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권위와 정통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유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날이다. 평소보다 일찍 출발했다. 요즘은 차를 몰고 간다. 안양에서 고양까지는 50키로가 넘는 먼 거리이다. 전철과 지하철, 버스 등을 이용하여 서울을 관통해서 가다 보면 진이 빠질 정도이다. 더구나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는 더 힘들다. 이런 이유로 차를 갖고 다닌다. 서울외과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가면 1시간 반만에 도착할 수 있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서 해야 할 것이 있다. 자리를 정리하고 책을 깔아 놓고 차를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 더 할 것이 있어서 평소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것은 청소하는 것이다. 이날은 쓰레기 버리는 것만 했다.
자따까에 대하여
일찍 도착하면 여유가 있다.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난 다음 전재성회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다. 자따까는 이제 삼분의 일 이상 번역되었다고 한다. 약 560여개가량 되는 경인데 230여경을 번역한 것이다. 데바닷따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깨달음을 사칭하는 못된 승려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고 한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원본 그대로 완역된 것은 없다. 경과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석을 번역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다.
미얀마에서는 자따까는 국민경전이라고 한다. 앞으로 자따까가 출간된다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못지 않은 국민경전이 될 것 같다. 이런 자따까는 부처님 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생에 대하여 잘 믿지 않는 것 같다. 불자들도 반신반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전생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인과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나의 몸과 나의 성향은 어떤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괴로움은 어떤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사성제에서 고성제가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상적인 순서라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집성제를 먼저 설해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거꾸로 괴로움에 대하여 먼저 설했다. 이는 원인 보다는 결과를 먼저 설명한 것이다. 결과를 보고서 원인을 따져 나가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은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과 마음을 있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렇게 인과관계를 따져 가다 보면 전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과관계를 확장하고 확장하다보면 인과에 생과 생에도 인과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부처님은 수행의 힘으로 인과를 무한히 확장하여 무수한 전생을 본 최초의 사람이라고 했다. 인과의 끝을 본 사람은 부처님밖에 없다고 했다. 자따까는 부처님의 전생과 관련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하여
전재성회장과 얘기하고 있는 도중에 장계영선생이 도착했다. 마침 책상에 융과 관련된 책이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도착되지 않았고 시간은 남아 있었다. 장계영선생과 전재성회장이 융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융은 불교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교와 관련된 저술도 많다고 했다.
융 심리학은 어떤 것일까? 무의식의 의식화, 이것은 융의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핵심이다. 정신세계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융에 따르면 무의식은 마음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마음의 어두운 면이기도 한 무의식은 평소에는 알 수 없다.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튀어나오게 된다. 숨기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때로 의식에 영향을 준다.
무의식은 꿈속에서 발현된다. 꿈에서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융의 분석심리학을 보면 주로 꿈의 해석에 대한 것이다. 꿈은 무의식의 문과도 같다. 마치 지하계단을 내려가서 은폐하고 싶었던 나의 그림자와 마주치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통해서 매일 무의식과 만나고 있다.
무의식은 평소에는 알 수 없다. 경계에 부딪치거나 꿈에서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깜짝 놀라게 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것,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의 그림자를 접하게 되었을 때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면의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림자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이에 대하여 융은 ‘의식화’라고 했다.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의 그림자를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무의식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무의식이 의식화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에 대하여 융은 ‘자기계발’이라고 했다. 융이 말하는 자기(self)는 자아(ego)와는 다른 것이다. 자아는 의식된 것을 말하지만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통합하면 점점 자기에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융의 분석심리학을 보면 불교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융은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자기라는 개념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본다. 완성을 향해 가는 수행자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크게 깨우친 자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음의 오염원을 하나씩 소멸해 나가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잠재성향을 완전히 뿌리 뽑았을 때 완전한 청정에 이른다. 그런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한다. 마음의 오염원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그림자가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융이 말하는 자기와 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은 같은 개념이 된다.
무의식은 개인무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융에 따르면 집단무의식도 있다. 하나의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와 사상 등을 말한다. 귀신같은 것이다. 한국귀신이 다르고 서양귀신이 다른 것은 집단무의식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인류공통적인 집단무의식도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무의식은 신화 등으로 나타난다. 니까야를 접하면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접하는 것 같다.
니까야를 읽다보면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보물창고를 접하는 것 같다.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인식의 지평 저 너머에 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 주는 것 같다. 마치 심연에 있는 진주와 같은 보물을 접하는 것 같다.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서 진귀한 꽃을 보는 것 같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감탄하게 된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 이런 가르침도 있었네!”라며 탄식하게 된다. 그 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이 억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도 생각하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인류문명의 보고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동안 꼭꼭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 같다. 이미 수천년전부터 전승되어 왔고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런 니까야를 오늘날 접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더구나 니까야 번역자와 함께 독송하는 것은 더욱 더 큰 행운이다. 그런 기쁨을 6월 12일 니까야 금요강독모임에서 맛보았다.
네 가지 위대한 정통성
코로나19 때문일까 많이 모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와야 할 사람이 오면 다 오는 것 같다. 스님이 오면 다 오는 것 같다. 도현스님은 멀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출발하여 수없이 탈 것을 갈아타고 서울을 관통하여 도착했다. 홍광순, 장계영, 홍승봉, 이상길, 유경민 선생 등 늘 보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6월 12일 강독모임에서는 평소와 달리 여러 개의 경을 합송했다. 앙굿따라니까야를 한권으로 가려뽑은 ‘생활속의 명상수행’ 31번 경에서부터 34번 경까지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이 네 개의 경에 대한 후기를 모두 작성할 예정이다. 먼저 31번 경 ‘법문에 정통성이 있는가를 가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정통성이라는 말이 있다. 바른 계통이라는 말이다.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있어서도 정통성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네 가지로 설명했다.
누군가 부처님에게 직접 들었다며 법과 율에 대하여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승가에서 들었다면, 많은 장로들에게서 들었다면, 또는 한분의 장로에게서 들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하라고 했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A4.180)
앙굿따라니까야 ‘위대한 정통성의 경1’(A4.180)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일단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말한 것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법(Dhamma)과 율(Vinaya)에 대조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당부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부처님은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123)라고 했기 때문이다.
스승이 없을 때는 법과 율이 스승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이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4)라고 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스승으로 할 만한 사람이 없을 때는 경전이 스승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설령 스승이 있어서 스승이 한 말이라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된다. 이는 깔라마의 경에서도 확인된다. 경에 따르면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스승이 한 말이라도 곧이 곧대로 믿기 보다는 유보적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다. 스승이 말한 것에 대하여 법과 율에 일치하는 것인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맞으면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물리치라고 했다.
스승의 권위와 정통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법사라고 한다. 유명한 법사가 말했다고 하여 전부 믿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반신반의하라는 것은 아니다. 판단을 유보하라는 것이다. 법과 율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법과 율에 어긋나면 물리치면 된다. 이렇게 법과 율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위대한 정통성이 유지된다고 했다.
위대한 정통성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마하빠데사(mahāpades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mahā’와 ‘apadesa’의 복합어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큰 권위’로 번역했다. 주석에 따르면, 마하빠데사라는 말은 “부처님 등의 위대하고 위대한 분들의 권위(증명)로 하여 설해진 큰 행위들”(DA.ii.565)이라고 했다.
권위는 권위를 부린다고 권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불교에서 그렇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장로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여 반드시 권위가 있고 정통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권위있는 장로라고 해도 법과 율에 어긋난다면 권위도 없고 정통성도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모든 권위와 정통성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누군가 법문을 할 때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든가,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나 한다면 권위가 서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야 권위가 선다. 그리고 정통성을 확보한다.
부처님에 의한 권위, 승가에 의한 권위, 장로들에 의한 권위, 한 장로에 의한 권위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네 가지 권위도 법과 율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그 권위와 정통성이 인정된다. 담마(法)와 위나야(律), 즉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해야 권위와 정통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2020-06-13
담마다사 이병욱
'금요니까야모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혹독한 질병에 걸렸을 때 (0) | 2020.06.18 |
---|---|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0) | 2020.06.14 |
언어는 폭력이다 (0) | 2020.05.30 |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 마하자야망갈라가타 (0) | 2020.05.18 |
코로나철에 맛본 담마의 진수 (0) | 2020.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