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자유자재할 수 있을까?
포천에서 철원방향으로 달렸다. 가다보면 38휴게소가 있다. 38휴게소라는 이름은 여러 곳 있을 것이다. 38선이 지나가는 큰 길이라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신철원 방향 43번 국도에도 38휴게소가 있다. 처가와 인연을 맺고 나서부터 종종 지나치는 곳이다.
처가 본고향은 포천이다. 철원과 가까운 곳이다. 작은 다리 하나를 경계로 하여 경기도와 강원도가 갈린다. 다리 아래 마을 경기도에는 처가의 본 고향이고, 다리 윗마을에는 처의 작은 아버지가 사는 곳이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43번 국도를 따라 차를 몬 것이다.
38휴게소에서 처가 형제들과 합류했다. 함께 모여서 가기로 한 것이다. 이곳을 지날 때면 늘 군사시설을 지나야 했다.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장벽을 통과해야 했고 검문소를 지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에 따라 주변환경도 변한 것이다. 그럼에도 38휴게소를 지나면 왠일인지 낯선 곳에 온 것 같다. 38이북지방은 해방후 5년 동안은 북한이 통치한 땅이다. 지금은 수복되어 남한 땅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이북이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38휴게소를 지나 북동방향으로 달렸다. 도로 저 멀리 아스라히 하늘이 보인다. 저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달리면 원산이 나올 것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이다. 남쪽으로 달릴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더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이 있어서일까 머나먼 타국의 땅을 달리는 것 같다. 지형도 남쪽과는 차이가 난다. 대체로 거친 지형이다. 개발에서 소외되어서인지 낙후된 분위기도 있다. 38휴게소만 넘어서면 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일까?
신철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신철원을 옛날에는 갈말이라고 했다. 도의 경계에서 불과 12키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분지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분위기는 서부영화에서 마을을 보는 것 같다. 황량한 분위기가 그렇다. 공업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너른 대지에 듬성듬성 건물이 있는데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 윤택해 보이는 남쪽 도시들과는 대조적이다. 분지 저 너머 산록에는 눈이 쌓여 있다. 마치 알프스산맥을 보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이 철원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음지에는 잔설이 남아 있다.
작은 아버지 자손들은 많다. 처가쪽과 인연을 맺으면서 주욱 지켜보아 왔다. 강산이 세 번 바뀌고 이년이 더 지난 세월이다. 그들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낸 적도 많다. 모두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성장 과정을 알고 있다. 그들의 지금 모습을 보면 세월이 흘렀음을 알게 해준다. 이를 세월무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작은 아버지를 40여일 전에 보았다. 장인상을 치룰 때 기족납골묘역에서 본 것이다. 그때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마치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지팡이 의지하여 앉아 있는 모습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작은 아버지는 “내가 형님보다 먼저 갈 줄 알았는데 형님이 먼저 가서 다행이야.”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듯이 말했다.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난 어제 돌아가신 것이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사람 목숨을 사람이 통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조사나 선사의 이야기를 보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죽음에 대한 갖가지 기연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성본스님에 따르면
죽는 날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곡기를 끊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를 현대판 안락사라고 언젠가 불교방송에서 들은 바 있다.
상주에 따르면 작은 아버지는 곡기를 끊었다고 했다. 형님이 먼저 가는 것을 보고 따라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팔십대 후반이 되어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더 이상 살 의욕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한달가량 곡기를 끊고 지내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일종의 안락사라고 볼 수도 있다.
일상에서 삶과 죽음을 접한다. 평화의 시대 죽음은 어쩌면 축복과도 같다. 가장 비참한 죽음은 전쟁의 시기에 죽는 것이라 본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성장소설이 있다. 작가의 유년기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소설속에서 할아버지는 행복한 죽음을 맞는다. 자연사하여 꽃상여와 함께 장례를 성대히 치루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자식세대가 되면 상황이 다르다. 비참한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총살당하는 자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기에 죽음은 비참한 것이다. 그래도 평화의 시기에 죽음은 축복이다. 그것도 자연사하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그런데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곡기를 끊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문제 될수도 있지만 한계에 처했을 때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일종의 존엄사라고 볼 수 있다.
옛날 선사들도 곡기를 끊어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더 이상 살만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본다. 어쩌면 이런 것이 죽음을 자유자재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8선 이북 찬바람 부는 철원땅에서 인생무상을 보았다.
2020-02-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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