쟁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병란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병란의 시대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가장 먼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이는 정부의 질병본부(질본)에서 강조한 것이다. 질본은마치 전시에 전투를 지휘하는 사령부와 같은 곳이다. 그런데 질본의 권고사항을 잘 따르지 않는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다름 아닌 교회이다.
집단감염이 되든 말든
교회에서는 매주 일요일 예배를 본다. 개학이 연기 되고 모임과 집회를 자제하는 사회분위기속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말하며 홀로 가는 것이다. 사무실 근처 중형급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의 경우 종단에서 모든 법회를 금지하고 심지어 해인사와 같은 대찰에서는 아예 산문을 폐쇄했다. 다른 종교단체에서도 질본의 권고를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집단감염이 되든 말든 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교회에서 코로나바이러스와 상관없이 예배를 강행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첫번째 이유는 순수한 신앙의 자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신앙의 자유는 헌법으로도 보장되기 때문에 누구도 억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일 것이다. 설령 전쟁이 났어도 예배는 볼 것이다.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해쳐 나갈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재정수입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교회도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집단과 다를 바 없다. 커다란 교회를 유지하려면 신도들이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종교집단이든지 와야 된다는 것이다. 모여야 헌금도 더 많이 걷힐 것이다. 그래서일까 끊임없이 모임을 갖는다. 모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걷힐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집단감염이 우려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헌금때문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세번째 이유는 두려움과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이다. 더 심하면 벌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다. 이런 이유로 요즘과 같은 병란의 시대에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사람들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배를 강행하는 이유라고 본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교회에 한번 나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동네에는 수퍼마켓보다 더 많이 있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찬송을 하는 등 교회는 어쩌면 매우 친숙한 곳인지 모른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갖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교역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런 하나님은 전지전능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이다. 믿다가 믿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의 행위를 일거수일투족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부 질본의 권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예배를 강행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에스엔에스상에 “목사들아, 제발 말 좀 들어라!”라며 호소하기도 한다.
두려움과 죄의식을 극복한 사례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강행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의 글을 썼다. 어렸을 적 교회다닌 이야기를 곁들여 썼는데 두려움과 죄의식에 대하여 공감한다는 댓글을 여러 개 받았다. 그렇다면 두려움과 죄의식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블로그에 올려 주신 어느 법우님의 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다음)
저도 고교때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신의 존재를 믿었는데, 신이 나를 항상 지켜보고 보호해준다는 안도감, 동시에 하나 하나의 행동에 대해 상과 벌을 준다는 두려움, 전지전능하여 믿을만한 위대한 존재라는 의지처라는 복합적인 마음이있는데, 재수하면서 참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호와에게서 벗어났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알고 나를 극복하고 싶어서 참선을 시작하면서도 처음에는 여호와에게 ‘하나님, 제가 여기 절에 온 것은 철학과를 갈 것이라서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온 것뿐이니 오해마십시요. 믿습니다. 아멘’하고 기도하고 참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당당하게 ‘여호와, 너는 꺼져~’라고 하면서 돌아선 자신감은 결국 체험이었습니다. 아래는 그때의 체험입니다.
“아직 화두는 모르고 있었고 나를 둘러싼 문제들은 깊이 분석하기를 통해서 다 해결되어 더 이상 생각할 일이 없어서 좌선시간에 눈 앞 약 2미터 앞에 임의의 점을 찍어놓고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그 점에 집중, 집중, 집중하다보니 내 몸이 쑥쑥쑥 커지면서 어느 순간 우주도 내몸도 하늘도 앉아있는 호국참회원 법당 지붕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진 듯한 경계가 왔다. 이러다가 내가 죽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하고 겁이 나서 어떻게 내 몸으로 돌아가나 걱정을 하는데 다시 도선사 호국참회원 지붕밑에 좌복을 깔고 앉아있는 나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점에 집중을 했더니 또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내 마음속에 무한한 뭔가가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했고 불교가 무속신앙 비슷한 저급한 종교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구나하는 느낌도 들었다.
5월 초순경에는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는데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이양하 선생님의 ‘신록예찬’에서 보았던 무념무상(無念無想),무장무애(無障無礙 )하여 몸과 마음이 쾌활 쾌활한 경지가 문득 느껴졌다. 즉 조선시대처럼 사형집행하는 망나니가 칼춤을 추다가 칼로 내 목을 친다 하더라도 떨어진 내 목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듯한, 내 몸에 대한 애착이 사라진 상태를 느꼈다.”
위의 두가지 체험(몸이 사라진 듯한 느낌, 몸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하면서 이 세상은 여호와가 만들고 주재하는 곳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더 넓은, 더 자연스럽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여호와, 너는 꺼져!’라고 하니 큰 짐을 벗은 듯한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운 마음의 평안을 느꼈고 그리고 참선, 내가 나를 깨닫고 나를 극복하고 그리고 남도 편하게 하는 길을 가기 위해 화두의심을 해왔습니다.
(B법우님)
법우님은 수행으로 신을 극복했다고 한다. 마음속에 늘 두려움으로 남아 있고 죄의식을 주는 신은 없다는 것이다. 참선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명상중에 몸이 사라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몸에 대한 애착이 사라졌을 때 동시에 신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말한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사람들은 왜 신을 믿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무신론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많이 배운 사람들이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은 알 수 없고 오로지 신만 알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지만 드러나기 때문에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살다 보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조금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조금만 더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본래“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이라고 한다. 조금 안다고 아는 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을 믿는 사람들은 겸허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의 원리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신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불교가 그렇다.
하느님(Brahma)의 독백
불교는 신을 극복한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불교는 브라만교라는 신을 믿는 종교를 극복하고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브라만교는 오늘날 유일신교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브라흐마(Brahma)에 대한 묘사를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디가니까야 브르흐마잘라경에 소개되어 있는 하느님(브르흐마)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39)
하느님의 독백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 그대로 ‘범천(梵天)’이라고 번역했다. 하느님의 독백을 보면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라고 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만교는 오늘날 유일신교처럼 하느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불교는 부처님당시 주류종교이자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되었다. 어떻게 비판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연기송의 후송으로 영원주의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는 짤막한 문구로 알 수 있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과 저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것과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빠알리어구문을 보면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것(此) 과 저것(彼) 에 해당되는 말은 각각 ‘imasmiṃ’와 ‘idaṃ’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한자어처럼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영어식 표현으로 ‘this’ ‘this’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가 아니라,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게 되며”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라고 했을 때, 여기에서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존적 연기에 해당된다. 또 연기송에서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했을 때, 이것과 저것은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한다. 이렇게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십이연기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주의는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짤막한 연기송 후송으로 논파된 것이다.
누군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그 무엇이 있다고 하지만 모든 것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무상하게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고 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하면 더 이상 삿된 견해가 발을 붙일 수 없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으로 알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원인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조건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우리 몸과 마음, 즉 오온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라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한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다.
“업으로부터 이숙이 생겨나고
이숙은 업을 생성한다.
업으로부터 재생이 있고,
이와 같이 세상이 일어난다.”(Vism.19.18)
청정도론에 따르면 세상이 발생되는 원리에 대하여 업이라고 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데 이를 세상이 일어나는 원리로 설명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청정도론은 사부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그래서 수행의 관점에서 서술해 놓았다. 그 정점이 나마루빠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나마루빠, 즉 정신-물질에 대하여 알면 모든 의심은 극복된다고 했다. 수행을 하면 오로지 정신-물질의 과정만 있게 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들의 업과 이숙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있는 그대로의 여실한 실재에 따라 명료하게 드러난다.”(Vism.19.17)라고 했다.
업이 자신이 주인이고 상속자
정신-물질의 과정이 업과 업의 과보의 회전에 대한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누구인가?’ 등의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세상을 창조했다는 자기원인을 갖는 창조주도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원인 이외에 행위자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원인이 있을 때 ‘행위자’라고 이숙의 생성이 있을 때 ‘향수자’라고 현자들은 인습적으로 말하는 것뿐이라고 올바른 지혜로 잘 보는 것이다.”(Vism.19.1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업자성정견에 따라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업이 자신이 주인이고 상속자라고 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연기법과 업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의지처를 발견할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철에 더 이상 실체도 없는 허상에 의지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마음의 부담을 주는 허상은 부처님의 연기법과 수행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유일신은 더 이상 두려움과 죄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
이와 같이 행위와 이숙이
원인과 함께 일어나므로
종자와 나무 등에서처럼
전제는 알려지지 않는다.
미래에서의 윤회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이교도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뭇삶이라는 지각을 붙잡고,
서로 어긋나는
예순두 가지 견해를 고집한다.
그리하여 견해에 묶이고
갈애의 흐름에 휩쓸려가니,
갈애의 흐름에 휩쓸리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부처님의 제자인 수행승은
이와 같이 그것을 알아서
심오하고 미묘하고 텅 빈 것(空) 곧,
연기의 원리를 꿰뚫어 본다.
행위는 이숙 가운데 없고,
이숙은 행위 가운데 없다.
상호 양자는 텅 빈 것이지만,
행위 없이는 과보가 없다.
마치 태양에도 불이 없고,
보주에도 쇠똥에도 없고
그들 이외에 불도 없지만,
연료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위 가운데
이숙을 얻을 수 없고,
행위 이외에서도 얻을 수 없으니,
행위는 그 가운데 있지 않다.
그 행위는 결과가 텅 비었고
결과는 행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를 취해서
그것에서 과보가 생겨난다.
그 가운데 윤회의 행위자인
신들이나 하느님은 없다.
원인이자 연료이자 조건인
순수한 사실들만이 일어난다.”(Vism.19.20)
2020-03-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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