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자신만만한 스님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15. 13:06

 

자신만만한 스님

 

 

사람들은 권위에 약하다. 불자들도 다르지 않다. 스님이 불교에 대하여 말하면 믿는 경향이 있다. 학자가 불교에 대해 말해도 믿어준다. 더구나 불교와 관련 없는 전공을 가진 학자의 말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수학자가 "윤회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믿는 것이다.

 

수학자는 윤회라는 것은 디엔에이(DNA)에 따른 생물학적 윤회와 문화유전자(meme)에 따른 문화적 윤회만 있을뿐이라고 했다. 설령 불교에서 말하는 업에 의한 윤회가 참(진리)일지라도 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했다.

 

수학자가 했던 말을 보통사람이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긍하는 사람보다는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이는 크게 웃어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학자가 말 했을 때는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가 불교학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학자의 권위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냐?

 

지금으로부터 십여년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익명으로 썼다. 2000년대 중반 인터넷이 크게 활성화되어서 블로그라는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던 시기이다. 인터넷은 익명을 특징으로 한다. 실명 보다는 필명으로 소통하는 것이 대세이다. 블로그 역시 필명으로 가능했다.

 

블로그에서 필명으로 글을 쓰다 보니 듣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같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스님아니냐?’ ‘학자아니냐?’는 말이었다. 글이라는 것은 스님이나 학자들이나 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블로그에서 불교관련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에 여러 장르가 있지만 불교로 특화한 것이다. 주로 경전문구를 근거로 하여 쓰고 있다. 여기에 주석의 내용까지 덧 붙여 쓴다.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문구를 이용하여 쓰는 것이다. 일종의 짜깁기라고도 볼 수 있다.

 

글을 쓰다보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경전과 주석을 보다보니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 그 내용은 너무나 심오한 것이다. 접하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진리에 대한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이미 수천년부터 전승되어 왔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교통이 발달하여 글로벌화 된 것도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인터넷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해도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초기경전이 번역 되어 나왔기 때문에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것이다. 니까야가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해가 1989년이니 길어야 31년 된 것이다.

 

번역되어 출간된 니까야를 모두 갖추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초기불전연구원의 사부니까야도 갖추었다. 쿳다까니까야에 속하는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도 갖추었다. 또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담마상가니와 같은 논서도 구입했다. 여기에 율장과 관련하여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도 구입했다. 한곳에 모아보니 책장으로 가득하다.

 

미션스쿨에서 삼년

 

어떤 이는 한종교만 아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여러 종교를 알아야 나의 종교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당하고 당연한 말이다. 한국사람중에서 교회 다녀 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스님 중에도 교회다녔다는 사람도 많다. 청소년시절 동네 부근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기독교계통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중학교를 불교학교 다녔고, 고등학교를 기독교학교를 다녔다. 청소년시절 불교와 기독교를 접한 것이다. 그런데 먼저 접한 학교의 영향이 컸다. 중학교에서 불교를 배운 것이 평생간 것이다. 이는 고등학교때 영향을 주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예배와 찬송이 있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때 미션스쿨 3년은 삶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학교에서는 일단 들어왔으니 신자로 만들고자 했다. 소위 뺑뺑이로 들어왔다 하더라도 들어 왔기 때문에 빠져 나갈 수 없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반발만 커져 갔다. 교목이 설교를 하면 마음속으로는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교목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표적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뜨끔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성적은 엉망이었다. 60명 중에 50등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운 학교에서 탈출할 것인지만 고민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만 끙끙 앓았을 뿐이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우열반이 생겼다. 열반으로 떨어졌을 때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나 학교탓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입시가 코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학교에 대한 불만을 접고 공부를 해야 했다. 2학년 5월달에 우열반은 해체되었다. 반이 다시 짜여진 것이다.

 

3학년때는 오로지 입시에 올인했다. 가을에는 반에서 4등까지 하게 되었다. 깜짝놀란 담임이 과외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과외를 해 본적이 없다. 그때 당시 과외는 돈 많은 애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종로2가에 있는 학원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고등학교때 트라우마가 꽤 오래 갔다. 이후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끊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는 불자였지만 한번도 절에 간 적이 없었다. 불혹이 될 때까지 종교와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것은 불교와 인연에 따른 것이다.

 

중학교때 배운 불교가 남아 있었다. 여기에 풀리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시간이 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말한다. 불교에는 분명히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불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2004년 불교교양대학에 입학한 것이 시초이다.

 

경전에 의존하는 이유는

 

경전을 보니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그렇다고 대승경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접한 것은 대승불교였다.

 

도심포교당에서는 금강경을 강의했다. 대단히 심오한 경전이다. 모르기 때문에 심오해 보인 것이다. 법화경과 화엄경을 읽어 보았다. 인내력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논서를 보아야 했다. 대승기신론을 읽어 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가 이렇게 어렵고 난해한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2009년 한국명상원다니면서 비로소 눈이 떠졌다. 미얀마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十二緣起)’를 보고서 길이 보였다. 경전과 주석, 그리고 논장에 근거한 법문이었다. 궁금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이후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글쓰기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스님아니냐 학자아니냐는 말이라고 했다. 이는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를 말한다. 같은 말을 해도 스님이나 학자가 말하면 믿는다는 것이다. 역으로 같은 말을 해도 일반사람이 말하면 반신반의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경전에 의존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제아무리 스님이나 학자의 말에 권위가 있어도 부처님에 대한 권위에 못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한 스님

 

스님이면서 학자인 사람도 있다. 그것도 피에치디(PhD)가 네 개라고 한다. 권위에 권위가 플러스 되었으니 권위의 상징과도 같을 것이다. 권위의 상징이 불교TV를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불교TV에서는 스님을 대대적으로 띄어 주고 있는 것 같다. 스님을 소개할 때는 항상 박사학위 네 개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스님의 강연은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스님은 말을 잘 한다.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하고 여기에다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유튜브에서 강연을 듣다보면 유익한 것도 많다. 몰랐던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 보다는 자신의 말을 많이 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해석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스님은 자신만만하다.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것일까? 이는 스님의 개무시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은 언젠가 강연에서 청중을 대할 때는 개무시해야 합니다.”라고 말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능한 강사라도 청중앞에 서면 얼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런데 얼어버리면 제대로 실력발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중은 모르는 사람들로서 알기 위해 모인 것이다. 강사는 알려 주기 위해 온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강사는 청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청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치고 할 말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님이 말하는 개무시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은 늘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말한 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보다는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특히 최근 유튜브에서 본 결집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스님은 모든 것을 권력투쟁 개념으로 보는 것 같다. 1차 결집후에 아난다가 승리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마하깟싸빠와 아난다가 대립했는데 최후승자가 아난다라는 것이다. 부파불교를 설명할 때도, 대승과 소승을 설명할 때도 권력투쟁 개념으로 설명한다.

 

스님은 소승이라는 말도 거침없이 사용한다. 전세계적으로 소승이라는 뜻의 히라야나(hīra yana)’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추세에 있다. 그럼에도 스님은 현재 남방 테라와다불교에 대하여 소승이라고 말한다. 부파불교시대에 한무리가 살아 남아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스님은 테라와다에 대하여 부처님과 부처님직제자 시기에 해당되는 초기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초기불교는 단절되고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스님은 오히려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민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은 것이 대승불교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스님이고 피에치디 타이틀이 네 개나 되니 믿어야 할까?

 

스님은 말하는데 거침이 없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아소까대왕이야기도 그렇다. 스님은 아소까대왕이 99명의 이복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애써 이루어 놓은 것을 하루아침에 허물었다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권력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3차결집의 후원자

 

아소까대왕은 불교역사에 있어서 전륜성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크게 두 가지 업적이 있다. 하나는 3차결집의 후원자이고 또 하나는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한 것이다.

 

아소까대왕으로 인하여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특히 제3차결집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아소까대왕은 정복전쟁으로 일관하다가 깔링가전투에서 참상을 본 후 불교로 개종했다. 이후 강력한 불교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의 교세가 전인도로 확산되었다.

 

스리랑카역사서 디빠왐사에 따르면 아소까대왕은 전인도에 84천개의 승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인도 84천개의 마을에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교도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이교도들은 살기 위하여 승원에 들어갔다. 일종의 위장잠입인 것이다. 그래서 사원에서는 이교도의 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특히 승단의 공식행사인 우뽀사따(布薩)와 빠라와나(自恣)의식에까지 슬그머니 끼어 들었다. 이는 승가의 오염에 해당된다.

 

우다나에 따르면 부처님은 포살일에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이 있으면 침묵했다. 부처님은 대중이 청정해야 포살을 행한 것이다. 그래서 우다나 포살의 경’(Ud.51)을 보면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을 끌어내는 장면이 있다. 이는 목갈라나 존자가 “세존이시여, 제가 그 사람을 끌어내었습니다. 대중은 청정해졌습니다.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계율의 항목을 설해주십시오.(Ud.51, A8.20)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대중이 청정해졌을 때 바다의 여덟 가지 비유를 들어 포살의 공덕을 설했다. 이는 부처님이 “목갈라나여, 아주 놀라운 일이다. 목갈라나여,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그 어리석은 사람은 팔이 잡혀 끌어내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Ud.51, A8.20)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승단에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포살과 자자를 할 수 없다. 아소까대왕 당시에 무려 7년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옥석을 가려내고자 아소까대왕이 직접 나선 것이다.

 

승가에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 앉아 있다면 끌어내야 한다. 아소까대왕 당시에도 승단에는 청정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6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아소까대왕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서 이들 이교도들을 승단에서 추방했다. 그 중의 하나가 어떤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은 분께서 제시하셨습니까?”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영원주의 견해를 가진 이교도는 부처님은 영원주의자였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밖에도 이교도의 갖가지 견해의 답이 있었다. 아소까대왕은 이들 이교들에게 흰옷을 입혀서 추방했다고 한다.

 

스리랑카불교는

 

아소까대왕의 첫번째 업적이 제3차결집을 후원한 것이라면 두번째 큰 업적은 불교를 전세계로 알린 것이었다. 아소까대왕은 제3차결집이 끝난 후에 전세계에 담마사절단(dhammadūta)을 파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아홉방향으로 담마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스리랑카인 것이다.


 

스리랑카불교를 테라와다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소승이라고 해서 부파불교의 일부라고 하여 폄하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스리랑카불교는 제3차결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부처님 입멸후 250년 후에 제3차결집이 이루어졌는데 앞서 언급된 대로 불교에 잠입한 이교도를 몰아 내고 공인된 불교를 말한다. 그래서 율장과 경장, 그리고 논장으로 이루어진 삼장이 완성되었다.

 

특히 제3차결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논장이다. 이는 이교도들을 승단에서 추방하고 난 다음 수행승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자세히 설명하셨습니까?”라며 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운 수행승들은 부처님은 분석적인 교리의 주창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부처님이 분별론자(vibhagavādin) 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라고 했다. 이는 가르침을 분석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는 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 (paiccasamuppāda vo, bhikkhave, desessāmi vibhajissāmi.)(S12.2) 라든가,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한 뒤에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M99)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즉 오온에 대하여 설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비담마논장이다. 아소까대왕당시 제3차결집에서는 율장과 경장과 함께 논장이 체계화 되어 삼장으로 정립되었음을 말한다. 그런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승된 것이다.

 

스리랑카불교를 부파불교의 일부로 보고 부파불교의 산물이리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스리랑카불교는 아소까대왕이 전세계에 파견한 담마사절단에 의해서 전승된 공인불교를 말한다.

 

오늘날 스리랑카불교는 테라와다불교로 불리우는 종가집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어느 자신만만한 스님은 테라와다불교는 초기불교와는 단절된 것이고 부파불교의 일부가 살아남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담마에 의한 정복

 

정법이 쇠퇴한 데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 수행승들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A10.3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말세가 되면 가르침 아닌 것이 득세함을 말한다. 비법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을 때 정법이 쇠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말세가 되면 담마 아닌 것을 담마라고 설하는 것이다.

 

아소까대왕은 제3차결집을 통하여 비법을 쳐내고 정법을 수호했다. 그리고 전세계에 담마사절단(dhammadūta)을 파견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소까대왕의 바위칙령에 있는 것과 같이 담마에 의한 정복을 뜻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을 담마위자야(Dhammavijaya)라고 한다. 담마에 의한 승리라는 뜻도 있다. 아소까대왕이 정복전쟁을 하다가 깔링가참상을 보고서 방향전환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일아스님이 펴낸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민족사)’아소까(민족사)’에 상세히 실려 있다.

 




무력에 의한 세계정복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천명한 것이 담마위자야이다. 그래서 바위칙령 13호를 보면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와“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진정한 정복임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자신만만한 스님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2020-02-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