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6월 12일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32번째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제목의 경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보장의 경’(A4.182)이 이에 해당된다.
경에서는 네 가지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늙음, 병듦, 죽음, 그리고 업보에 대한 것이다. 생노병사 사고 중에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업보가 하나 더 추가되어서 네 가지 불능이 된다. 경에서는 “이와 같은 네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A4.182)라고 했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기도하면 들어줄 것 같았다. 순수한 마음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나의 힘으로 도저히 안되는 것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기도하면 틀림없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아마 순수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한다면 소원을 성취할지 모른다. 그래서 기도는 간절히 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찾는다. 관세음보살을 찾는 이도 있다.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면 틀림없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들어줄지 모른다. 그러나 반신반의한다면 기도발이 없을 것이다.
기도를 하면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있고 들어줄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본다. 건강, 사업, 입시 같은 기도를 말한다.
사람의 몸은 항상성이 있어서 몸에 탈이 나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다. 기도를 하건 하지 않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이다. 죽을 것처럼 고통스런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이를 기도를 해서 나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업이나 학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들은 문제도 아니다. 기도를 하건 하지 않건 해결되는문제이다. 진짜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경에서 언급된 늙음, 병듦, 죽음, 그리고 업보, 이렇게 네 가지가 대표적이다.
네 가지는 하느님도 들어주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서 하느님은 빠알리어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것이다. 브라흐마는 고대인도 브라만교에서 창조주와 같은 역할이다. 그래서 빠알리사전을 보면 ‘the Creator’라고 했다. 한자어사전을 보면 ‘造物主’라고 했다.
브라흐마는 오늘날 한국에서 유일신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브르흐마에 대하여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D1.39)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브라흐마를 우리 고유의 말인 ‘하느님’을 사용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에서 사용된 ‘범천(梵天)’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노병사와 업보에 대해서는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누가 간절하게 절박하게 기도해도 노, 병, 사, 업보에 대해서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이는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과 같다.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안전은 나에게 맡겨야 한다. 나만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노, 병, 사와 업보가 그렇다.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병듦, 늙음, 죽음, 업보이다. 병들지 마련인 것에 대하여 병들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늙음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업보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번뇌를 수반하고 재생을 가져오고 공포를 유발하고 고통을 낳고 미래의 태어남, 늙음, 죽음을 초래하는 그러한 악한 업들에 대해서 그 과보가 생겨나지 말라’고 어떠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결코 어떠한 보장도 하지 못한다.”(A4.182)
경에서는 사고 중에 노, 병, 사가 언급되어 있다. 생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업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업보에 대한 내용을 보면 사실상 생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업보에 의해서 재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 노, 병, 사는 누구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병들기 마련이고 늙기 마련이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도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를 하여 업을 만드는 한 그 업에 대한 과보로 태어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네 가지불능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업보는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불공을 해도 악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과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말은 들어가 있지 않다. 그 대신 “어떠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신이건 악마이건 하느님이건 세상의 그 누구라도”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업보를 바꿀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사면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권위자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장에 따르면 정신 착란자나 너무 애통해 하는 자는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 죄를 지은 자가 있다. 큰 죄를 지었어도 벌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고 작은 죄를 지었어도 벌을 받는 사람이 있다.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일까? 유전무죄무전유죄일까? 부처님의 소금의 비유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에 ‘소금의 비유’가 있다. 소금덩이를 대야에 넣으면 짠맛이 남아 있지만 강에 던지면 짠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 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M3.99)라고 했다. 이는 그릇의 문제이다.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릇이 크면 죄가 사해질 수 있다. 마치 소금덩이가 큰 그릇에서 물에 희석되어서 짠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중죄를 저지르고도 풀려 나는 것은 그릇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릇이 작은 자가 있다. 작은 죄를 짓고서도 잡혀 들어 가는 것은 그릇이 작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그릇에 소금덩이를 물에 풀어 놓은 것과 같다.
소금덩이의 비유에 따르면 그릇을 키워야 한다. 과거에 저지를 죄에 대한 과보를 면하려거든 그릇을 엄청나게 크게 키우면 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많이 하는 것이다. 꾸살라(善業)가 아꾸살라(不善業)를 압도했을 때 악한 업은 표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악업이 과보로 익었을 때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말이 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한말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땅을 짚고 일어날 때 부처님이 일으켜 주지 않는다. 혼자서 일어난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땅은 어떤 의미일까?
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불가능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땅에서 넘어졌다는 것은 노, 병, 사, 업보에서 어찌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 살아 있는 존재에게 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다. 병들기 마련이고, 늙기 마련이고, 죽기 마련이고, 과보를 받기 마련이다. 어느 것 하나 나의 통제권 안에 있는 것은 없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전지전능하다는 하느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병들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업보도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일 것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고 했다. 땅은 어찌 할 수 없는 불가능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바닥으로 추락하고 바닥이 되기 때문이다. 병들고 늙고 죽는 것과 업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땅에 추락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또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다. 마치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네겐트로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또 다시 고꾸라지고 만다. 그래서 바닥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누구도 구원해 주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 밖에 답이 없다. 불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불사가 되면 불생이 된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이때 짚은 땅은 다름아닌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래서 전재성회장은 “불가능속에 들어가서 탄탄한 땅을 확보합니다.”라고 말했다.
2020-06-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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