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장미보다 감꽃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2. 10:11

 

장미보다 감꽃

 

 

오랜만에 학의천을 걸었다. 차를 쓰지 않는 날에는 버스타고 일터에 갈 수도 있지만 이런 날에는 일부러 걸어 가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었다. 6월이 되었으니 이제 여름이 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기는 하지만 낮에는 30도에 육박하여 초여름 날씨를 보이고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상쾌한 아침이다. 이제 생태하천으로 변한지 오래 된 학의천에는 운동하는 사람들과 일터에 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길을 가다 멈추었다. 학의천과 안양천이 만나는 곳인 쌍개울에는 쉼터가 있다. 쉼터에 앉았다. 때로 멈출 필요가 있다. 급히 앞만 보고 달려 가다가 그대로 멈추어 보는 것이다. 좀 늦으면 어떤가. 큰 일 나지 않는다. 멈추어서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고 있다.

 

쉼터 앞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동화약품자리에는 지금 대형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이른바 아파트형공장으로 불리우는 복합빌딩이다. 이름하여 ‘동서아이에스비즈니스타워’라고 한다.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주변 아파트단지에서는 대형현수막을 걸어 놓고 성토하고 있다. 그러거나말거나 공사는 진척되고 있다. 몇 개월 후에는 또 하나의 스카이라인을 보게 될 것 같다.

 

 

급히 가던 길을 멈추고 쉼터에서 스마트폰 자판을 치고 있다. 일인사업자에게 일터에 빨리가도 그만 늦게 가도 그만이다. 이 아침에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장미원에 갔었던 것을 쓰고 싶었다.

 

해마다 매년 이맘때쯤 장미원을 찾는다. 서울대공원 장미원에서는 5월 네 째 주부터 장미원축제가 열렸기 때문이다. 십여년전부터 빠짐없이 갔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올해는 장미원축제가 없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방은 해 놓았다.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꽃은 피고진다. 장미원에도 이름 모를 갖가지 종류의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예년 보다 반도 안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장미를 볼 때 마다 늘 드는 생각은 ‘요염하다’라는 것이다.

 

 

장미는 왜 요염할까? 아름답고 화려한 자태가 보는 이로 하여금 눈길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유혹을 넘어 매혹적이다. 더구나 한두구루도 아니고 밭이다.

 

장미밭에는 갖가지 장미가 피여 있다. 이종교배한 장미를 보면 컬러풀 하다. 여러개의 색깔이 혼합되어 있는 장미를 보면 캉캉댄스를 추는 무희가 떠올려지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검붉은 장미를 보면 빨간루즈를 진하게 칠한 요염한 여자를 보는 것 같다. 장미원에 있다보면 장미에 눈길을 빼앗겨 마음이 들뜨는 것 같다.

 

아마 십년전인 것 같다. 그때 당시 장미원에서 장미축제가 열렸는데 화려했다. 백러시아라 불리우는 벨라루스 미녀들로 이루어진 국제민속무용단이 전세계의 화려한 댄스를 선보였다. 이를 모두 블로그에 후기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번에 본 장미원은 마치 폭격 맞은 것 같다. 공사중에 있고 축제 분위기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썰렁하다. 제행무상이라 하는데 이곳되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장미원에 가면 장미만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십년 이상 매년 다니다 보니 어느 곳에 어느 나무가 있는지 알게 된다. 만약 장미원에 장미만 있다면 식상하게 된다. 장미원에는 작약밭도 있고 이 밖에도 크고 작은 꽃밭이 있다. 크고 화려한 꽃잎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꽃도 있는 것이다. 마치 ‘화장세계’와도 같다.

 

 

세상에는 갖가지 꽃이 있다. 장미나 백합과 같이 크고 화려한 꽃이 있는가 하면 작고 소박한 들꽃도 있다. 꽃이 핀다는 것은 절정이다. 한 개체가 활짝 핀 것이다. 활짝 핀 꽃 그 자체가 개체의 완성인 것이다. 그래서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런 꽃들은 모두 대지를 모태로 한다. 크고 작은 모든 잡꽃들로 이루어진 화장세계이다. 마치 모든 땔감의 불꽃이 같은 것과 같다.

 

 

불은 땔감을 필요로 한다. 땔감은 다양하다. 그런데 전단향과 같은 고급목재에서 타 오르는 불꽃과 소똥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땔감이든지 불꽃의 형태, 빛깔, 광채에 있어서는 동일함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도와 과를 이루는데 있어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불가촉천민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 깨달음에 있어서 계급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승속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땔감의 불꽃이 똑같듯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면 진정한 부처님 제자가 된다.

 

이맘때쯤 장미원에 가면 늘 찾는 곳이 있다. 화려한 장미보다도 소박한 감나무꽃이다. 장미원 후원 깊숙한 곳에는 여러구루의 감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까지 오지 않는다. 자리를 펴고 음식을 먹으며 느긋하게 있는 곳이다.

 

 

감나무꽃은 피었는지 안피었는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커다란 잎속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감꽃은 너무 작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기가 쉽지 않다. 피었다가 금방 지기 때문에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감꽃을 보지 않고 지나친다면 서운하다. 그래서 일부로 감꽃나무를 찾아 갔다.

 

지금은 감꽃철이다. 그런데 잘 보아야 보인다는 것이다. 꼭꼭 숨어서 피기 때문에 피었는 줄조차 모른다. 이렇게 감꽃에 집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유년시절 시골에 살때 감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비바람이 몰아친 다음날 아침 마당에 노란 감꽃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이후 감꽃에 대한 추억이 생겼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일부로 감꽃나무를 찾아 간다. 숨어 있는 작고 노란 감꽃을 확인하고서야 올해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친 것같은 생각이 든다.

 

감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유년시절 추억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꽃보다 열매’라는 것이다. 이는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장미와 비교된다.

 

 

“어떤 꽃은 찬란하고 아름답고

향기도 없듯,

말이 잘 설해져도 실천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Dhp.51)

 

 

바이블에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감꽃이 그런 것 같다. 잎에 가려 있는지조차 모를 작디 작은 꽃이 열매를 맺으면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이다. 반면 장미는 시작은 화려 하지만 끝은 별볼일 없다. 열매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작고 보잘것 없다.

 

장미와 감꽃은 매우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장미의 화려한 자태에 매혹당하지만 감꽃은 있는 줄조차 모른다. 그러나 결실의 계절이 되면 반전된다. 가을날 가지마다 찢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를 보면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화려한 장미보다는 감꽃이 더 좋은 이유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꽃이 피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크고 화려한 꽃이든 작고 소박한 꽃이든 꽃이 피었다는 것은 절정을 뜻한다. 인생도 절정이 있을 것이다. 청춘남녀가 결혼하는 것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꽃처럼 아름답다. 마치 활짝 핀 꽃을 보는 것 같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결혼을 하면 아기를 낳게 된다.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마치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꽃보다 열매이다. 화려한 꽃보다 튼실한 열매가 더 좋다. 장미보다 감꽃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더러워진 마음을 닦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행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격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수행은 단지 화려한 꽃을 보는 것과 같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도를 닦아서 과를 맺는다고 말한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수행을 하면 결실이 있어야 한다.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아서 과를 맺는다고 말한다.

 

 

수행은 화려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골방에서 숨어서 하는 것이다. 마치 감꽃이 잎에 가려 숨어서 피는 것과 같다. 꽃은 화려하지만 열매는 별 볼일 없는 장미와 다른 것이다.

 

해마다 장미원에 간다. 장미원에 가면 크고, 화려하고, 요염한 자태의 매혹적인 장미만 보는 것이 아니다. 감꽃을 보러 간다. 숨어 있는 듯이 피는 작고 노란 감꽃을 보러 간다. 장미보다 감꽃이다. 꽃보다 열매이다.

 

감꽃을 보면 수행자와 닮았다. 감꽃은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피지만 열매는 크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수행자는 도를 닦아서 과를 맺는다. 수행을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꽃은 찬란하고 아름답고

향기도 있듯,

말이 잘 설해지고 실천이 있으면,

열매도 있다.”(Dhp.52)

 

 

2020-06-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