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적 불교의 한계를 보며
책을 하나 선물 받았다. 페친(페이스북친구)으로부터 받은 것은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라는 책이다. 저자는 유선경-홍창성 두 저자로 되어 있다. 공동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을 보면 ‘필자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의 공동저작임을 알 수 있다. 글에서는 ‘저자들’이라고 한다.
저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우선 저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척박한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갈증을 풀어준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것은 너무나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도 동떨어져 있다. 이렇게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저자들은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법구경에 이런 말이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Dhp.76)라는 말이다. 누군가 나의 허물을 지적했을 때 대부분 불쾌하게 생각한다. 특히 자신 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지적받으면 모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알려 주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욕하고 때리더라도, ‘이것을 가져라.’라고 보물을 보여주면, 가난한 자가 화를 내지 않고 기뻐하듯, 사람은 자기의 부당함과 실책을 보고, 누군가가 지적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DhpA.II.107)라고 했다.
충고는 자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공개적인 망신을 주기 위하여 비난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건전한 비판이 되었을 때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책 선물에 대하여
책을 매우 빠른 속도로 읽어 보았다. 페이스북에서 이미 접한 글도 있다. 글의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마치 대각선으로 읽듯이 훝어 본 것이다. 그런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연필로 밑줄로 그어 놓았다. 책을 볼 때 낙서를 하지 않는다. 밑줄은 허용한다. 경전에서는 노랑형광메모리펜을 이용한다. 이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놓았다. 모두 반박할 내용에 대한 것이다.
책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져 있다. 철학적 내용도 읽기에 부담이 없다. 예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탁월한 글쓰기라 볼 수 있다. 다만 생물학적 분석 내용은 전문가의 영역이라 그런지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생물학과 관련된 내용은 스킵했다. 생물학과 불교와 연관하여 쓴 것만을 집중적으로 보았다.
선물 받은 책이 많이 있다. 그러나 다 읽어 보지 않았다. 책을 선물한 사람에게 미한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일까 책선물을 하지 말라고 한다. 책을 선물해도 읽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사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사 본 책은 읽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물 받은 책은 최소한 서문과 목차만이라도 읽어 보려고 노력한다.
권위에 의존하는 사람들
책의 대강은 서문에 나와 있다. 서문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서문에서는 ‘공의 관점으로’라는 말이 나온다. 대승불교적 해석으로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책에서는 분자생물학, 유전자, 생명과학 등과 같은 용어가 나온다. 불교를 생명과학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불교진화론이다. 불교가 지난 2천 5백년 동안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모두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권위에 의존한다. 권위자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A3.65)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부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성전의 권위’라는 말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마저 믿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만약 부처님이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부정한다면, 부처님은 실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성전이라는 말은 브리만교의 성전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 말에 대하여 부처님이 설한 것에도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본다.
누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먹여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부처님이 한 말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또 그 말이 나에게 유익한 것인지 따져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 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 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98)라고 했다.
학자의 권위에 대하여
부처님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승되어 오는 빠알리삼장에 의존한다. 빠알리 삼장이 스승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삼장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기록되어 전승 되어 온 것을 모두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승 과정에서 분명히 추가되고 삽입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왜곡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떤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상당수는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학자들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깔라마의 경을 분석해 보면 모두 열 가지로 되어 있다. 그 중에서 학자의 권위에 해당되는 것이 아홉 번째 항목인‘밥바루빠따야(bhabbarūpatāya)’라는 말이다.이 빠알리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라고 번역했다.
밥바루빠따야(bhabbarūpatāya)는 가능을 뜻하는 밥바(bhabba)와 모습을 의미하는 루빠따(Rūpatā)의 복합어이다. 그래서 깔라마경을 분석한 글을 보면 ‘유능한 형상’이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스승의 권능에 미루어 보아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열 번째 항을 보면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 (samaṇo no garū)”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승의 인품과 평판과 존경심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스승에게 권위를 부여했을 때 스승이 하는 말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부처님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전승된 빠알리 삼장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회의론자들이 전승된 삼장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만 이는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읽어 보면 의지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고 했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권위 있는 사람이 말 했다고 하여 의지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 말이 부처님 가르침과 맞는 것인지 대조해 보아서 맞으면 의지하고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함을 말한다.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법인이다. 세 가지 담마의 도장이라는 뜻이다. 마치 공문서에 직인을 찍으면 효력이 발생하듯이,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갖는 법의 도장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모두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것 하나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회의한다면 ‘그는 삼장을 읽어 보지 않았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불교는 진화해 왔다고 하는데
일반불자들은 부처님의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내 놓아도 부처님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럼에도 시대에 따라 학자들의 이론에 권위를 부여한다면 불교는 시대에 따라 진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수가 그렇고 세친이 그렇다. 수많은 논사들이 그렇다. 이를 불교의 진화라고 볼 수 있을까?
중관학의 권위자 용수를 제2의 석가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의 창시자라고 한다. 학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보살이라는 칭호가 붙고 더 나아가 제2석가, 심지어 대승불교의 교주처럼 되었다. 이런 현상을 불교의 진화라고 볼 수 있을까?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책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미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연기하여 무상할 수밖에 없는데, 불교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 온 공부와 수행법이라고 해서 어떻게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에 전혀 상관없이 모두 잘 적용될 수 있겠는가. 초기불교, 대승불교, 묵조선과 간화선… 이들 모두는 시절인연에 따라 불교사에 등장했고 또 그렇게 시절인연에 따라 변화하며, 때로 물러나고 때론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를 반복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하나라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붙잡을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들 것 시절인연에 따라 변이하고 진화해 나가도록 놔두어야 한다. 필자들은 이제 우리도 불교가 연기에 의해 진화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323쪽,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운주사)
저자들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불교를 보고 있다. 이를 연기와 공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변화하듯이, 불교 역시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시대나 그 나라의 환경에 맞는 불교로 바뀌어 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에서는 “불교는 현재 제반과학, 특히 자연과학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교리를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이해하며 21세기에 어울리는 더욱 열린 가르침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296쪽)라고 했다.
오로지 유물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을 보는 여러 관점이 있을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육사외도의 견해로 나타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물론이다.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물론에 따르면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라고 했다.
유물론은 사견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보는 것과 같이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비존재는 사라진다.”(S12.1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가 조건발생함을 말한다. 이는 업과 윤회와도 관련이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여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남아 있는 한 결코 단멸할 수 없다. 이는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전송으로도 알 수 있다.
만약 전송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이것 하나만 취한다면 단멸론은 합리화될 수 있다. 이는 ‘상호의존적 연기’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한 것이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남는 것이 없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한번 더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다름아닌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송을 설한다음에는 반드시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동시에 설했다. 이는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부수기 위한 것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물질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자
요즘은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의 시대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물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이 모두 다 그렇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과학자들에게는 무신론자가 많은 것 같다. 무신론자 중에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리차드 도킨스가 대표적이다.
과학자는, 특히 자연과학자는 물질을 탐구한다. 물질을 떠나서 정신적 현상을 탐구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물질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자가 불교를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불교를 물질적 관점으로 볼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책을 보면 진화이야기가 나오고 유전자 이야기가 나온다. 당연히 업과 과보, 그리고 윤회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정신적 영역은 과학자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물질적 관점에서 불교를 보았을 때 어떤 불교가 될까? 이는 책에서 증기의 예를 들어 “죽음이란 단지 인연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일 뿐이지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160쪽)라고 했다. 증기가 구름이 되고, 비의 형태로 되어 순환됨을 말한다. 이는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자연현상을 예로 들어 죽음을 설명한 것이다.
자연과학자에 따르면, 죽음이란 단지 인연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은 부처님당시 육사외도 스승은 유물론자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S24.5)라는 유물론적 관점을 연상케 한다.
과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유물론적 관점으로 보기 쉽다. 과학자들에게는 오로지 물질이 탐구의 대상이다. 이렇게 과학자의 눈으로 불교를 해석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책에서는 업과 업의 과보, 윤회에 대하여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다. 책에서는 “불교에서는 깊은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같은 사람이 나고 죽고 또 나고 죽는 윤회를 반복하니까 이 생에 좋은 업을 많이 지어 더 나은 다음 생을 기약하라고 가르치는 방편을 펴 왔다.”(168쪽)라고 했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을 ‘방편’이라고 말한 것이다.
불교를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오로지 물질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업과 업의 과보,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볼 것이다. 오로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과 오로지 과학적 검증 가능한 것만을 믿는 과학자에게 유물론적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경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을 기반으로한 진화론적 관점으로 불교를 본 것이다.
저자들은 책에서 생물학에 기반한 진화론적 관점에서 불교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다 무자성의 공사상이 가미되었다. 그래서 서문에서는 “불교의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생명과학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9쪽)라고 했다. 더 나아가서 “필자들은 불교적 생명과학이 주는 통찰로도 우리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10쪽)라고 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자만, 오만, 교만, 편견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모든 것을 물질에 기반하여 물질을 분석하여 물질적으로 해석한 불교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질에 기반한 불교가 되었을 때 업이니 윤회이니 하는 말은 방편이 되고 더 나아가 허구가 된다.
저자들은 불교는 진화한다고 했다고 말한다. 이는 과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불교를 유물론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불교의 진화에 대하여 “마치 생명체들에 끊임없이 변이가 일어나고,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에 따라 어떤 특정한 변이를 가진 생명체들이 선택되고 진화하는 것과 같다.”(302쪽)라고 했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불교는 진화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유물론적 불교의 한계를 보며
저자들의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화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불교는 퇴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정점이었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가르침이 변질되고 오염되어서 퇴보로 보는 것이다.
정법은 종국에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불이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것도 정법이 훼손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스리랑카에서 원형을 대체로 잘 간직하고 있었던 테라와다불교는 이제 세계 주류불교가 되었다. 그럼에도 책에서는 “불교도 언제나 진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어 소멸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320쪽)라고 했다. 그럼에도 책에서는 “불교도 언제나 진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어 소멸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320쪽)라고 했다.
저자들은 과학에 바탕을 둔 불교진화론을 이야기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완전한 것이고 미완성된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후대 용수, 세친 등 기라성 같은 논사들이 출현해서 보완했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는 중국 조사의 가르침을 완성된 것으로 본다. 여기에 과학자들은 물질을 분석한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츠키는 “마하야나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물질에 기반한 것이다. 본래 과학은 물질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물질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오온이 물질을 포함하여 수, 상, 행, 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로지 물질적 현상 하나만 다루었을 때 불교를 생물학에 기반한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물질에 기반하여 불교를 설명하려 한다면 유물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020-03-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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