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혹독한 질병에 걸렸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18. 13:52

 

혹독한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은 코로나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한다. 마치 예수탄생시점을 전후하여 AC와 BC로 나누는 것과 같다. 가장 실감하는 것은 여행이다. 해외여행은 이제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언제 끝날까? 방송에서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으면 기약이 없다. 올가을에는 한번 더 대유행할 것이라고 한다. 백신이 개발되기 전에는 자유로운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전국민의 60프로 이상 항체가 생기지 않는한 안심할 수 없다. 코로나19를 잡았다고 할지라도 더 센 놈이 나타난다면 해외여행은 영원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여행의 종말’이라는 표현을 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이후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갔는데 그들이 여행의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그런 시절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19만 끝나면 밖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실망스런 말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그동안 사람들은 흥청망청 살았던 것 같다. 툭하면 해외로 나갔기 때문이다. 명절 때가 되면 인천공항에는 사상최대의 인파가 몰렸다고 보도되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특히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즐겼다.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풍요로운 계층은 거의 철마다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나가 보지 못했다. 일년에 한번은 해외성지순례 발원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시간내기가 가장 힘들었다. 일인사업자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후유증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납기가 생명이다. 고객의 요구에 대응하지 못했을 때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서 이곳저곳 다녀왔다.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 있다. 실크로드에 간 것이다. 2013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불교교양대학 도반들과 스님과 함께 갔다. 숫자가 적어서 일반 패키지팀과 합류했다. 약 2주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돈황에서 부터 선선, 하미, 투르판을 거쳐서 우루무치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무엇보다 메마르고 건조한 자연이 인상적이었다. 풀한포기 나지 않는 삭막한 사막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불교가 한때 있었다. 지금은 이슬람 세계로 바뀌었지만 서역에는 불교가 있었다.

 

서역순례에서 불교흔적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다. 투르판 근교에 있는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에서 흔적을 보았다. 분명히 불상을 보았다. 감실에 있는 불상이다. 그러나 머리가 잘려 있었다. 이곳에서 한때나마 불교가 번성했던 것이다.

 

고창고성에서는 현장스님이 고창국왕 국문태에게 법문 했던 곳을 보았다. 일설에 따르면 국문태국왕은 현장스님이 법상에 올라 갈 수 있도록 등받이 역할를 했다고 한다. 현장스님이 국왕의 등을 밟고 올라가 설법한 것이다. 국왕이 현장스님을 지극히 공경했음을 알 수 있다. 교하고성은 당나라시절 안서도호부가 설치 되었던 곳이다. 그곳에서도 불교가 있었다. 교하고성에서 대탑과 대불의 흔적을 보았다. 제행무상이라고 한다. 한때 번성했던 불교는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 있었다. 이런 소감을 블로그에 기록했다. 사진과 동영상을 곁들여 가능한 자세하게 써 놓았다.

 

실크로드여행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말을 들어 보니 세계 각국 안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 다녀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가이드에 따르면 실크로드는 여행의 종착지라고 했다. 중국, 동남아, 유럽 등 유명관광지를 다 돌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실크로드라고 했다. 오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정이 길고 힘든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기업 부사장으로 정년퇴임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항공마일리지가 엄청났다. 현직에 있을 때 거의 반은 외국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정년이 되어서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자신이 스스로 작성한‘버킷리스트’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기전에 가 보야야 할 곳이 60군데가량 되었다. 그래서일까 매철마다 나간다고 했다. 버킷리스트대로 한다면 1년에 최소 4번하여 20년 걸릴 것이다.

 

부부팀이 한쌍 있었다. 남자는 교수로 정년퇴임 했고, 여자는 교사로 정년퇴임 했다. 두 사람의 매월 연금을 계산하면 상류층 사람들이다. 이 부부팀 역시 해외여행을 즐겼다. 안 가 본 데가 없다고 했다. 매철마다 트렁크를 챙긴다고 했다. 아파도 나간다는 것이다. 여자는 실크로드 여행을 앞두고 감기에 걸렸는데 링겔을 맞았다고 했다.

 

흔히 말하길 여행은 여건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가야 한다고 했다. 무릎 관절이 허용되는 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먹어 움직일 수 없을 때는 가고 싶어도 못가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자유화 조치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나갔다. 돈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다. 특히 여자들이 많았다. 여행지에 가면 대부분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직장이나 일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 언젠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남자들은 불쌍하다.”라고.

 

여행지에서 또 이런 얘기를 들었다. 진수성찬을 대할 때 가족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사성급 호텔에 머물며 진귀한 음식을 먹고 최상의 서비스를 받았을 때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족여행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제 이런 좋은 시절도 갔다는 것이다. 코로나팬데믹으로 인하여 밖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은 밖에 나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과연 바램대로 될 수 있을까?

 

코로나팬데믹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마치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과 같다. 재난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즐기며 살던 자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난의 세월이 될 것이다. 철마다 밖에 나가야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하는데 나가지 못하니 스트레스가 쌓여 폭발할 지경인지 모른다. 사성급 호텔과 황제식, 그리고 이국적 풍광과 문화를 즐기는 삶을 살았는데 하루 아침에 단절된 것이다. 마치 천상락을 누리다가 하층세계로 추락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제까지 즐기는 삶만 살아온 자들이 있다. 건강할 때, 젊을 때 최대한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늙고 병들면 즐길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다가 죽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말 질병이 찾아왔다면 어떤 심정일까?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들에게 있어서 질병은 어떤 것일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죽음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날 질병이 찾아오고 죽음이 찾아 올 것이다.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은 당혹해할 것이다. 그리고 절망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바라문이여, 어떤 자가 죽기마련이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전율합니까?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망을 떠나지 못하고,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고뇌를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했는데, 그가 혹독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혹독한 질병에 걸리자 그에게 이와같이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 오릅니다. 그러면 그는 슬퍼하고 상심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짓고 혼란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러한 자가 죽기마련인 자이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전율하는 자입니다.”(A4.184)

 

 

앙굿따라니까야 ‘두려움 없음의 경’에 실려 있다. 죽기마련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 몸, 선한행위, 의심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한평생 감각적 쾌락만을 즐기던 자가 질병에 걸리면 더 이상 즐기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버림을 당했을 때 삶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리게 된다.

 

시람들은 젊음과 건강에 대해 교만하다. 이 젊음과 건강이 천년만년 계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아 간다. 그러나 세월은 젊음과 건강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몸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사람에게 늙음과 질병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결국 늙음과 질병에 종속되고 만다.

 

오로지 즐기는 삶만 산 자는 질병에 걸렸을 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즐기지 못하는 삶은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에서 떠난 자이다. 그런 그가 혹독한 질병에 걸렸을 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을 버리게 될 것이다.”(A4.184)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일반사람이나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사는 수행자나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똑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을 버리게 될 것이다.”(A4.184)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도는 완전히 반대이다. 감각적 욕망으로 산 사람들은 다시는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 없어서 억울하고 분한 것이다. 그래서 슬퍼하고, 상심하고, 비탄해하며 심지어 가슴까지 친다고 했다. 반면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산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누릴 수 없어도 슬퍼하지도 않고 비탄해하지도 않고 가슴도 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몸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몸을 자아와 동일시한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미모와 몸매를 확인하며 뿌듯해하는 것은 몸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몸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혹독한 질병이 걸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저 사랑스런 몸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저 사랑스런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며 체념할 것이다.

 

몸을 내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뾰로지 하나만 나도 어쩔줄 몰라한다. 하물며 중병에 걸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제서야 비로소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몸은 나의 통제 바깥에 있는 것이다. 몸이 정말 내것이라면 병들지도 말고 늙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 제자들은 몸이 나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병에 들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랑스런 몸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도 저 사랑스런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A4.184)

 

 

몸은 내것이 아니다. 내것이 아닌 몸에 중병이 들었을 때 슬퍼하지 않는다. 본래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는 것이다. 몸이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아인 자에게 본래 죽음은 시설되지 않는다. 몸이 내것이라고 꽉 움켜 쥐고 있는 자에게나 죽음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유아인 자에게 있어서 오온의 죽음은 진짜 죽음을 의미하지만, 무아의 성자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不死)가 된다.

 

이상 ‘두려움 없음의 경’은 지난 6월 12일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독송된 것이다. 죽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제까지 독송한 경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허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욕망을 부추긴다. 정년퇴임한 사람에게는 “이제는 즐기면서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여생을 즐기면서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심지어 지하철 포스터에는 “젊은이여,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렇게 온통 즐기며 살라는 말만 있는 것 같다.

 

오로지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즐길거리가 살아 졌을 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해외여행을 철마다 즐기는 사람에게 코로나팬데믹은 혹독한 질병과 같은 것이다.

 

혹독한 질병에 걸리면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을 누릴 수 없다. 코로나팬데믹은 여행을 즐기는 자들에게 있어서 재난과 같은 것이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서 예전처럼 즐기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이 되기 쉽다. 세상은 이미 코로나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의 종말이라고 한다.

 

해외여행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코로나를 원망할 것이다. 여행을 즐기던 여유 있는 계층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여행을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사랑스런 여행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라며 슬퍼하고 분노할 것이다.

 

즐기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질병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또 몸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사람에게도 혹독한 질병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이 자신을 버렸고, 몸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즐기는 삶을 살지 않는다. 매순간 알아차리는 삶을 산다.

 

수행자는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혹독한 질병에 걸려도 오히려 “나도 저 사랑스런 감각적 쾌락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거나, “나도 저 사랑스런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며 슬퍼하지도 않고 비탄해 하지도 않을 것이다.

 

 

2020-06-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