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상대방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7. 08:45

 

상대방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다. “, 추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대로 건너편 편의점에 가려다가 몇 번 그만 두었다. 짧은 거리이지만 강추위에서 건너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여름에 저 건너편에 가려 하지만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못 건너 갔다는 말이 있다. 겨울에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매년 혹한과 혹서를 겪는다. 겨울에는 강추위에 괴롭고 여름에는 무더위에 괴롭다. 그러나 극한과 극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자연다큐에서 본 시베리아는 영하 30도가 넘는다. 아열대 지방의 극한지방은 영상 40도가 넘는다. 극한과 극서가 아닌 혹한과 혹서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기면 호시절이 온다.

 

방안 공기가 차다. 밤에 잠을 자면 공기가 차가워서 코가 시릴 정도이다. 이럴 때 밖에서 사는 생명들을 생각해 본다. 그 많은 동물들은 이 추운 겨울날 어디서 보낼까? 겨울을 대비한 털이 있다고는 하지만 물이 꽁꽁 얼정도로 강추위에 어디서 잠을 자는 것일까?

 

사람들은 따뜻한 아파트에서 포근한 잠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보금자리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노숙자들이다. 마치 야생의 동물처럼 어디선가 잠을 잘 것이다. 도시의 빈공간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추위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포근한 잠자리가 미안할 정도이다.

 

입춘도 지났다. 아무리 추워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듯이, 막바지 추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세하강기에서 잠시 고점을 찍은 듯하다. 다시는 이런 강추위는 오지 않을 것이다. 호시절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견디는 것이다.

 

경제가 좋지 않다고 한다. 이런 말은 선거때만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경제가 좋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민들에게는 지난 수십년동안 한번도 경제가 좋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서민들에게는 항상 혹한과 혹서만 있고 호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추위가 지나면 춘삼월 호시절이 올 것이다. 그러나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호시절이 와도 혹한이나 혹서에 사는 것과 똑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다. 마치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처럼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밖에서 떨게 만드는 것은 폭력이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Dhp.130)

 



 

세상에 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도 힘이 없고, 늙은 자도 힘이 없고, 병든 자도 힘이 없고, 장애있는 자도 힘이 없다. 힘 없는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대부분 힘 있는 사람들은 힘 없는 사람들을 폭력으로 대한다. 반드시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폭력이다.

 

조폭영화를 보면 무지막지하게 패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어느 조폭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했기 때문에 맞아야 됨을 말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것이다.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때린다. 힘 없는 자는 맞을 수밖에 없다. 조폭은 인정사정 없이 두들겨 팬다. 맞고 있는 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있다. 폭력이라 하여 반드시 물리적 폭력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폭력도 있다. 세상일에 무관심한 것도 폭력이다. 세상에 자비심을 내지 않는 것도 폭력의 범주에 들어간다.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못 본체 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라고 했다.

 

어느 누구라도 몽둥이를 두려워한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이를 먹으면 늙음이 두렵고 병이 들면 죽음이 두렵다. 어느 누구나 몽둥이로 때리면 공포에 질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매맞은 자의 공포에 질린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보듯이, 노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나의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Dhp.130)라고 했다.

 

 

2020-02-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