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집 떠나 있는 자식을 위하여
내가 편해야 남도 편하길 바란다. 내가 불편하면 남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가 아플때 우선 낫고 보아야 한다. 내가 아프면서 남 아픈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가 편하듯이 남도 편하길 바라는 마음이 자애의 마음이다.
잠을 잘 자고 났을 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집 떠나 있는 자식을 생각하게 된다. 자식이 편하길 바라는 마음이 자애의 마음이다. 그래서 자애경에서는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Stn.147)라고 했다.
자애의 마음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기자신이다. 그래서 먼저 “내가 편안 하기를!” 또는 “내가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다음으로 집 떠나 있는 자식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가까운 사이라 하여 아내나 남편 또는 연인에게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애는 우정을 뜻하는 멧따(metta)를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다. 멧따를 사랑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별도로 있다. 삐야(piya)라는 말이다.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삐야라는 말을 사용한다. 멧따라는 말은 남녀간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에게 우정의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친구간의 우정을 뜻하는 멧따라는 말에는 집착이 없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삐야라는 말에는 집착이 있다. 이런 이유로 부부간에 또는 연인간에는 자애의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다. 자애가 애정으로 변질되면 마음의 평안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자애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다. 죽은 자를 말한다. 자애는 산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죽은 자와는 교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삼계 어디에선가에 태어 났을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낼 때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자애의 대상이 된다.
연민의 마음 역시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괴로우면 남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선 나의 괴로움부터 해결해야 한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때, 빚을 져서 힘들 때, 소송이 걸려 있어서 어려울 때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럴 때 하는 말은 “내가 하루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길!”하는 것이다.
나의 고통이 해소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아픈 자식이 있다면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길!”라고 연민의 마음을 낼 것이다. 그렇다고 근심걱정 해서는 안된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연민함으로 인하여 마음의 편안을 찾고자 함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고통에 노심초사하면 마음의 평안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자애의 마음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마음을 내듯이 해야 한다. 연민의 마음도, 기쁨의 마음도, 평정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보면 네 아들을 둔 어머니의 비유를 들었다.
자애는 막내를 대하는 것과 같다. 사랑스런 어린 아들에 대하여 “행복하기를!” 이라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 모든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연민은 병든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병고에 시달리는 아들에게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며 모든 중생이 불행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기쁨은 청춘의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젊음이 넘치는 아들을 볼 때 마다 “젊음이 늘 계속되기를!”이라며 모든 중생의 성공과 번영을 축하해 주는 마음이다.
평정은 자립한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힘으로 살아 가는 아들에게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며 무관한 자를 대하듯,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들, 병든 아들, 청년이 된 아들, 자활하는 아들을 대하듯이 사무량심을 닦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는 성장하기를 원하고, 병든 아들에게는 치유되길 바라고, 청년이 된 아들에게는 젊음의 행복이 오래가길 바라고, 자립한 아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Vism.9.108)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사무량심의 핵심은 자애이다. 자애수행을 하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 자애수행은 좌선할 때 예비수행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와같은 자애관은 사마타명상주제 40가지 가운데 하나에 해당된다.
자애의 마음을 낼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자애경에서는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라며 자애의 마음을 낼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후렴구처럼 계속 되는 이 말은 어쩌면 주문(呪文)같다고 볼 수 있다.
신심 있는 불자들은 “나무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명호를 한다. 감사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 심지어 차에 치여 죽은 동물을 볼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한다. 자애와 연민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어떤이는 “옴 바이로차나”로 시작되는 광명진언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이는 신묘장구대다라니와 같은 긴 주문을 외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사마타수행을 하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 떠나 있는 자식에게, 멀리 사는 부모에게, 형제들에게, 그리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무엇보다 자애의 마음을 내면 내가 편안해진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상대방을 조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애의 마음을 내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慈心解脫)’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낼 때 이왕이면 빠알리어로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언어로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빠알리와 같은 민중어로 말씀했다. 마치 신심 있는 불자들이 산스크리트 원어로 주문 외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하여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라고 말하는 것이다.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2020-02-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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