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사느냐고 묻거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14. 13:18

 

왜 사느냐고 묻거든

 

 

고미숙선생 강연은 언제 들어도 유익하다. 최근 유튜브에서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라는 제목의 강연을 들었다. 제목에 끌려서 듣게 되었다. 유튜브를 보기 보다는 듣는다고 말한다. 마치 라디오 듣듯이 듣는 것이다. 한쪽 모니터에서는 아트웍작업을 하면서 다른 모니터에서는 듣는 것이다.

 

고미숙선생은 비주얼보다는 오디오가 더 낫다. 그다지 미인형은 아니다. 그렇다고 목소리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평범한 중년 여인의 모습에 목소리는 어눌하다. 그런데 듣고 있다 보면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백수예찬

 

고미숙선생은 스스로 고전평론가라고 했다. 평생 백수로 살다시피 했는데 책은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썼다고한다. 그런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고전평론가였다고 한다. 고전을 읽고서 평론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서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은 없다. 그래서일까 고미숙선생이 스스로 만든 고전평론가는 선생이 유일하다고 한다.

 

고미숙선생은 백수예찬론자이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취업이 되지 않아서 비정규직을 전전했고 결과적으로 백수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백수로 살다보니 장점도 많았다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어 20, 30, 평생 조직에 매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일 것이다. 백수로 살다보면 시간부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반백수로 살고 있다. 그렇게 산지 15년 되었다. 2005년에 정규직 직장을 그만 둔 이래 일인사업자로 살고 있다. 자영업자는 늘 불안정한 삶이다. 정규직은 때가 되면 월급이 나오기 때문에 계획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수입이 들쑥날쑥한 자영업자는 그때그때 일감으로 살아가야 한다.

 

일인사업자로 살다보니 일하는 날 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그래서 반백수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일인사업자로 살다보니 장점이 하나 있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꿈을 가지라고 하지만

 

삶을 사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고미숙선생이 강연에서 던진 빅퀘스천이다. 고미숙선생에 따르면 삶에 의미와 가치를 두지 말자고 했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보여 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삶의 원동력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목표가 되었을 때 자신을 옥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려 했을 때 이루어질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나 일류회사에 들어 가는 것도 해당되고, 돈을 모아서 너른 아파트를 사는 것이나 고급차를 사는 것도 해당된다. 또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도 해당된다. 이를 인생의 목표 내지는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목표와 목적은 엄밀히 말하면 다른 것이다. 일류대학, 일류회사, 높은 지위, 너른 아파트, 고급차는 목표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함께 묶어 쓰는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목표나 목적으로 삼았을 때 이루고 나면 기쁨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나중에 남는 것은 허()와 무()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돌스타가 정상에 오르고 난 다음에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여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유가 되는지 모른다.

 

젊은 사람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Boys be ambitious!”  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회자된다. 그런데 젊은이가 꿈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살 맛이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청소년 상당수가 꿈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들이 가졌던 꿈을 꿀 수 없다고 한다. 저성장의 시대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가지고자 하는 꿈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물질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돈으로 귀결된다. 과연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현대에서 돈은 곧 힘이다. 금력이 곧 권력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많이 가지고자 하는 꿈을 꾼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 많이 버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한다.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권력을 갖고자 한다. 고미숙선생은 권력에 대하여 손오공을 예로 들었다.

 

서유기는 동양의 고전에 해당된다. 서유기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등으로 만들어져서 현대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서유기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손오공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손오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손오공은 도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손오공은 물질문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오공이 원숭이 임에도 도를 닦아 마침내 경지에 올랐을 때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천상에 올라가서 옥황상제와 맞장을 뜨기도 했다. 나중에는 수명을 조작하여 신선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자 했다.

 

손오공은 도술을 닦아 모든 것을 이루어 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상까지 접수하고자 한 것이다. 힘이 있으니 넘쳐 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폭력과 파괴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허무에 대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오욕락의 끝은 어디일까?

 

인생의 목표를 단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으로 잡는다면 그 끝은 항상 허무주의로 끝난다. 권력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면 그 끝은 폭력과 파괴가 따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 여기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기본에 속한다. 이와 같은 오욕락의 끝은 어디일까? 율장대품에서 보는 야사의 이야기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야사는 부처님 당시 대부호 아들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재벌2세 정도 되는 청년이었다. 그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그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겨울궁전이고. 하나는 여름궁전이고, 하나는 우기의 궁전이었다.”(Vin.I.15)라고 했다.

 

야사는 우기때 우기의 궁전에서 파티를 했다. 이에 대하여 그때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갖추고 탐닉했는데, 그가 먼저 잠들면, 시녀들이 잠들었지만, 기름 등은 밤이 지나자 타올랐다.”(Vin.I.15)라고 했다. 마치 재벌2세들의 환각파티를 보는 것 같다.

 

야사는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보니 어떤 시녀는 비파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떤 시녀는 머리를 산발하고, 어떤 시녀는 침을 흘리고, 어떤 시녀는 잠꼬대를 하는데, 마치 눈앞에 시체더미를 보는 것 같았다.”(Vin.I.15)라고 했다. 야사는 이런 광경을 보고 토할 것 같은 혐오를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재난에 대한 위험이 생겨나 싫어하여 떠남에 마음이 확립되었다.”(Vin.I.15)라고 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부자가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기 때문에 좀더 자극적인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마약이다. 요즘 재벌2세나 3세들이 마약으로 인하여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야사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야사는 시녀들이 침을 흘리며 자는 것을 보고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의 위험을 느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은 부자들에게 늘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투기 등으로 인하여 백만장자가 되었을 때 대부분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부동산투기 등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겼을 때 로또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로또당첨자들 대부분 불행하다고 한다. 이는 불로소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오면 들어온 만큼 공덕을 지어야 할 것이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사람들,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들을 위하여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갑자기 돈이 생긴 사람들은 쾌락을 위하여 써 버리고 만다. 쾌락의 끝장을 보게 되었을 때 가족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살아오면서 세 번의 찬스가 있었다고 했다. 모두 부동산에 대한 것이다. 세 번의 찬스가 있었음에도 모두 놓쳤다는 것이다. 특히 1987년 강남 잠실 13평짜리 아파트를 1300만원에 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때 사놓았더라면 엄청난 재산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동산으로 재산을 크게 늘린 사람의 예를 들었다. 찬스가 왔을 때 부동산투기 대열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찬스가 있을 것이다. 1992년 수원에서 서울로 이사 갈 때 방배동에 아파트를 살 기회가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거의 계약단계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에 솔깃하여 결국 계약을 하지 못했다. 이후로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때 사놓았더라면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다. 그런 한편 그때 샀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의 위험이다. 불로소득을 믿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사라지고 없어지고 말 물질적인 것에 집착했을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때 안사기를 잘 했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인한 재난의 두려움 때문이다.

 

야사는 이른 아침에 환락의 파티장을 뛰쳐나왔다. 야사는 ! 괴롭다. ! 고통이다.”라고 외쳤다. 세 개의 궁전에다 매일매일 환락의 파티를 하며 감각적 쾌락을 즐긴 대부호 아들은 머리를 잡고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쾌락도 고통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재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4)라며 출가한 것이다.

 

즐기는 삶에 만족은 없다

 

누군가 왜 삽니까?”라고 물었을 때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아마 상당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삽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과연 이 말은 맞는 말일까? 유튜브 ‘5분뚝딱철학에서 본 바에 따르면 행복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유튜브를 진행하는 김필영선생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왜 그런가? 즐기는 삶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말도 즐기는 삶에 해당된다.

 

빠알리어로 수카(sukha)는 행복이라고 번역된다. 동시에 안락이라고도 한다. 오감으로 즐기는 감각적욕망에 대한 행복에 대해서도 수카라고 한다. 물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이라는 말도 있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감각적 욕망의 행복에서 부터 시작하여 열반의 행복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그런데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을 때 결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행복은 감각적 행복을 말한다. 아무리 오감으로 감각을 즐겨도 그때뿐이다. 그래서일까 예산에 한계가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재벌2세나 3세들은 더욱더 강렬한 쾌락을 원한다. 마약에 빠지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즐기는 삶에는 만족이 없는 것이다.

 

행복은 인생의 수단일 뿐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행복은 인생의 수단일 뿐이다. 이때 행복은 인간의 심리적인 메커니즘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났을 때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두려움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이 행복감으로 인하여 다음에도 그 음식을 찾게 될 것이다. 이때 행복은 다음에 그 음식을 찾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감각적 쾌락이 그렇다. 심지어 선정삼매에서 행복을 맛보는 것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두려움이나 행복을 느낀다. 이를 인간의 심리적인 메커니즘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심리적인 메커니즘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동기부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잘 되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반드시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도 있고 갖가지 심리적 현상을 경험한다.

 

행복을 추구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이라 할 것이다. 인생의 꿈을 설정해 놓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 갔는데 이루어진다면 다행이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행일 것이다.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돈 버는데 올인하는 삶을 살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사업가가 돈을 벌기 위해서 애쓰는데 애쓰면 애쓸수록 빚만 늘어간다면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까?

 

누구나 행복을 꿈꾸고 누구나 돈 벌기를 원한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남는 것은 허()와 무()일 것이다. 마치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난 다음 밀려오는 허무 같은 것이다.  좀더 극단적으로는 야사의 경우에서와 같이! 괴롭다. ! 고통이다.”라고 할지 모른다.

 

행복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은 돈을 벌려고 노력한다고 돈이 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행복이나 돈이 인생의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없다. 행복이나 돈은 삶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사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5분뚝딱철학진행자 김필영선생은 그냥 사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대단히 싱거운 말이다. 이는 앞서 언급된 고미숙 선생의 빅퀘스천이라고 볼 수 있는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누군가 왜 삽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냥 삽니다.”라든가, “사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라며 답한다면 무책임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는 행복이나 꿈을 목표나 목적으로 살지 말자는 말과 같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 했을 때 행복해지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을 것이다. 이 말은 꼭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냥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막행막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나 돈은 사는데 있어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을 목표나 목적으로 살았을 때 불행해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왜 삽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냥 삽니다.”라든가, “사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라 하는 것이다.

 

항상 사띠해야 된다고

 

불교인들은 그냥 살 수 없다. 그냥 사는 것보다 알아차림 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늘 사띠(sati)해야 한다고 말한다. 잠에서 깰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깨어 있는 시간은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잠 잘 때는 송장처럼 뒤척이지 말고 자라고 했다. 일어날 때는 알아차림 하며 일어나라고 했다. 이런 알아차림은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도 요구된다.

 

깨달았다고 하여 막행막식하는 것이 아니다. 죽을때까지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 (Thag.654)라고 했다. 이렇게 해야 죽지 않는다. 불사이면 불생이 된다. 그래서 아라한을 완전한 행복이라고 한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했다. 여기서 방일하지 않음(appamada)’이라는 말은 알아차림을 뜻하는 사띠(sati)와 동의어이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방일하는 사람과 같다.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법구경에서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라고 했다. 게으른 사람,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했다. 아침 잠에서 깰 때부터 잠 잘 때까지, 그리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사띠를 유지하라고 했다. 이런 사람을 깨어 있는 사람,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누군가 왜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두 가지 대답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삽니다.”라든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삽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또 한부류는 그냥 삽니다.”라든가, “사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낫다. 꿈이나 행복은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인생의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인이라면 좀 더 지혜롭게 살고자 할 것이다. 그것은 늘 알아차림 하며 사는 것이다. 사띠(sati)하는 것은 선법(善法)이기 때문에 착하고 건전하게 살수밖에 없다. 그래서 매순간 알아차림 하면 선업을 짓게 된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면 불선업을 짓게 된다. 탐욕(lobha)은 불선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불선업을 짓게 된다.

 

야사는 이제까지 불선업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감각적 욕망으로 사는 것이 불선업인줄 몰랐다. 쾌락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것이 비로소 고통인 것을 알았다. 야사가 부처님에게 찾아 갔을 때 부처님은 야싸여,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야싸여, 오십시오! 앉으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가르침을 설하겠습니다.”(Vin.I.16)라고 말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허무주의나 영원주의가 발붙일 수 없다. 매순간 사띠 하고 있으면 욕망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할 수 없다. 누군가 왜 삽니까?”라고 묻거든 이를 방법론으로 바꾸어서알아차림 하며 삽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알아차림하면 할수록 선업을 짓게 되어서 행복에 이르는 길로 가기 때문이다.

 

 

고따마의 제자들은

항상 잘 깨어 있다.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신체에 대한 새김을 확립한다.”(Dhp.299)

 

 

2020-0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