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어떻게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김진태선생의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를 읽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0. 7. 18:30

 

어떻게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김진태선생의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를 읽고

 

 

시중에는 수많은 반야심경 해설서가 있다. 불교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반야심경 해설서를 읽어 보았을 것이다. 몇권 읽어 보았다. 그러나 초보자였을 때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오하고 난해해서 초심자는 알기 어렵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반야심경은 초심자용이 아니라 완성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반야심경은 주문과도 같다. 뜻도 모르고 외는 다라니 같은 것이다. 한문으로 된 것이 특히 그렇다. 한글로 번역된 것도 심오한 의미를 모르면 뜻도 모른 채 주문외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때에 바른 해설서가 나왔다. 김진태 선생의 역작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가 그것이다.

 

 

김진태선생과는 인연이 있다. 2007년 도심포교당에서 강연들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그때 당시 신도단체에서 김진태선생을 반야심경 강연자로 초청하여 한달에 한번 열 달 강연을 개최했다. 이를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김진태선생 강연은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그리고 유익하다. 재미도 있고 유익한 것이다. 2007년 강연도 그랬다. 사람을 웃겼다가 심각하게 했다가 하는 것이다.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심오한 의미를 여러가지 비유로 설명했다. 그때 이후 13년이 지난 현재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책을 읽어 보았다. 소설 읽듯이 읽는 책이 아니다. 책에 무게가 있어서일까 한장 한장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한줄한줄에도 심오한 의미가 있어서 되새기고 넘어 가야 한다. 책에 좀처럼 낙서를 하지 않는데 밑줄 치며 읽었다. 형광메모리펜을 활용하여 강조하기도 했다. 나중에 다시 보고자 할 때 활용하기 위함이다.

 

 

책은 두껍지 않다. 213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꽉 차 있는 것 같다. 군더더기가 없다. 꼭 필요한 말만 있다. 이런 점이 무미건조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소설 읽듯이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없다.

 

김진태선생의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는 기존 방식의 해설서와는 다르다. 반야심경 처음부터 끝까지 한구절 한구절에 대하여 초기불교적 시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어 보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사념처 등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중의 하나인 공사상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게 된다. 참고로 공과 공성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어떤 하나의 사물이라 해도 어떤 하나의 명칭이나 개념으로 묶을 수 없다. 그 무엇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그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기에 그 용도와 이름도 달라진다. 그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개념과 명칭을 부정하는 것이 슌야[, 없다, 없음]이고, 그러한 개별적인 것들의 부정을 통해 그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는 공통성-보편성의 한량없는 긍정적 상태가 슌야따[空性, 있음]이다. (김진태,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 53)

 

 

불교인들은 공에 대하여 잘 모른다. 공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 같다. 그만큼 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를 읽다 보면 공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특히 공과 공성에 대한 것이다.

 

공성에 대하여 개별적인 것들의 부정을 통해 그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책상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어떤 나무로 된 구조물에서 책을 보면 책상이 되고, 밥을 먹으면 밥상이 된다. 걸터 앉으면 의자가 되고, 누우면 침대가 된다. 추우면 땔감이 된다. 그래서 그 무엇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그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기에 그 용도와 이름이 달라진다.”(53)라고 했다. 이것을 공성이라고 했다.

 

공과 공성은 다른 것이다. 김진태선생은 반야심경에서 공과 공성을 구분하여 사용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본 반야심경을 참조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한역에서 생략된 것을 복원하여 산스크리트어본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도 그런 것중의 하나이다.

 

김진태선생은 조견오온개공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조견오온개공에 걸리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조견에서 일단 끝난다고 했다. 그래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연결되어서 끝남을 말한다. 조견과 오온개공을 분리해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진태선생이 말하는 조견(照見)관찰을 의미한다고 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위야왈로까야띠 스마(vyavalokayati sma)’라 하는데. 이는 확실하게 잘 가려서 객관적으로 관찰하셨다.’라는 뜻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띠빳타나 위빳사나수행을 말한다.

 

조견은 사띠를 기반으로 하는 위빳사나 수행이다. 이런 사실을 새롭게 밝혀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안타깝게도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위빳사나 수행의 전통이 끊어져 조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37)라고 했다.

 

조견이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다. 이렇게 조견에 대하여 오온에 대한 관찰로 보면 이후 전개되는 구절은 술술 풀려 나간다. 그래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으로 한구절이 끝나고, 이어서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된다. 이를 새롭게 해석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 照見, 五蘊皆空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께서는 심오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실천하시면서 세간[五蘊]을 확실하게 잘 가려서 객관적으로 관찰하시었다. 그리하여 오온이 있는데, 그것들이 실체가 공하다[없다]고 확실히 보시고서, 모든 괴로움의 재앙을 극복하신다.”(8)

 

 

김진태선생은 공과 공성에 대해서도 구분해서 설명했다. 한역에서는 모두 공으로 되어 있어서 난해하지만 공과 공성으로 구분하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구경법(paramatthadhamma)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과 같은 것이다.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법의 실재를 보고자 함이다. 이는 오온을 관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오온에서 법의 생멸현상을 관찰하면 실재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자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법은 공통적으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공상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조견은 오온을 잘 가려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관찰했을 때 실재하는 법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온개공이후 부터는 공성에 대한 것이다.

 

반야심경을 보면 공중(空中)”이라 되어 있다. 이는 공성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공성의 입장에서라고 해석한다. 이를 공의 입장에서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반야심경경문에서는 공성으로 모조리 부정해 버린다. 공성의 입장에서 보면 십이연기도 없고 사성제도 없는 것이 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실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집착하면 아집과 법집이 생긴다. 반야심경에서는 아집과 법집을 깨기 위하여 공과 공성으로 설명했다. 공성의 입장에서 사성제도 없다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사성제의 부정은 각 성스러운 진리들을 실체시하는 인식과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126)라고 했다.

 

김진태선생의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를 보면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들이 드러난다. 특히 공과 공성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래서 순야[]는 부정인 데 비해 순야따[空性]은 긍정이고, 순야가 과정이라면 순야따는 결과이다. 순야는 개별적인 것들의 부정이 진행되는 과정에 쓰이는 술어이고, 순야따는 개별적인 것들의 부정을 통해 이제 부정의 과정이 끝나고 그 결과로서 절대적인 긍정의 상태가 드러난 것을 말하고 있다.”(52)라고 했다.

 

김진태선생의 신간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는 획기적이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이처럼 새롭게 해설해 놓은 책을 아직까지 접하지 못했다. 한구절한구절 주옥 같은 내용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근거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전에 근거하여 한역에서 빠진 부분을 복원하여 해설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지금까지 수많은 반야심경 해설서가 나왔지만 앞으로 김진태선생의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가 표준이 될 것 같다. 책이 나오기까지 십년이상이 걸렸다. 2007년 처음 강연을 들었을 때 책을 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 이후 13년 만에 책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수행의 체험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김진태선생은 매년 겨울이 되면 미얀마에 가서 수행한다. 15년동안 두 달 가량 미얀마 선원에 머물면서 위빳사나와 사마타 수행을 해 왔다. 이제 그 결실이 한권의 책으로 나왔다. 불교전문서적 민족사에서 발간된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보아야 할 필독서라고 본다.

 

 

2020-10-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