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죽음 앞에 당당히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21. 17:51

 

죽음 앞에 당당히

 

 

고요한 사무실에 앉아 있다. 토요일 오후 아무 일이 없다. 누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화한통 걸려 오지 않는다. 할 일 없이 유튜브를 보다가 중단했다. 유튜브에는 유익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무익한 것들이다. 팔정도 정어로 본다면 잡담에 해당된다. 봄으로 인하여 번뇌만 야기하는 것들이다.

 

 

유적(幽寂)이라는 말을 새로 알았다. 페이스북에서 본 것이다. 정적과는 다른 말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그윽한 고요라는 뜻이다. 도시에서 일인사무실이 고요하다고는 말하지만 그윽하지는 않다. 차 지나가는 소리와 종종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외부와 차단되어 있어서 마치 암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독송용이나 사경용으로

 

시간이 날 때 가만 있으면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뭐라도 하나 해야 한다. 책을 읽든가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유튜브나 보거나 쓸데 없이 돌아 다니면 시간낭비하는 것 같아 아까운 생각이 든다.

 

책을 읽었다. 김진태 선생이 지은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를 계속 읽었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소설 읽듯이 읽을 수 없다. 한줄 읽고 사유하고 또 한줄 읽고 사유하다 보니 천천히 읽게 된다. 한번 읽으면 고작 이삼페이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 이상 읽으면 잊어버리면서 진도만 나가게 된다.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잘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라며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 이제까지 십년 이상 초기불교와 관련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했는데 이처럼 정리가 잘 된 책을 보지 못했다. 이는 용어정리와 개념정리가 잘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독송용이나 사경용으로 좋을 것 같다고.

 

반야심경 해설서라 하여 대승불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철저하게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쓴 책이다. 또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쓴 책이다. 실제로 책의 저자 김진태 선생은 오랫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해 왔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미얀마로 건너가서 수행한 것이다. 그런 세월이 20년이 넘는다.

 

이번에 읽은 것은 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반야심경에 팔정도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팔정도에 대하여 비중있게 다루었다. 대체 반야심경과 팔정도가 무슨관계가 있을까? 추적해 보니 무고집멸도와 관련이 있다. 사성제를 설명하면서 도성제와 관련하여 팔정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풀어 놓은 것이다.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팔정도 정견에 대하여 바른 견해라고 한다. 경전을 근거로 한다면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 된다. 그런데 김진태 선생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정견에 대하여 세속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으로 구분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해 놓았다.

 

 

세간적 정견은 원인이 되는 집성제와 그 결과가 되는 고성제에 대한 정견으로서 업과 과보의 진리에 따르는 것에 대한 바른 견해이다.

 

출세간적 정견은 원인이 되는 도성제와 그 결과가 되는 멸성제에 대한 정견으로서 업력에 의한 인과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되어 윤회를 멈추게 하는 해탈의 방법에 대한 지견이다.”(반야심경의 바른 이해, 145)

 

 

상윳따니까야 길의 모음분별의 경’(S45.8)이 있다. 일명 팔정도경이라고도 한다. 정견과 관련된 것을 보면 사성제에 대하여 아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출세간적 정견에 대한 것이다.

 

출세간이 있다면 세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해 아는 것이 세간적 정견임을 말한다.

 

세간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에 대하여 구분하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8)라고 했다. 그리고 출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는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 (M117.9)라고 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간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는 번뇌에 대한 것이다. 번뇌가 있는 것이라면 세간적 정견이고, 번뇌가 없는 것이라면 출세간적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진태 선생은 세간적 정견에 대하여 고성제와 집성제로 설명했고, 출세간적 정견은 멸성제와 도성제로 설명했다. 이런 설명방식은 매우 탁월하다. 아직까지 이런 구분법으로 된 설명을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이다.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견은 세간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에서 어떤 것이 해당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에서 어떤 것이 해당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김진태 선생의 책을 보면 세간적 정견은 고성제와 집성제에 대한 것이고, 출세간적 정견은 멸성제와 도성제에 대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구분해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책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성제의 윤회의 국면에 대한 이해에 해당되는 세간적 정견은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정신적 향상을 관장하는 인과법칙으로서 높은 세계 또는 낮은 세계의 중생으로 태어나는 원리 및 세속적 고락에 관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 번뇌가 남아 있지만 업과 과보에 대한 바른 이해로 해서 복덕과 좋은 과보를 가져다주는 것이 세간의 정견이다.

 

이에 비해 사성제의 해탈의 국면에 대한 지견(知見)에 해당되는 출세간적 정견은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데 필수적인 원칙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중생들이 해탈하는 데 필수적인 원칙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중생들이 삶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신적 향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궁극적인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출세간의 정견은 번뇌가 없는 성인(聖人)의 도()와 결합되어 있는 지혜이다.”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 146-147)

 

 

세간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에 대하여 이것 이상 설명이 필요 있을까? 세간적 정견은 육도윤회하는 삶에 적용되는 것이고, 출세간적 정견은 도와 과를 이루어 열반에 드는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세간적 정견은 세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출세간적 정견은 출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속불자들에게도 진리의 말씀을

 

부처님은 출가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 세속에 사는 재가불자들에게도 진리의 말씀을 알려 주었다. 네 가지 괴로움의 진리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세간적 삶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번뇌가 있는 삶에 대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세간적 정견 또는 세간적 진리는 업에 대한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고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2)

 

 

사람마다 생긴 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지 부모부터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생긴 모습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업생(業生)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과거 전생에 지은 행위의 과보를 받아 이 모양 이꼴로 생겨 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업이 뭇삶들(衆生)을 차별하고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이다.

 

세간적 정견없이 도만 닦았을 때

 

부처님이 만약 멸성제와 도성제만 설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세속에서 사는 재가불자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수행자가 고성제와 집성제를 이해하는 것 없이 도만 닦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본 글이 하나 있다. 이강옥 선생이 능행스님 수필집을 소개한 글에서 본 것이다. 오로지 화두수행만 하던 재가불자(보살)가 폐암 말기를 선고를 받았다. 재가불자는 죽음의 두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20년이 넘도록 시민선방에서 참선을 했는데 죽음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 어떻게 해야 하고, 참선하다 죽으면 그 다음 단계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순간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막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재가불자는 시민선방에서 20년동안 참선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이 닥쳤을 때 몹시 당혹해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 이후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깨달으면 생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 앞에 닥치면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당혹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엇이든지 모르면 답답하다. 마치 깜깜한 길을 걷는 것 같다. 깜깜한 곳에서 갑자기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대낮에 걸으면 그런 일은 없다. 모든 것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깜깜한 방에서는 뭐가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전등을 켜면 한순간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모르면 두렵고 무섭고 답답하다. 그러나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잘 모른다. 주변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지만 죽은 자를 보기 힘들다. 자신의 부모 돌아 가셨을 때 볼 뿐 타인의 죽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또한 죽음을 회피한다. 나와 무관한 것으로 애써 피하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단어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능행스님의 책에 따르면 갖가지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죽음에 저항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모두 죽고 만다. 그런데 수행처에서도 죽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도를 깨닫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은 죽음 이후에 대한 가르침을 설했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은 오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살생과 관련해서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륙에 전념하고 뭇삶에 대하여 자비심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의 결과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M135.5)라고 했다. 살생업을 지으면 악처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악행을 하면 악과보를 받는 것이다. 선행을 하면 선과보를 받을 것이다.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 그것은 죽음 이후를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악행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평생 십악행을 지은 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곳에 태어날지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전에 고통스럽게 느껴질 악한 행위를 했거나 나중에 고통스럽게 느껴질 악한 행위를 했거나 죽을 때에 잘못된 견해를 갖거나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M136.22)라고 했다. 이는 죽음의 순간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이 떠 올랐을 때 그 것을 대상으로 재생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악처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불교에서 잘못된 견해(邪見)는 사성제가 아닌 것을 말한다. 연기법이 아닌 것이 잘못된 견해이다.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를 말한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가 대표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면 잘못된 견해라 볼 수 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업과 업의 과보의 엄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불선업을 짓게 된다. 그 결과는 악처이다. 죽음 직전에 자신의 행위를 보고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9)라고 했다. 마치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임종순간에 자신이 태어날 곳을 보는 것이다.

 

죽음이 축복이 될 때

 

일생 선업을 지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죽음은 축복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현명한 자가 의자 위에 올라 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 쉬거나 할 때에 그가 과거에 행한 착한 행위, 즉 신체적 선행, 언어적 선행, 정신적 선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39)라고 했다. 임종순간에 자신의 선업공덕이 도 할 것이다.

 

부처님은 보시와 지계공덕을 강조했다. 그러면 하늘나라, 즉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음 이후를 말한 것이다. 육도윤회하며 세간에 사는 재가불자들에게 선업공덕을 많이 지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그래서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고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더 한층 환호한다.”(Dhp.18)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보시공덕, 지계공덕을 지었다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못되어도 귀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수행공덕을 지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참선수행을 한 재가불자가 죽음의 두려움에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깨달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 죽음 이후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일까 능행스님은 말기암 환자 등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에게 정토신앙과 아미타 염불수행을 하게 한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이 축복이 되는 것이다.

 

차제설법으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사성제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단계가 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차제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했다.

 

부처님은 처음 가르침을 접하는 사람에게는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른바 시계생천(施戒生天)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다 높은 단계의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과 타락과 오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사성제는 크게 고성제와 집성제가 한 그룹이고, 멸성제와 도성제가 한그룹이다. 전자는 세간적 정견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출세간적 정견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세간적 정견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태 선생은 먼저 세간적 정견을 얻고서 나아가 점차적으로 출세간적 정견을 체득해 가는 것이다.”(147)라고 했다.

 

어쩌면 고전이 될 수도

 

주말 토요일 오후에 글을 하나 썼더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후 2시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6시 가까이 되었으므로 4시간 가량 집중한 것이다. 쓸데없이 유튜브를 보거나 집에서 TV를 보는 것 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김진태 선생의 책이 정리가 잘 되었음을 다시한번 알게 되었다. 또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모두 해소되는 것 같다. 물론 아직 수행이 뒷받침된 것은 아니지만 개념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책을 보면 어느 구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반야심경을 대승불교의 정수라 하는데, 김진태선생의 책을 보면 불교교학의 정수를 보는 것 같다. 더구나 수행까지 곁들이고 있어서 수행지침서로도 활용할 수 있다. 어쩌면 고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20-11-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