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여성대표의 완고함을 보며
아무래도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말한다. 이번에 정의당 심상정대표의 발언을 보고서 또한번 편견을 갖게 되었다. 이미 손절을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작년 가을 서초동에서 여의도에서 검찰개혁을 외쳤다. 조국 개인에 대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검찰개혁이 절실함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법이 통과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이어서 연이어 관련법이 통과되었다.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진보를 표방하는 정의당의 벼랑끝전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총선에서 표를 몰아줄 수밖에 없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헛점이 생겼다. 잘못하면 모든 것이 무산될 판이다. 그런데 원인제공자가 또다시 몰아달라고 협박아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법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 알게 되었다. 안전정치를 해야 했으나 정의당의 과욕이 화를 불렀다. 정부여당은 소수당에게 끌려 다녔다. 소수당이 협조를 하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자 혐오가 일어났다. 진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전에는 반신반의했으나 이제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심상정대표의 탄핵발언을 보고서 손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는 다 그런 것일까?
진보의 가치는 무엇일까? 당명이 말하듯이 ‘정의’가 가장 큰 가치일 것이다. 이밖에도 오리지널 가치라 볼 수 있는 ‘평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의나 평등이라는 말에 집착을 하면 이념의 노예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지면 독선적이 된다. 그런 모습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여성대표에게서 보았다.
정치인은 정치인다워야 한다. 대화의 타협의 기술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정치에는 여가 있고 야가 있다.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에 의해서 풀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협상의 결과물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차선(次善)’이다.
정치인이 최선(最善)을 추구하면 꽉 막히게 된다. 마치 정치인이 종교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정치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이해관계가 얽힌 인간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에서나 있을 법한 최선을 추구한다면 올스톱될 것이다. 그런 모습을 종교적 이념에 투철한 야당대표로부터 보았다. 그 결과 국회는 파행되고 긴장과 갈등은 고조되고 나라는 분열이 되었다. 종교인이 정치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일 것이다.
진보정당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남북이 대결하고 있는 척박한 현실에서 노조에 기반한 진보정당이 탄생했을 때 기대반우려반이었다. 그때 당시 권영길은 대선에서 희망섞인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앞으로 한세대가 지나면 민조노동당이 집권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거꾸로 가는 것이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귀족화 된 대기업 노조는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이 빨간조끼를 입고 거리를 행진할 때 불편하게 생각한다.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자영업자들이 살기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이를 대변해 주는 것은 오히려 집권 여당인 것 같다. 진보정당에서는 오히려 가진 자들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인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진보정당 여성대표 입에서는 탄핵이야기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의당에서 남성대표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어떤 이는 “노회찬이 살아 있었으면.”이라고 아쉬움을 표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 작용한다. 여성이 대표가 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원칙주의를 말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누구나 원칙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성리더에게서 원칙주의가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편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 예로 마가렛 대처수상이다. 80년대 영국에서 총리를 십년 지냈던 여성지도자를 말한다.
영화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 2014)’이 있다. 영화에서는 대처에 대하여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성지도자의 불통에 대한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 여성대통령을 떠 오르게 만든다.
대처는 10년 집권기간동안 오만과 독선에 가득 차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더 이상 차기 총리선거에 나올 수 없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처의 원칙주의는 우리나라 여성대통령의 원칙주의와 오버랩되었다. 그래서 2017년 촛불이 일어나기 전인 3월에 ‘경청할 줄 모르는 리더’(http://blog.daum.net/bolee591/16157645)라는 제목으로 글을 블로그에 올린 바 있다.
이번에 심상정 대표의 행태를 보고서 영국의 여성총리와 한국의 여성대통령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원칙주의이다. 원칙을 세워 놓고 원칙에 올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원칙이지 사실상 고집이다. 그것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완고함이다. 이런 모습을 여성리더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이것도 편견일까?
사람들은 여성이 리더가 되었을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여성이 원칙주의자가 되었을 때 매우 완고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성이 큰 소리로 강력하게 무언가를 주장할 때는 여성의 남성적 측면이 분명히 밖에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게 나타날 수도 있다. 아주 부드러운 여자가 어느 순간 토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불가침의 고집을 부리고 일보의 양보하지 않을 때가 그러한 경우이다.”(아니마와 아니무스, 111쪽)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는 남성성이 있다고 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남성속의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고, 여성속의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여성이 리더가 되었을 때 남성적인 카리스마가 엿보인다. 여장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여성속의 남성성이 발현된 것이다. 영국의 대처수상이 좋은 예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여성리더들은 어느 한순간에 돌변해 버릴 수 있다. 그것은 본래 여성성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로고스적 성향이 있고 여성에게는 에로스적 성향이 있는데, 여성이 갑자기 돌변하여 완고한 모습을 보였을 때 감성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여성은 부드러운 이미지이다.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이미지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견해가 달랐을 때 부드러운 이미지의 여성이 한순간에 매우 완고한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더 이상 협상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협상은 대화와 타협을 기반으로 하여 차선책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정치도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종교적 최선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정당 여성대표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이것도 여성에 대한 편견에 해당되는 것일까?
진보정당에서 추구하는 정의, 평등 등의 도덕적 가치는 존중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리당략적 모략에 따른 것이라면 더 이상 진보정당으로서 존립 가치가 없다. 더구나 그것이 벼랑끝전술에서 얻어 낸 것이고, 또 다시 벼랑끝전술을 구사하여 또 얻어 내려고 한다면 더 이상 진보정당이라고 볼 수 없다. 큰 정당을 이용하여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생정당이라고밖에 없다.
한 여성 대표로부터 자만을 보았다. 일류대를 나오고 노동운동을 한 성골귀족 같은 모습이다. 우월적 자만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D33)라고 했다. 자만은 우월, 동등, 열등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놀랍게도 열등도 자만에 속하는 것이다.
자만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지만 세 분 하면 아홉 가지 자만이 있다. 이를 구만(九慢)이라고 한다. 그런 구만 중에 ‘우월중의 우월’이 있다는 것이다. 예로 든다면 계행을 지키고 두타행을 하는 수행자가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이를 우월중의 우월이라고 한다. 아홉 가지 자만 중에서 최상층에 속하는 것이다.
여성대표에게서 우월중의 우월적 자만을 본다. 일류대를 나오고 운동권출신에다가 노동을 운동을 하고 진보정당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자만은 교만, 아만과 동의어이다. 일종의 프라이드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진보운동에 있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는 자만중의 자만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벼랑끝전술이라는 것이다. 진보는 본래 양면성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여성리더의 완고함이다.
여성리더가 원칙을 고수했을 때 모든 것이 스톱되어 버린다. 요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다. 그것은 윈칙이 아니다. 차라리 우월중의 우월이라는 자만에 기반한 고집에 가깝다.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완고함 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여성에 대한 편견일까?
2020-03-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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