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언어는 폭력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30. 09:41

 

언어는 폭력이다

 

 

캄캄한 새벽이다. 시간을 보니 새벽 네 시이다. 구름이 끼였는지 캄캄한 새벽이다. 도시 아파트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산속처럼 적막하다. 가끔 대로에 질주하는 차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아무래도 전기장판 때문인 것 같다.

 

오월은 아파트 난방을 하지 않는다. 유독 추위을 타는 몸이다. 아파트 난방을 하지 않는 오월에 한기를 느낀다. 잠을 자다깨다 반복하다보면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 이럴 때 전기장판이 필요하다. 낮은 온도로 세팅해 놓으니 등짝이 따스하다. 온돌에 있는 것 같다. 새벽에 몸과 마음이 편한 이유가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새벽이 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벽만 같아라.”라는 말이 떠올려 진다. 등은 따습고 몸과 마음은 편안해서 지금 이 상태를 즐긴다. 흙탕물이 가라앉은 것처럼 마음도 착 가라앉아 있다. 생각이 흘러간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좋은 생각이 떠 오를 때가 있다. 잡아야 한다. 기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한순간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이후 마음이 일어나면 잊혀 진다. 이럴 때 메모해야 한다. 글로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내것이 되는 것이다.

 

 

어제 전재성회장의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있었다. 오늘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있어서인지 스님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한달 밀렸다. 제때에 열리지 못하고 한달연기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된 것이다. 만일 크리스마스라면 어땠을까?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한달연기하여 치루는 것은 불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스님들은 행사준비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올 사람들은 온다. 열성적 참여파들이다.

 

“언어는 폭력이다.” 이말은 어제 강독모임에서 들은 말이다. 언어가 왜 폭력일까? 언어는 잘라 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사진 것이라고 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한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사진은 수많은 인과 중에서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달랑 사진 한장만 남은 것이다. 과연 사진은 현상을 올바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과 연에 따른 한순간을 포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사진이라면 한순간만 따 온 것이다. 사진속의 인물이 지금 그 사람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10년 전의 사진이라면 더욱더 멀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사진 속의 인물을 보고서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폭력이다. 그때 조건과 지금의 조건이 다름에도 동일시하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진은 폭력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매순간 변하다. 몸도 변한다. 마음은 더 빨리 변한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열반을 제외하고 하나도 없다.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변함에도 한순간을 포착하여 증거로 들이내민다면 폭력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 현상을 보고서 ‘있다’라고 말 했을 때 언어로 한정짓는 것이 된다. 마치 순간을 사진 찍는 것과 같다. 거두절미하고 한부분만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있기까지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있다. 그럼에도 한순간만을 포착하여 대표성을 부여한다면 폭력이라는 것이다. 변화하는 현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에도 그것도 앞뒤 자르고 재단하여 하나의 명칭으로 만들었을 때 본질과 멀어질 수 있다.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이다. 무엇보다 구호가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폭력적이다.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앞뒤 자르고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누고 나누어서 남은 것이 구호이다. 그래서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거두절미하고 ‘있다’라고 했을 때 영원히 있는 것이 된다.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은 것임에도 그 순간만 포착하여 단지 ‘있다’라고 했을 때 영원히 있는 것이 된다. 영원주의가 그렇다. ‘없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한부분만 커팅하여 ‘없다’라고 했을 때 영원히 없는 것이 된다. 허무주의가 그렇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를 주장한다면 이는 언어폭력에 해당된다. 언어로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또 부분을 보고서 전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외도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라고 말한다.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구호는 폭력적이다. 불완전한 언어로 현상을 설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론이 나왔을 것이다. 사구분별에 따른 회의론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고, 이것이 아닌 것이기도 하고 저것이 아닌 것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사구분별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회의론은 고도로 철학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현상학’ 같은 것이라고 했다. 현상학의 특징은 판단유보에 있다. 머리 속에서 흘러 가는 생각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망상이 일어나도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을 유보했을 때 순수한 상태가 된다고 했다. 현실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영감이 떠오를지 모른다. 이처런 판단중지 상태를 ‘에포케(epoche)’라고 했다. 모든 예술의 원천상태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언젠가 불교방송에서 J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님은 음악방송을 진행하면서 귀신에 대해 얘기했다. 스님은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있는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없습니다.”라고 말 했다.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이다. 이 말을 듣고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요리조리 잘 피해 갈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귀신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아닌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산자야 벨랏티뿟따의 회의론과 유사하다. 결론을 내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가는 말인 것이다.

 

회의론에 대해 뱀장어 비유를 한다. 회의론을 뜻하는 ‘아마라비케빠바다(amarāvikkhepavāda)’라는 용어는 뱀장어를 잡듯 혼란스러운 이론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가?

 

회의론자들은 형이상학적 사구분별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당신이 저 세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만약 저 세상이 있다고 내가 생각하면 저 세상이 있다고 나는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러하다고도 생각하지도 않으며 다르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니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아닌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설명된다.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의 교단으로 들어 가기 전에 앗사지 존자가 경행하는 모습을 보았다. 탁발 중에 눈을 아래로 하여 한발한발 알아차림 하여 걷는 위의에 반했다. 이에 스승은 누군지 물어보았다. 새내기 수행승에 지나지 않았던 앗사지 존자는 스승에게 들은 대로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는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리뿟따존자는 화들짝 놀랐다. 사리뿟따 존자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곧바로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 사리뿟따는 회의론자였다. 그런데 조건에 따른 짧은 생멸이야기는 너무나 명료하고 너무나 명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오로지 이것만이라고 하여도 오히려 올바른 가르침이니, 그대들은 이미 근심 없는 진리를 꿰뚫었으니, 지난 수천억 우주기 중에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Vin.I.40)라고 앗사지 존자에게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새내기의 한마디 말에 감응되어서 회의론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산자야를 떠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희망의 메세지나 다름없었다. 절대적으로 ‘있다’라는 영원주의나 절대적으로 ‘없다’라는 는 허무주의는 숨막히는 이론이다. 이는 다름 아닌 언어폭력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변화를 말한 것이다. 숨통이 트이는 말이다. 모든 것을 회의적 시각에서 보던 회의론자에게도 부처님의 변화에 대한 가르침은 희망의 메세지였다. 모를 뿐이라며 판단중지로 일관했는데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의 최고 철학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자신을 따르는 이백오십명의 사람들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 회의론자이다. 판단을 유보하며 교묘하게 피해 가는 것이다. 또 “오직 모를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회의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판단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명확하다. 조건발생하여 소멸한다는 가르침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이야기했지만 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절대유’의 영원주의와 ‘절대무’허무주의도 그렇다. 이는 언어폭력이다. 그렇다고 회의론자들처럼 판단을 유보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부처님만이 사실을 이야기했다.”라고 한다.

 

부처님은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는 말과 같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서양철학자 중에 비트겐슈타인이 부처님과 가장 유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빠빤짜(papañca)가 될 것이다. 마치 빵 터지듯이 말이 부풀려 지는 것이다. 이를 희론 또는 망상이라고 한다.

 

외도들이 한 말은 모두 망상이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회의론 등 언어적으로 한정된 말은 망상이고 희론이다. 동시에 폭력이다. 이 세상 모든 언어는 폭력이다. 잘라 버리고 하나만 취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호가 그렇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정의, 민주를 부르짖으면 폭력이 된다. 이런 말은 삶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말로만 떠들었을 때 폭력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한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 페이스북에서 굵은 글씨로 고함 치듯 써 놓은 것도 폭력적 요소가 있다. 조선일보가 거두절미하고 따옴표 처리하여 프레임에 가두는 것도 언어폭력이다.

 

한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순간포착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과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과거 조건과 현재 조건이 다름에도 과거에 찍은 사진을 들이대민다면 폭력이다. 말로서 전달하는 것도 폭력이다. 아무리 말로 잘 전달한다고 해도 왜곡이 있다. 그리고 견해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있다’라든가, ‘없다’라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언어폭력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면 언어폭력이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기도 하고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있는 한, 현상세계가 있고, 현상세계가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역이 있습니다.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현상계가 소멸하고 현상계가 그칩니다.”(A4.174)

 

 

2020-05-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