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낭속의 팽귄새끼를 보면
TV를 바보상자라고 헌다. 어떤 이는 집에서 TV를 치웠다고 한다. 스마트폰도 치웠는지 의문이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한심하다는 것이다. 드라마나 연예인프로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본다. 요즘은 먹방프로일 것이다. 남이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야동을 즐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이유로 TV는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한다.
TV를 멀리하면 놓치는 것이 많다. 뉴스를 접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다큐채널이다. 교양을 길러주는데 다큐만한 것이 없다. 그중에서도 자연다큐가 으뜸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경전 읽는 것 못지않고 강연듣는 것에 비할바가 아니디. 최근 자연다큐채널 ‘BBC Earth’에서 본 남극 황제펭귄이야기가 그것이다.
날지도 못하는 새가 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지만 바다에서는 총알처럼 날아다닌다. 팽귄을 말한다. 현실에서는 접할 수 없는 펭귄이야기를 자연다큐에서 여러번 보았다. 볼 때마다 뭉클한 무엇이 남아 있다. 오래전 MBC에서 방영된 ‘남극의 눈물’이라는 프로가 떠올려진다.
왜 남극의 눈물이라고 했을까? 한마디로 펭귄의 생존투쟁과 번식투쟁을 보면 눈물겹기 때문일 것이다. 극한의 오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클을 형성하고 그 와중에서 새끼를 키우는 모습에 가슴이 저미는 애틋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축생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갈까? 그것은 한마디로 번식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다큐 공통점을 보면 번식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 생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목숨을 걸고 먹이를 얻어 오는 것도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이 새끼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만약 번식하지 않는다면 존재이유가 없을 것이다.
자연다큐를 보면 축생이나 인간이나 다를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새끼를 기른다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 똑같다. 새끼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에서는 완전히 같은 것이다. 종족번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축생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오로지 가족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자연다큐에서 본 축생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인간이 축생보다 더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오계를 어기는 삶이다.
자연다큐를 보면 살생은 일상이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살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 포식자는 옆에 먹이가 있어도 내버려 둔다. 그러나 인간은 축적하는 삶을 살아간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않는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동족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인간은 내버려 두면 오계을 밥먹듯이 어긴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고 취기가 있는 것을 가까이 한다. 동물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A5.145)라는 가르침에서도 획인된다. 축생 아래에 지옥이 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면 축생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축생과 관련된 자연다큐를 보면 측은하기 그지없다. 괴로운 삶을 보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적고 괴로운 삶이 대부분이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반이라 볼 수 있는 인간의 삶과 비교된다. 그러나 오로지 괴로움만 있는 지옥보다는 그래도 낫다. 그래서일까 육도윤회 순서를 보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 순으로 되어 있다.
어리석은 행위를 하면 축생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오로지 먹는 것만 밝히고 오로지 번식하는 삶만 산다면 축생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식욕과 성욕에 따른 본능적인 삶에 충실하다면 사실상 축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것도 축생의 삶과 가깝다. 요즘 먹방프로를 보면 축생의 삶을 보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일까?
황제펭귄은 왜 남극의 극한에서 살아갈까? 천적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얼음바닥 위에서는 오로지 펭귄밖에 없다. 먹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면 잡아먹힐 염려가 없다. 그대신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야 한다. 새는 새이지만 날지도 못하는 펭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혹한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생명이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포낭에서 머리를 삐죽 내민 새끼를 보면 아낙네 등 뒤에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연상케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 또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하다.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온갖 것이 동원되었다. 위대한 탄생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자신과 똑 같은 것들은 번식함으로 인해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목숨과 같은 새끼가 또 번식하여 개체를 유지해 갈 때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새생명을 남겼으니 죽어도 좋은 것이다. 동물적 속성이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낭속의 팽귄새끼를 보면 강보에 싸인 아기가 자꾸 연상된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있다. 날개가 퇴화되어 흔적만 남아 있지만 물속에서는 물고기처럼 살아간다. 물 밖에서는 뒤뚱거리며 걸어간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는 극한의 오지에서 살아간다. 포낭속의 펭귄새끼는 남극의 눈물과도 같다. 세상에 펭귄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20-01-29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대방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0) | 2020.02.07 |
---|---|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으리라 (0) | 2020.02.06 |
“네, 그렇군요." 겸청(兼聽)의 리더십 (0) | 2020.01.28 |
공감할 줄 아는 사람 (0) | 2020.01.27 |
자꾸 만나자고 하는데 (0) | 2020.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