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수행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12. 10:23

 

수행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게으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저것 아는 것은 많은데 막상 앉아 있으려고 하면 한시간 앉아 있기가 고역이다.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에서는 5분도 앉아 있기가 힘 들다. 앉아 있어야 할 당위성이 없는 사람에게 꼼짝말고 움직임 없이 앉아 있으라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있어서 좌선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 조띠까 사야도의 책 ‘마음의 지도’를 다 읽었다. 이 책이 좋다고 하여 추천 받았다. 미루고 미루다가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첫장을 열어 보았을 때부터 느낌이 달랐다. 나에게 딱 맞는 수행지침서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수행지침서가 있지만 이 책처럼 착착 달라붙듯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없었던 같다.

 

 

책을 읽을 때 밑줄 치며 읽는다. 볼펜 등 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형광메모리펜은 허용한다. 1차적으로 노랑형광메모리펜으로 밑줄 친다. 더 강조하고 싶으면 주황색형광메모리펜을 사용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책이 컬러풀하게 된다. 또 꼭 찾아야 할 부분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사용한다. 더 찾기 쉽게 하려면 해당 페이지를 접어 놓는다.

 

어느 한 구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되는 내용이다. 한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보아야 한다. 형광메모리칠 해 놓은 부위를 보면 두 번, 세 번 보는 것이 되어서 새기게 된다. 매우 빠른 속도로 보아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책 대로 해 보는 것이다. 실제로 수행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집중수행을 한 경험이 있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방법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놓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해야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 먼저 수행을 해야 할 당위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수행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등산의 비유를 들 수 있다.

 

게으른자들은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힘들게 올라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할 것이다. 산 꼭대기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다. 게으른 자들은 결국 내려오고 말 것을 힘들게 올라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등산을 즐기는 자는 산이 있어서 간다. 힘들게 오르는 것은 건강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한 성취감을 맛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험에 대한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좌선한다고 하여 힘들게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일까? 고행하자고 수행하는 것일까? 더러워진 마음을 닦는 것이 수행일까? 수행에 대하여 알려면 먼저 용어를 알아야 한다.

 

수행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바와나(bhāvanā)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calling into existence, producing’라 하여 존재의 의미가 있다. 이는 정신적 향상이나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바와나를 ‘becoming’의 뜻으로 해석한다. 무언가로 ‘되어 감’을 말한다. 이는 ‘변화’의 뜻이 있기도 하다. 수행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향상 또는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단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Ud.51,A8.1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다기 보다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수행을 하여 변화가 없다면 수행의 효과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수행한다.” 또는 “도 닦는다.”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함부로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수행한다고 떠 벌리고 돌아다녔는데 아무런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어떤 소리를 들을까? 아마도 “수행한다는 사람이” 또는 “도 닦는다는 사림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은 떠 벌리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숨어서 하듯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을 하면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가장 큰 변화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단계적 깨달음과도 관계가 있다. 이를 한자용어로 사용한다면 ‘돈오점수’라 해야 할 것이다.

 

수행을 하면 ‘아홉가지 출세간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출세간법 아홉가지라고 말한다. 가장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차례로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된다. 각 단계마다 도와 과가 있기 때문에 사향사과라고 한다. 이를 성취한 사람에 대하여 사쌍팔배의 성자라고 한다.

 

돈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열반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네 단계마다 공통적으로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려면 열반을 체험해야 하고, 사다함이 되려면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 그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각 단계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제거해야 할 오염원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각 단계마다 열반을 체험해야만 수다원이 되고,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점수라고 했을 것이다.

 

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말만 있을 뿐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기꾼과 같을 것이다. 사기꾼은 약속을 잘한다. 돈을 갚으라고 말하면 금방 갚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다려도 갚지 않는다. 또 전화해서 갚으라고 말하면 또 금방 송금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시 기다려도 입금되지 않는다. 전화 걸 때 마다 말로는 금방 결재하겠다고 말하면서 실행은 하지 않는 것이다. 말로만 약속할 뿐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말만 앞서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사기꾼같은 사람으로 본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있다. 이것 저것 많이 알아서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그러나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저 많이 아는 지식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실천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지행합일의 행자라고 할 것이다.

 

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해야 신뢰받는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하는 지행합일의 사람이라면 더욱 신뢰받는다. 이런 저런 수행지침서만 볼 뿐 실천하지 않는다면 지식만 쌓여 있는 것과 같다. 수행을 하여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았을 때 게으른 지식인과 같다. 산이 있는데 오르지 않는 게으른 자와 같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문구에 감동하고 주석에 인식의 지평이 넓어짐을 느낀다. 그러나 글 쓰는 것으로 그친다면 산에 오르지 않는 게으른자와 같을 것이다.

 

이런저런 수행지침서를 읽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내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형광메모리펜으로 강조된 부분을 기억한다고 해도 경험해 보지 않으면 산을 오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우 조띠까 사야도는 책의 말미에 “결정을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것도 확고한 결정을 하라고 했다. 한번 결정했으면 마음을 바꾸지 말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결정바라밀(adhiṭṭhāna-pāramī)’에 대한 것이다.

 

 

십바라밀 중에서 결정바라밀이 있다.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일까? 이는 부처가 되기로 서원한 것에서 대하여 실천하겠다는 강한 결의를 말한다. 어느 정도일까?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의적 초월의 길에 대하여 “그들의 생명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정”이라고 했다.

 

수행은 대충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정해야 한다. 결정을 뜻하는 빠알리어는‘adhiṭṭhāna’이다. 이 말은 ‘강하게’를 뜻하는 ‘adhi’와 ‘서 있음’을 뜻하는 ‘ṭhā’의 복합어이다. 그래서 확고하게 서 있음을 말한다.

 

한번 결정된 것은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이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해서는 안된다. 말만 앞서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실없는 사람이 된다. 수행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정을 해야 한다. 한번 결정되었으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2020-06-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