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성직자를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24. 18:45

 

 

 

성직자를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구와 청도에서 발생한 확진환자가 처음에는 20여명에서 시작했으나 매일 배로 늘어나고 있다. 반 이상이 대구지역의 신천지와 관련이 있다.

 

 

 

재난방송을 보면 앞으로 일이주가 고비라고 한다.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는 환자수가 꺽이는 시점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경계에서 심각으로 격상하고 해당지역을 봉쇄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리적 봉쇄가 아니라 출입을 철저히 하는 것을 말한다.

 

 

 

카톡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는 갖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확인된 것도 있지만 미확인된 것도 많다. 어느 경우이든지 충격적인 내용이다. 특히 신천지관련 이야기가 그렇다. 그래서일까 재난방송에서는 지역이나 단체의 혐오를 유발하는 이야기를 자제해 달라고 했다. 가능하면 모임을 갖지 말라고 했다. 종교관련 모임도 그렇다. 심지어 인터넷을 이용한 종교행사를 하라고도 권유했다.

 

 

 

거리에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재난방송을 들으면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사람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가질수록 분노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 같다. 신천지라는 종교단체가 타겟이 되고 있다. 떠도는 이야기와 뉴스를 보면 확실히 문제가 있는 종교단체임에 틀림없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아마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실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점심약속도 약속이라고 했다. 지나가는 말로 했을지라도 약속은 약속인 것이다.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아도 실망하기 쉽다. 사람이 신용을 잃어버렸을 때 실망하기 쉽다. 한마디로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 실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어떨까?

 

 

 

스님이나 목사, 신부와 같은 종교인을 성직자라고 한다. 종교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 성스런 직업임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스님은 성직자라기 보다는 수행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사제라 볼 수 있는 브라흐마나(brāhmaa)와 구별된다. 브라만계급의 사제를 제외한 수행자를 사마나(samaa)라고 한다. 특히 불교수행자를 빅쿠(bhikkhu)라고 한다.

 

 

 

빅쿠는 걸식자라는 뜻이다. 걸식한다고 모두 수행자라고 볼 수 있을까? 걸사와 걸식자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라고 했다.

 

 

 

똑같이 걸식을 해도 빅쿠는 청정한 삶을 지향한다. 그래서 불교수행자를 걸사(乞士)라고 하는데 빠알리어로는 빅쿠(bhikkhu)라고 한다. 같은 걸식자라도 악취나는 가르침을 따르면 걸인(乞人)이라고 보아야 한다. 걸인을 빠알리어로는 빅카까(bhikkhaka)라고 한다. 이처럼 걸사와 걸인은 다른 것이다.

 

 

 

걸사를 뜻하는 수행자가 걸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의 직업으로 살아 간다면 성직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스러운 직업을 가진 성직자는 믿을 만할까?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스님을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 왜 그런가? 계행과 관련이 있다.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하고 삼장에 통달했어도 계행이 되어 있지 않으면 신도들은 떠나고 말 것이다. 더구나 스님이 환속했다면 종교를 바꾸어 버릴지 모른다.

 

 

 

최근 유튜브에서 어느 스님의 충격적 모습을 보았다. 불과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회색승복에 가사를 수한 여법한 모습을 보았는데 속복차림에 머리까지 기른 모습이었다. 환속한 것이다. 더구나 십자가 목거리까지 차고 있었다. 스님은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참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신도들이 보았을 때 신심이 떨어질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계를 파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한스님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이 스님 역시 불교TV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많이 보았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스님의 모습에 충격받았다. 역시 속복에다 머리를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여전히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칠판에 써 가며 무언가 열심히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승복 입었을 때 보다 신뢰가 가지 않는다. 승복 입고 강의할 때 근본불교 가르침과 거리가 있는 말을 하는가 하면 자신이 해석한 불교를 이야기해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는데 속복차림에 머리 기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보자 더욱더 부정적 생각이 들어갔다.

 

 

 

환속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계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환속하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더구나 존경하는 스님이 계를 지키지 않는다거나 환속하면 신도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래서 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스님에게 의지하면 불교가 약화되는 요인도 있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 (과환경(過患經), 잡아함경 제30권 제837)

 

 

 

 

 

정법이 변질되고 오염되면 쇠퇴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출가자들이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껍데기만 남게 된다. 스님들이 계행을 지키지 않았을 때 신도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신도들은 떠나게 될 것이고 교세는 약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믿어야 할까?

 

 

 

불교인들은 상가(sagha)에 의지해야 한다. 신도들 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상가를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삼귀의문을 보면 붓다, 담마, 상가에 의지하라고 했다. 그 어디에도 스님에게 의지 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왜 상가에 의지하라고 했을까? 그것은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제아무리 훌륭한 스님이라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스님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으면 실망하기 쉽다. 초기경전에서도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없다. 아라한이 속한 승가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이다. 승가공동체를 승보로 해야 부처님 가르침이 변질과 왜곡없이 오래 전승된다. 삼귀의문에서 승보는 거룩한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인 상가(sagha)인 것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또 스님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어떨까? 성직자 역시 실망하기 쉽다. 설령 제아무리 훌륭한 성직자라고 해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성직자를 믿기보다는 성직자가 속한 교단을 의지처로 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공동체에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불교에서 승가공동체와 같은 것이다.

 

 

 

성직자가 교리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여 신도들을 조직화하면 이단이 되기 쉽다. 본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더구나 교주가 되어 신격화 되었을때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다.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신천지일 것이다.

 

 

 

신천지는 기성교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단이다. 불교에도 이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단이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경전에서는 사견이라는 말을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사견을 한자어로 개인적 견해의 의미로 사견(私見)이라고도 하고, 삿됨을 뜻하는 사견(邪見)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견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딧티(diṭṭhi)라고 한다. 육사외도의 견해를 지칭할 때 주로 쓰인다.

 

 

 

초기경전을 보면 62가지 사견과 20가지 유신견이 있다. 모두 합하여 82가지 사견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62가지 견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 상세하게 소개 되어 있다.  유신견은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M109)로 시작되는데, 오온에 대하여 각각 네 가지 자아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연기법에 따르면 62가지 사견과 20가지 유신견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62견에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견해가 총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들 수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는 영원주의에 해당된다.

 

 

 

영원주의는 연기의 소멸을 관찰하면 있을 수 없다. 어떤 변치 않은 영혼이 있어서 자아를 영원한 것으로 보았을 때 연기의 조건소멸을 관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적인 견해도 될 수 있고 삿된 견해도 될 수 있다. 영혼을 인정하는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사견이 있다면 정견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부처님 가르침이 정견이다. 왜 그런가?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 여실견(如實見)이라고 한다. 이 말은 빠알리어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adassana: 如實知見)’에서 유래한 것이다.

 

 

 

부처님은 오온의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았다. 그래서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 두가지 형태로 검증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했다. 이와 같이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사견이 생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사견에 빠지는 것은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견이라면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 된다.

 

 

 

사견에 빠지면 마치 눈먼 장님과도 같다. 요즘 사견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의 뒤를 따르는 선천적인 장님들의 행렬을 보는 것 같다. 성직자를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2020-02-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