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다산이 진짜 사랑했던 사람은? 정찬주 작가의 ‘다산의 사랑’을 읽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14. 12:16

 

다산이 진짜 사랑했던 사람은? 정찬주 작가의 ‘다산의 사랑’을 읽고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세세한 감정묘사가 곁들여 있고 지루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답답하기도 하고 또한 시간낭비인 것 같아서 그렇다. 이런 이유로 소설 읽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소설을 하나 읽었다. 그것도 밑줄 쳐가며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정찬주 작가의 다산의 사랑이 그것이다.

 

 

소설 다산의 사랑을 읽게 된 동기는 페이북에서 책소개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찬주 작가의 코멘트가 영향을 미쳤다.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격려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 작가의 책소개가 있어서 즉시 인터넷 구매를 했다.

 

강제적 백수가 되어

 

다산 정약용, 익숙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는 실학자로 배웠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다만 최근 고미숙선생의 유튜브 강연에서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비교설명한 것을 보고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고미숙선생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섬세한 참여파로 설명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관직으로 진출하려 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현실참여파라 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연암 박지원은 현실참여를 거부하여 호방한 낭만파라고 했다. 연암은 노론으로서 마음만 먹으면 관직에 나갈 수 있으나 스스로 거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둘 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백수로 삶을 산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자발적 백수가 되었으나 다산 정약용은 강제적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산이 귀양산 것을 강제적 백수로 본 것이다.

 

유튜브에서 본 고미숙선생은 백수예찬론자이다. 자신이 중년백수로 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는 백수가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백수가 되어 보아야 자기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중년에 백수가 되었고 지금도 반백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을 떠나면 사실상 백수나 다름없는 삶이다. 직장생활 20년 하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을 때 퇴출되었다. 사십대 중반 이후 백수로 삶을 산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강제백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글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문작가는 아니다. 누구나 클릭 몇 번 하면 만들 수 있는 블로그에 글을 쓴 것이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이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다산을 염두에 둔 것이다.

 

소설 다산의 사랑에 따르면 다산은 유배기간 18년동안 무려 260권의 책을 썼다. 전생에 걸쳐서는 5백권을 저술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실상 거의 매일 썼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산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썼을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선생은 이렇게라도 써 놓지 않으면 후대사람들이 자신을 역적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부분과 관련하여 소설에서는 다만 유일한 소원이 하나 있다면 자신의 생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뒷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고 사실대로 평했으면 하는 것이었다.”(266)라고 했다.

 

다산은 자신의 저술을 통해서 후대 심판 받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산이 많은 책을 쓰게 된 것은 백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질펀하게 묘사되어 있는 강진 토속어

 

소설을 통하여 다산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 다산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다산의 비가(悲歌)’라고 후기에서 표현했다. 다산에 대한 찬가는 많지만 숨겨진 이야기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다산 이야기보다는 주변 이야기가 더 흥미를 끈다. 무엇보다 강진 말에 대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강진 말투가 질펀하게 묘사되어 있다. 흔히 전라도 사투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어이다. 이런 강진 말투는 매우 익숙하다. 어머니도 비슷하게 썼기 때문이다. 함평 말투나 강진 말투나 비슷비슷 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강진 말투에 대하여 밑줄 그어 놓았다. 마치 토속어 사전을 보는 것 같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갖가지 말투가 있다. 이청이 홍임을 보고서 선상님을 닮아 또골또골허긴.”(17)이라고 말했다. 홍임은 다산이 유배지에서 소실의 몸에서 난 일곱 살 난 딸이다. 여기서또골또골하다는 말은 똑똑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소설은 마치 강진말잔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소승은 다랭이 논에 깨구락지멩키로 아굴아굴 소리 낼뿐이지라우.”(50)라는 표현이다. 매우 토속적인 말이다. 특히 개구리 우는 소리에 대하여 아굴아굴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작가는 후기에서 강진 촌로들은 아굴아굴운다고 말했다.”(325)라고 했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하여 강진을 십여년동안 다녔다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을 만나고 촌로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이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우연히 일본인이 쓴 책을 접하고 나서부터라고 했다. 다모쓰라는 사람이 1938년 강진의 노인을 만나서 기록으로 남긴 한토막 이야기를 모티브로 소설을 쓴 것이다. 그것은 선생님에게는 그 무렵(다산초당시절)에 한 사람의 부인이 동암에 있었는데 딸이 있었다.”(325)라는 구절이다. 작가는 이십년 가까이 현지를 오가며 발로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을 보면 향토색 짙은 토속어가 무수히 등장한다. “고런 씨알데기읎는 야그를 가지고 씨부리지 말랑께.”(74)라든가, “여유당 마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퉁개퉁개해지라우.”(117)라든가, “딜다보고 있으문 쌘찬헌 시지라우.”(152) 같은 말이다. 이 밖에도 무수한 강진말이 있다. 대충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타지방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마치 제주도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외국어처럼 들릴지 모른다.

 

강진말 중에 뜻을 알지 못하는 말도 있다. 그 말은 욕심이 읎그만요. 자떼바떼허문서도.”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자떼바떼는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았다. 인터넷 국어사전을 보니 상대의 요구에 쉽게 응하지 않고 재다.”의 뜻이다.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학래 아제가 지양스런지 산석이 아제가 무독스런지 잘 모르겄구만요.”(248)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지양스럽다라는 말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장난스럽다의 전라도 말이라고 한다. 무독스럽다는 국어사전에 무독하다로 나오는데, 이는 성품이 착하고 순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표준어로 다시 정리해 보면학래 아저씨는 장난스럽고 산석이 아저씨는 성품이 착하고 순한데 잘 모르겠습니다.”가 될 것이다.

 

책을 읽다가 익숙한 말도 발견했다. 그것은 잔등이라는 말이다. 소설에서는 쪼깐 더 걸어불자. 요 잔등만 넘어가면 초당인께.”(254)라는 구절이다. 함평 고향에 뒷잔등이 있다. 유년시절 뒷잔등에서 놀았다. 마을 뒤에 있는 야트막한 구릉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잔등은 산봉우리 또는 고개의 방언으로 나와 있다.

 

해찰이라는 말도 있다. 소설에서는 얼렁 올라와부러야, 해찰허지 말고.”(259)라고 표현되어 있다. 유년시절 시골에서 종종 듣던 말이다. 사전에서는 해찰하다에 대하여 어떤 일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이나 쓸데없는 짓을 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설 다산의 사랑을 보면 강진토속어 백과사전을 보는 것 같다. 일상에서 쓰는 토속어가 총망라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런 강진말에 대하여 작가는 후기에서 사전에 반드시 등재해야 할, 이른바 표준말보다 더 실감나므로 사라져서는 안될 강진말이라고 생각한다.”(325-326)라고 했다.

 

다산의 진짜 사랑은

 

소설의 제목은 다산의 사랑이다. 다산 정약용은 어떤 사랑을 했을까? 소설을 읽어 보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소실을 들인 것을 다산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남녀간의 사랑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사랑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정약용의 몸은 해묵은 매화 등걸처럼 까끌하고 차가웠지만 홍임 모의 작고 매끈한 몸은 금세뜨거워졌다.”(195)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다산의 사랑이라 하여 남녀의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산을 둘러 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과의 사랑도 사랑이라 할 것이다. 가장 먼저 홍임 모와 사랑이다. 이는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유배지에 난 딸 홍임이에 대한 사랑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본처 사랑도 사랑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본처가 유배지로 빛바랜 치마를 보낸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있고 제자에 대한 사랑도 있다. 그렇다면 다산의 진짜 사랑은 어떤 것일 것? 추측해보건데 수제자 황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소설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소설에서 마지막 장면은 다산의 죽음이다. 이때 그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수제자 황상이 나타난다. 다산이 늘 그리워하고 심지어 연모할 정도로 아끼던 제자가 수십년만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다산이 75세에 이르러 기력이 다 빠졌을 때 불쑥 나타난 것이다. 다산은 수제자를 보고 죽었다. 이렇게 본다면 다산의 사랑은 황상이 아니었을까?

 

마재마을이 있는 곳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 초까지에 사건에 대한 것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강진 다산초당과 남양주 마재이다. 두 장소는 무려 천리나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일까 강진과 남양주에는 다산유적지가 남아 있다.

 

마재는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검색해 보니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나온다. 능내리리면 정혜사가 있는 곳이다. 정혜사 주지 도현스님이 금요니까야 강독모임 멤버이어서 종종 정혜사에서 강독모임이 열리기도 한 곳이다. 더구나 강독모임이 끝나고 산책 나갔는데 마재마을도 지나갔다. 올해 6월에는 마재 마을 부근 정자에서 한가로운 오후 한때를 가족과 함께 보내기도 했다.

 

 

 

 

마재마을은 마치 만처럼 생긴 곳에 위치해 있다. 토끼섬이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그 정자가 있는 곳이 다산의 고향 마재마을 인 것은 이번에 소설을 보고서 알았다.

 

남양주 두물머리에 가면 다산공원이 있다. 종종 즐겨 찾는 곳이다. 수도권에서 이만한 경치가 없다. 특히 팔당대교를 건널 때 속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팔당대교 동쪽에는 협곡과 강이 있어서 인간을 벗어난 세계처럼 보인다. 소설에서는 두미협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서쪽을 바라보면 아파트단지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극과 극을 보는 것 같다.

 

다산공원이 있는 양수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곳 중의 하나이다.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이 즐겨찾는 국민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산공원으로만 알고 있을 뿐 다산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다만 다산이 태어난 곳, 다산이 말년을 보낸 곳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소설을 보니 양수리, 수종사 등 다산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 새롭게 인식된다.

 

풍광 좋은 이곳에서

 

강진은 다산이 18년 유배생활 중에 머물렀던 곳이다. 소설에서는 강진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다산초당은 물론 구강포 앞바다, 만덕산, 백련사 등 여러지명이 나온다. 여러 지명 중에서 가 본 곳은 백련사이다.

 

 

2009년 작은 법회 모임에서 일박이일 순례 갔었을 때 최종적으로 들른 곳이 백련사였다. 그때 당시 대흥사, 일지암, 백련사를 주마간산격으로 둘러 보았다. 그리고 부처님 도량에 노닐면서, 대흥사 일지암에서 초의선사의 흔적’(2009-06-03)이라는 기록을 블로그에 남겼다.

 

블로그에서 백련사에 대한 기록을 보았다. 블로그에 사찰주변은 온통 동백이고 남도에서만 자라는 나무가 대부분이다. 남도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백련사에 있으면 바다도 보인다. 이에 대하여 문만 열면 강진만이 보이는 풍광 좋은 이곳에서 오랫 동안 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라고 또 써 놓았다. 백련사와 동백, 그리고 강진만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쓴 것이다. 그러나 주마간산격이라 다산초당은 있는 줄도 몰랐다.

 

 

이번에 소설을 보니 다산초당이 주무대임을 알 수 있다. 한반도 가 보지 않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어서 분위기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을 내서 강진 백련사에 가면 꼭 한번 가보아야 겠다.

 

하나의 글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최근 들어 처음으로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았다. 그것도 밑줄 치고 읽었다. 하루 이틀에 읽은 것이 아니라 여러 날에 걸쳐서 조금씩 읽었다. 사람이름과 지명을 익히면서 읽은 것이다. 이는 작가에 대한 예의이다.

 

글을 하나 쓰는데 온갖 노력이 들어간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미리 품어 두어야 한다. 충분히 품었을 때 써야 한다. 그리고 줄거리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 하나의 글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물며 소설은 어떠할까?

 

소설 다산의 사랑을 읽고서 작가의 혼이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방어 또는 사투리라 불리우는 강진말을 소설속에 표현해 놓았는데 이는 각고의 노력에 따른 산물이라 보여 진다. 무엇보다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었다. 이를 작가는 비가(悲歌)라고 했다.

 

사람들은 다산에 대하여 실학자로 알고 있다. 또한 배교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다산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산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유배생활중에 무려 260권의 책을 썼다는 것이다. 이는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블로거에게는 매우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다산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2020-1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