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열사의 승의적 초월의 길
오월의 노래가 있다. 오월이라 하여 화창하고 낭만적인 오월이 아니다. 피로 물들은 오월이다. 복학하고 나서 84년부터 들었던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피! 피!”라는 노래이다.
오월의 노래 가사를 보면 섬찟하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라는 가사를 보면 꽃잎과 피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광주사람들은 장미꽃이 필 때쯤 붉은꽃을 보면 피가 생각난다고 한다. 80년 오월 그날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후속가사를 보면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라 하여 더욱 자극적이다. 84년 당시 학원자율화시기에 학생들은 이런 가사의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불렀다.
오월의 노래 가사중에는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라는 가사도 있다. 트럭에 싣고 어디로 갔을까? 후속가사를 보면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라고 되어 있다. 시신을 트럭에 싣고서 망월동 공동묘지 한켠에 암매장한 것이다. 김동수열사도 암매장 당했다. 5월 27일 도청을 사수하다가 M16소총 실탄에 네 발 맞아서 망월동에 암매장된 것이다.
광주행 전세버스에 몸을 싣고
또다시 오월이 찾아왔다. 올해도 광주에 내려 가려 가고자 했다. 작년에 이어서 두 번째이다. 작년 김동수열사 추모제에 참석했다. 39주년 행사에 처음 갔었다. 대불련에서 주관한 행사이다.
올해는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시에 김동수열사가 사망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서울에서 전세버스가 출발했는데 몸만 실은 것이다. 대불련출신이 아님에도 가 보아야할 것 같았다.
김동수열사에 대한 글을 몇 편 썼다. 사회친구를 통해서 들은 것이다. 김동수열사와 같은 학과 동기로부터 들었다. 그로부터 광주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특히 김동수열사의 최후가 궁금했다. 그 친구가 한 이야기하고 매스컴에 불교계신문에 보도된 내용과 달랐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작년 방문으로 인하여 의문은 깨끗이 해소 되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한 결과 김동수열사는 도청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노래가사처럼 트럭에 실려서 망월동에 암매장 된 것이다. 그친구 말대로 시위도중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신의 기억이 잘못일수도 있음을 시인했다.
김동수열사는 시위도중 죽은 것이 아니라 죽기위해 도청에 들어간 것이다. 스스로 죽기위해 도청사수라는 결사항전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점이 또다시 광주행 전세버스를 타는 계기가 되었다.
5월 24일 이른 아침 양재역에 내렸다. 조계사에서 출발하는 전세버스가 양재역에서 사람들을 한번 더 태우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작년에 버스에 탔었던 사람들이다. 어느 분이 인사를 했다. 글 잘 읽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오래 전부터 봤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다고 한다. 종종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블로그에서는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필명으로만 소통한다.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글에 인용된 경전문구와 일치되는 삶은 아니다. 단지 경전이나 주석을 알리는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관심을 갖는 것은 경전문구와 동일시해서일 것이다.
경전을 읽었다고 해서 경전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했다고 하여 경전문구 그 자체일 수 없다. 그럼에도 관심 갖는 것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라는 호기심이 때문일 것이다.
탑승하니 반가운 얼굴이 여럿 보였다. 그 중에 같은 79학번인 허태곤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옆자리에 앉았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일정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게 된다. 광주까지 먼 거리도 대화를 하다 보면 지루한 줄 모른다. 이런저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옆좌석에 앉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기소개 시간에
양재역에서 오전 7시 반에 출발했다. 망월동에는 10시 45분경에 도착했다. 3시간 15분만에 온 것이다. 차가 중간 정도 지날 때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탑승자는 25명이 안되었다.
자기소개할 때는 반드시 학번을 말했다. 대불련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수가 중요한 것이다. 가장 높은 기수는 72학번이고 가장 낮은 기수는 19학번이다. 학번은 말하지만 출신학교는 말하지 않는다. 대불련이라는 동문의식이 학교보다 더 앞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십여명 중에는 김동수열사와 인연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동수열사와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던 동기도 있고 선배도 있었다. 이들로 부터 김동수열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김동수열사와 조선대 78학번 동기이자 이번 추모사업회 부회장인 이남 샘이 있다. 이 샘은 이렇게 추모제가 해마다 확대되는 것에 대하여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옛날에는 열사의 무덤에 가기 위해서는 전투치루듯 했다고 한다.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참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갈 수 있다. 더구나 공식적인 추모행사까지 열리고 있다. 그래서 “김동수열사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 했다.
김동수열사 보다 한해 선배인 77학번 이충길 샘이 있다. 조선대 불교학생회 선배인데 초대 김동수열사추모 사무국장을 했다. 이 샘은 놀랍게도 30대 초반인 1992년에 김동수 열사 추모비 설립을 주도했다. 그때 당시 현대산업개발 대리였는데 낮은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5천만원 모금활동을 하여 조선대 교정에 여법한 추모비를 건립한 것이다.
이 샘의 추모비 건립은 눈물겨운 것이다. 동문 선배와 후배를 찾아 다니며 한푼두푼 모금한 것이다. 자신도 월급의 두 배에 해당되는 금액을 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이 2,700만원가량이라고 했다.
김동수열사 추모비는 92년도에 설립되었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대 교정에는 추모비가 우뚝 서 있다. 작년 39주년 추모제는 추모비 앞에서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추모비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번 이충길 샘 증언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추모비를 설립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의식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죽은 자의 숭고한 뜻을 알리기 위해 산 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에 탑승한 대불련사람들 중에는 나이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19학번 김지화군은 5.18에 대하여 교과서에서만 배웠다고 했다. 자식뻘 되는 학생의 말을 들으니 5.18은 아득하게 먼 이야기로 들린다. 마치 부모세대가 6.25이야기를 했을 때 삼국시대때나 있었던 아득한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5.18은 마치 나의 일처럼 생생한 것이다.
이번 탑승객 중에는 김동수열사의 유가족도 탔다. 김동수열사의 여동생인 김효순 샘이다. 김샘은 남편과 딸과 함께 탑승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탑승한 것이다. 탑승자들에서 선물로 이미우이 음악씨디를 나누어 주었다.
망월동 국립5.18묘지로
버스는 곧바로 망월동 국립5.18묘지로 갔다. 도착하니 10시 45분가량 되었다. 이날 행사를 위하여 미리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광주에 사는 사람들과 멀리 부산 등 전국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모두 백명가량 되었다. 그 중에는 조선대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도 있고 놀랍게도 조선대 총장도 참석했다. 백양사 지선스님과 증심사 주지스님 등 스님들도 참석했다. 입장할 때 모두 다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발열검사를 했다.
5.18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기념탑 앞으로 갔다. 일동 묵념을 하고 난 다음 묘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본 묘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김동수열사 무덤 앞에 하나의 묘가 있는데 생년을 보니 69년생이다. 11살 때 죽은 것이다. 초등학생의 나이인데 어떤 이유로 죽었을까? 영정사진도 없이 꽃무늬만 실려 있다.
5.18국립묘지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다.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민초들의 무덤이다. 죽음에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구경하다 맞아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시위하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버스에 타고 있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김동수열사는 그런 죽음과는 다르다. 스스로 죽고자 도청에 들어 갔기 때문이다. 같은 죽음이라도 죽음의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세월이 한참 흘렀어도 잊지 않고 찾아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하얀 소복을 입은 노인이 있다. 김동수열사의 생모이다. 나이가 팔십은 넘은 것 같다. 작고 왜소해 보인다. 40년전에 자식을 먼저 보냈을 때 오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전국에서 열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열사의 무덤에 꽃 한송이를 올려 놓았다.
5.18구묘지에서 추모제가
사람들은 구묘역으로 향했다. 구묘역은 서쪽으로 산길 하나만 넘으면 있다. 산길을 올라가니 공동묘지가 나왔다. 성역화된 신묘역과는 확연히 다르게 평범한 공동묘지에 지나지 않는다. 오월의 노래에서 “망월동에 부릅뜬 눈”이라는 가사에 실려 있는 것처럼 바로 그 망월동묘역이다. 80년대 흔히 말하던 ‘망월동묘지’인 것이다.
망월동묘지를 이제는 ‘5.18구묘지’라고 한다. 안내판을 보니 “가족들이나 친지들은 항쟁의 와중에서 공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와서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분들은 청소차에 실어다 묻었습니다.”라고 써 있다.
김동수열사는 도청 함락 때 총알 네 발을 맞아 처참하게 죽었다. 그리고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나중에 열사와 연고가 있는 59학번 이순규 샘 등이 시신을 수습했다.
이순기 샘에 따르면 시신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백방으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은 망월동 가매장된 곳이라고 했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단주와 대불련 뺏지, 리고 수강신청서 용지 등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가매장된 장소인 5.18구묘지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가 열릴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추모제가 진행될수록 비는 세차게 내렸다. 다행히도 두 동의 텐트가 쳐져 있었다. 이날 추모제는 대불련 사람들이 주도했다. 세 달 전부터 준비한 것이라고 했다. 추모제는 식순에 따라 시종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참석한 내빈 중에는 지선스님과 조선대 민병돈 총장이 참석해서 빛이 났다. 조선대출신 민주당 국회의원 윤영덕의원도 참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종단에서 공식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다.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되었다. 대통령도 참석하는가 하면 야당대표도 참석하고 있다. 더구나 5.18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는 김동수열사의 추모제에 공식적으로 아직까지 한번도 참여한 바 없다. 이날 참석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함으로써 공식행사를 시작했다.
지선스님의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지선스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스님은 김동수열사가 평소에 자주 말 했다는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같소?”에 대하여 말 했다. 스님은 이 말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했다.
스님은 열사가 말한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같소?”에 대하여 지금에 와서야 의미가 와 닿는다고 했다. 그래서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으로 풀이했다.
불변응만변은 무슨 뜻일까? 스님에 따르면 이 말은 호치민이 즐겨 쓰던 말이라고 했다. 절대 불변하고 부동인 그것이 있는데 실체는 없다고 한다. 공(空)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불변응만변은 “변하지 않으면서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라고 해석했다.
불변응만변이라는 말은 상근기 수행자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이는“허공과 같이 불변하면서 날씨처럼 능소능대하고 응변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스님은 물세살의 나이에 이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했다. 그래서 “불보살의 화현이 아니고서야 나오기 어려운 말입니다.”라고 했다.
지선스님은 꽤 길게 이야기했다. 그 중에서도 박종철열사 49재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 당시 조계사에서 봉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보살들이 빨갱이라며 법당을 내주지 않아 바깥에서 치루었다고 한다. 더구나 최루탄을 쏘아 대는 바람에 기절했다고 한다. 지금 그때 일을 회상하며 “나는 6월 항쟁 때 죽었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했을까? 그것은 민주화를 탄압하던 세력들이 마음껏 민주주의를 향유하며 예전에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5.18을 폭도로 모는 사람들도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전부 내려놓고 양심 하나만 가져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양심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설치는 것에 대하여 지선스님은 몹시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은 늘 즐거운 시간
점심시간이 되었다. 주최측에서는 도시락을 준비했다. 채식도시락을 선택했다. 반찬가지수가 많아서 먹을만 했다. 정평불회원이기도 한 이희선 샘과 권정화 샘과 함께 먹었다. 비가 세차게 내려서 천막 안에서 먹었다. 옹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은 늘 즐거운 시간이다.
5.18에는 두 가지 정신이 있는데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 5.18자유공원으로 향했다. 상무대 영창이 있던 곳이다.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잡혀 갔는데 그곳이 상무대 영창인 것이다.
상무대 영창자리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5.18과 관련된 투어코스 중의 하나로 되어 있어서 단체관람객들이 찾는 곳이다. 먼저 본관에 있는 전시실로 향했다.
전시실에 가면 전문해설사가 있다. 마치 사찰순례가면 관광지화된 사찰에서 문화재해설사처럼 그때 일어났던 일을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해설사에 따르면 5.18에는 두 가지 정신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민주’이고 또 하나는 ‘대동세상’이라고 했다.
민주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대동세상은 낯 설다. 그러나 5.18당시 시민들은 이미 대동세상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도 은행이나 금은방이 털리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했기 때문에 극히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판화가 있다. 대동세상이라는 판화이다.
판화를 보면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사진으로도 확인된다. 해방된 광주에서는 시민들의 고도의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함께 어우려져 사는 대동세상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우리들 이름은 폭도였습니다.”
5.18자유공원의 하일라이트는 영창투어하는 것이다. 영창은 본래 위치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해설자는 그때 당시 영창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이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것이 이채롭다. 그때와 상황이 180도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해설사는 이곳 영창에서 겪은 고초에 대하여 얘기했다. 반원형으로 되어 있는 영창은 6개의 방이 있는데 한방에는 많게는 150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누워서 잠도 잘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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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에서는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말을 안들으면 독방에 가두었는데 무려 20명이나 들어 갔다고 한다. 더구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폭도로 몰고 갔는데 이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짜 맞추기 위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설사는 그때 당시를 화상하며 “우리들 이름은 폭도였습니다.”라고 했다.
원형대로 복원된 영창은 부채살 모양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감시자가 않을 수 있는 반원형 책상이 있다. 거기에 있는 목재는 40년전 그때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이름이 있다고 했다. 박춘배 중사라고 했다. 가혹하게 다루어서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해설사는 51.8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단순하게 설명했다. 김대중내란음모가 아니라 자발적인 사건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공수부대가 과잉진압한 것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발발한 것이라고 했다. 시민과 학생을 잡아서 마구 때리는 것을 목격한 노인이 있었는데, 노인이 이를 보고 참다못해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말린 노인마져 두드려 패는 것을 보고서 전시민이 들고 일어선 것이라고 했다.
해설사는 자신들이 폭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내란음모에 가담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과잉진압을 해서 자위권 차원에서 무장을 한 것이라고 했다. 앞에서 이유도 없이 죽도록 맞는 것을 보고서 참을 수 없어서 봉기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정의일지 모른다. 정의라는 것이 책에서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서 참지 못하여 일어서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정의는 구호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삶에 있다.
빼앗긴 것을 되찾아 오기 위하여
작년에 이어 올해도 추모제에 참석했다. 작년의 경우에는 일종의 호기심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참여함으로 인하여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도청사수의 의미에 대한 것이 컸다.
만일 그때 도청을 사수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후 민주화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군부독재정권의 압제하에서 꼼짝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도청으로 들어 갔기에 찾아올 수 있었다. 빼앗긴 것을 찾아온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도청에 들어 가지 않았다면 찾아올 것도 없었을 것이다. 도청에 들어가면 죽을 것을 뻔히 알고서도 들어 간 것은 나중에 찾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김동수열사이다.
도청에서 결사항전이 있었기에 6.10항쟁이 있었고, 더 멀리는 2016년 광화문촛불이 있었다. 사람들은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도청에 죽으러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도청을 반드시 되찾아오고 말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과 산 자들은 그날을 잊지 않았다. 때로 항쟁으로 나타났고, 때로 표출되었다. 민주주의가 위기가 빠졌을 때는 촛불을 들었다.
사람들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 광주를 잊지 않은 것이다. 특히 도청을 사수한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2016년 광화문촛불이 대표적인 예이다.
만일 광화문촛불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폭도로 내몰렸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개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광주를 잊지 않은 사람들, 광주에 대하여 부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빼앗긴 것을 되찾아 오고자 했다. 그래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이 횃불이 되어서 마침내 빼앗던 것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
김동수열사는 그날 도청에 들어갔다. 자신이 죽으면 엄마가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들어간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보살정신으로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다. 보살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전생에 보살로 살았다. 무려 사아승지십만겁동안 십바라밀을 닦은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닦은 바라밀은 어떤 것일까?
바라밀행을 뜻하는 빠라미(pāramī)에 대하여 ‘초월의 길’이라고 번역한다. 왜 초월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현실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초월의 길이 있다. 일반적 초월의 길(dasapāramī), 우월적 초월의 길(dasa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보시를 해도 가장 귀중한 것을 보시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이다.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 우월적 초월의 길은 무엇일까? 이는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라고 한다. 가장 수승한 승의적 초월의 길은 무엇일까? 이는 목숨을 보시하는 것이다. 최상의 바라밀은 자신의 목숨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목숨처럼 귀중한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을 줄 수 있어도 목숨만은 줄 수 없다. 자신의 신체 일부나 장기 등을 줄 수 있어도 목숨만은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목숨마저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수승한 초월의 길이 있다. 이를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이라고 한다. 김동수 열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도청에 들어가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들어간 것이다. 이는 승의적 초월의 길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광주행 전세버스에 몸을 실은 이유
전쟁광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한번은 죽을 목숨이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말한다. 평화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이다.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말라.”라고 말한다. 누구를 위한 목숨인가? 전쟁광들의 이익을 위한 목숨이라면 헛된 것이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목숨이라면 보살행이 된다.
보살행은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꼭 쥐고 있을 때 목숨은 내것이어서 목숨을 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본다면 오온이 내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기꺼이 승의적 초월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김동수열사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올해도 광주행 전세버스에 몸을 실은 이유이다.
김동수열사는 짧고 굵게 살았다. 스물세살에 죽었지만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2020-05-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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