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행자의 밥상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30. 17:15

수행자의 밥상

 

 

점심 때가 되면 은근히 기대 되는 것이 있다. 점심밥을 먹는 것이다. 단체생활 할 때 간절하다. 특히 군대에서 그랬다. 연수 받을 때나 워크숍할 때나 점심시간은 늘 즐겁다.

 

점심시간이 즐겁기는 수행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원에 들어 가면 팔계를 받는다. 매일 아침 받아지니는 팔계는 포살계라고 한다. 재가자에게는 하루낮하루밤계에 해당된다. 하루동안 만큼이라도 출가수행자처럼 살라는 것이다. 보름에 한번정도는 출가자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계라고 한다.

 

선원에서 밥을 먹다가

 

평소에는 오계를 지키지만 선원에 들어가면 팔계를 지킨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 오후불식일 것이다. 12시 이후가 되면 일체 먹지 않는다. 다만 마시는 것은 허용된다. 주스타임이라 해서 저녁 출출할 때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 꿀을 물에 타서 마시는 사람도 있고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먹어서는 안되고 마시는 것은 되는 것이다.

 

다음날 해 뜰때까지는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된다. 저녁에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한다. 해가 뜨기 시작할 때 아침식사를 먹는다. 간단히 먹는 개념이다. 죽이나 국수 같은 것이다. 때로 밥도 나온다. 미얀마의 경우 대개 오전 5 50분경에 아침식사를 한다. 해가 뜨기 시작할 때이다.

 

점심은 오전 11시경에 먹는다. 점심을 제대로 먹어야 한다. 하루를 버틸려면 점심식사를 단단히 해야 한다. 최대한 배불리 먹으려고 노력했다. 고기가 나오면 고기도 가능한 많이 먹으려고 했다.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인솔자 역할을 했던 김선생이 한마디 했다. “이선생, 밥 먹을 때는 알아차림 하며 먹으세요.”라고 말 하는 것이었다.

 

밥 먹을 때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말을 하면 음식이 잘못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선생은 이어서 말했다. “집음집음, 넣음넣음, 씹음씹음, 넘김넘김 하며 먹으세요.”라고 말 하는 것이었다. 부끄러웠고 창피했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먹었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배에다 최대한 많이 담아 두고자 하는 욕심만 있었던 것이다. 이를 눈 여겨 지켜보던 김선생이 어느 날 작심하고 말한 것이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알아차림 하며 먹는 것은 위빠사나수행이다. 위빠사나로 먹기에 해당된다. 위빠사나로 먹기가 있다면 사마타로 먹기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이 음식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는 것이다.

 

선원에서는 탁발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선원에서 밥을 지은 것과 합해서 먹는다. 보시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음식준비를 하는 봉사자들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배고프다고 아무 생각없이 입에 퍼 넣을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사마타로 먹기에 해당된다.

 

배탈이 났는데

 

배탈이 났다. 여행가서 아무 생각없이 먹었던 것이 탈이 난 것 같다. 설사를 했다. 이런 경우 정로환처럼 생긴 작은 알갱이로 된 한약이 즉효가 있다. 공복에 두 번 먹었더니 멈추었다. 이렇게 한번 탈이 나고 나면 식습관을 되돌아보게 된다. 너무 자극적인 것만 먹지 않았는지, 너무 기름진 것만 먹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알아차림을 놓치고 먹는 것이다. 사마타로 먹기도 놓친 것이다.

 

불교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찾는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맛집을 찾는다. 소문난 맛집을 찾아서 몇시간이고 운전해서 가기도 한다. 탐욕으로 먹는 것이다.

 

사람을 보는 방법이 있다. 대체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본다. 이 세 가지로 깨달음의 척도로 삼기도 한다. 그가 깨달았는지 즉각적으로 아는 방법이 있다. 그가 화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냄은 가장 쉽게 드러난다.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알려면 무엇을 보아야 할까? 밥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젓가락 놀리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알아차림 없이 먹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정신없이 먹는 사람은 탐욕으로 먹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대화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말로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는 토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음식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탐욕적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도 위빠사나로 먹고 사마타로 먹는다. 또한 계율로 먹는다. 음식을 먹을 때 놀이나나 사치로 즐기기 위해 먹지 않는다. 몸에 기름칠할 정도로만 먹는다. 이렇게 계율로 먹으려면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을 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

 

청정도론에 음식에 대한 혐오적 지각의 수행(āhāre paikkūla-saññā)’이 있다. 음식을 혐오하는 것도 수행인 것이다. 왜 음식을 혐오해야 하는가? 윤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물질의 자양, 접촉의 자양, 의도의 자양, 의식의 자양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자양은 모두 오온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매일 네 가지 음식을 먹는다. 먹는 음식만 음식이 아닌 것이다. 접촉도 음식이고, 의도도 음식이고, 의식도 음식인 것이다. 행위 자체가 음식이다. 행위를 하면 업이 되어서 과보를 받는다. 매일 음식을 먹으면 그 업으로 인하여 윤회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을 한다.

 

어떻게 해야 음식을 혐오할 수 있을까? 물질적 음식은 아들고기를 먹는 것처럼 보라고 했다. 접촉의 음식은 가죽이 벗겨진 소처럼 보라고 했다. 의도의 음식은 숫불화로에 떨어지는 것 같은 괴로움으로 보라고 했다. 의식의 음식은 백 개의 창에 찔리는 것처럼 보라고 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함부로 행위하지 못할 것이다. 괴로움의 과보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먹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수행자는 몸에 기름칠할 정도만 먹는다. 탁발하는 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음식에 대한 혐오 수행도 겸하고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탁발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집에 들어서도 어떤 자는 주고 어떤 자는 주지 않는다. 줄 때도 어떤 자는 어제 지은 밥이나 오래된 단단한 음식이나 시어빠진 죽이나 빵 등을 준다. 주지도 않으면서 어떤 자는존자여, 가세요.’라고 말한다. 어떤 자는 못 본 척하면서 침묵한다. 어떤 자는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어떤 자는까까중아, 꺼져라.’라는 등의 욕지거리로 조롱한다. 이와 같이 빈궁한 자처럼 마을에서 탁발을 다니다가 나와야 한다.”(Vism.11.12)

 

 

탁발나갔을 때 모두 음식을 얻어 오는 것은 아니다. 주지도 않으면서 욕설부터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빌어먹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걸식자는 음식을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입속에 들어간 음식은 어떤 상태일까? 마치 개밥과도 같다고 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한번 입에 들어가면 개밥그릇 가운데 있는 개의 토사물처럼 극도로 혐오스러운 상태에 이른다.”(Vism.11.16)라고 했다. 토한 음식을 보면 음식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식은 똥이다

 

음식은 먹기 전과 먹고 난 후는 다르다. 먹기 전에는 예술품처럼 아름답고 먹음직 하게 보이지만 한번 목구멍을 넘어가면 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크게 귀중한 음식

마실 것과 부드럽거나 단단한 음식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

아홉 가지 구멍으로 배설된다.

 

크게 귀중한 음식

마실 것과 부드럽거나 단단한 음식

여러 무리들과 모여 먹지만

배설할 때는 숨어서 한다.

 

크게 귀중한 음식

마실 것과 부드럽거나 단단한 음식

크게 환희하면서 먹지만

배설할 때는 혐오한다.

 

크게 귀중한 음식

마실 것과 부드럽거나 단단한 음식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모두가 썩은 상태가 된다.”(Vism.11.23)

 

 

음식은 입으로 들어 간다. 나올 때는 아홉 가지 구멍으로 배설된다고 했다. 어떤 것이 나오는 것일까? 경에 따르면 또한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나온다.”(Stn.197)라고 했다. 인간의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며, 가꾸어지더라도,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있다.”(Stn.205)라고 했다.

 

아홉 가지 구멍에서는 악취나고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나온다. 특히 대변과 관련된 구멍이 그렇다. 그래서 숨어서 혼자서 싼다고 했다. 음식이 똥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음식은 똥이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음식혐오수행 공덕은?

 

청정도론에서는 열 가지 형태로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을 하라고 했다. 수행자라면 1) 탁발의 관점에서, 2) 구함의 관점에서, 3) 먹음의 관점에서, 4) 분비의 관점에서, 5) 담김의 관점에서, 6) 소화되지 않은 것의 관점에서, 7) 소화된 것의 관점에서, 8) 결과의 관점에서, 9) 배설의 관점에서, 10) 묻은 것의 관점에서 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관점에서 음식혐오수행을 했을 때 어떤 공덕이 있을까?

 

 

이러한 음식에 대한 혐오의 지각에 전념하는 수행승은 맛에 대한 갈애로부터 마음이 움츠려들고 꼬부라들고 수렴된다. 그는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자가 아들의 고기를 먹는 것처럼, 허영을 여의고 괴로움을 건너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되면, 그는 물질의 자양을 완전히 알게 되는 까닭에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도 완전하게 알게 된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도 완전하게 알게 되는 까닭에 물질적 다발도 완전히 알게 된다. 소화되지 않은 것 등의 혐오의 상태를 통해서 신체에 대한 새김의 수행도 원만해 진다. 부정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 순조롭게 행도가 닦여진다. 이러한 행도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의 불사(不死)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내세에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Vism.11.26)

 

 

음식혐오수행을 하면 선처에 태어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선처는 색계일 것이다. 색계에는 소화기관이 없다. 내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 음식을 먹지 않는다. 기쁨을 음식으로 먹고 산다. 선정에서 기쁨을 말한다.

 

음식혐오를 하면 욕계를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을 혐오해야 한다. 음식대하기를 아들고기 대하듯 하고, 입안의 음식은 개밥그릇처럼 보고, 내장에서 소화되기 전의 음식에 대해서는 발효되어 생겨난 수포나 기포를 내뿜으니, 지극히 혐오스런 상태가 된다.”(Vism.11.19)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은 결국 아홉 가지 구멍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항문에서는 똥으로 나온다. 음식이 똥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음식의 소화과정을 생각하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황제식도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순간 똥이 되어 나온다. 최고급 와인도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오줌이 되어서 나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음식을 즐긴다. 먹는 재미로 사는 것이다. 하루 세 끼 매일 먹고 산다. 죽을 때 까지 먹는다. 죽을 때까지 밥숫가락 놓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의 밥상은

 

오늘 점심 때 소박하게 먹기로 했다. 배탈이 났기 때문에 고기나 생선 등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소화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이 받을지 아는 것이다.

 

볶음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제철에 나는 것들을 재료로 사용했다. 햇감자를 잘게 프라이팬에 잘게 썰어 넣었다. 역시 제철 음식인 호박, 양파, 청경채, 마늘, 미나리를 잘게 썰어 넣었다.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버무렸다. 마무리는 참기름으로 했다. 국은 된장 시레기국으로 했다. 볶음비빔밥이 완성된 것이다.

 

 

밥먹을 때 반드시 고기가 있어야 할까? 어디를 가든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대중식당에서도 매끼마다 빠지지 않는다. 매일잔치날이고 파티날인 것 같다. 고기를 먹으면 탁해지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고기를 남의 살이라고 한다. 남의 살을 먹기 때문일까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 같다. 남의 살이 내 살이 되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돼지고기를 먹었다면 돼지가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닭이나 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동물적으로 변하는지 모른다.

 

어느 수행자가 있다. 수행중에 신비한 체험을 한 후로는 육식을 끊었다고 한다. 고기를 먹을래야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고기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고기에 대한 혐오가 자리잡아서 일 것이다.

 

음식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면 식탐이 줄어 들 것이다. 음식이 소화되는 과정을 눈으로 본다면 혐오가 일어날지 모른다. 당장 토한 음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토한 음식을 다시 삼킬 수 없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면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모여서 음식을 즐기지만 배설할 때는 몰래 숨어서 한다.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을 하면 탐욕이 줄어 들것이다.

 

수행자는 늘 세상 사람들과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먹거리를 즐길 때 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본다. 많이 먹어서 탈이 난다. 특히 고기를 먹어서 탈이 난다. 수행자는 음식을 몸을 유지하는 정도로 보지 즐기면서 먹지 않는다. 수행자는 고기를 똥으로 보아야 한다. 수행자의 밥상은 채식위주로 청정해야 한다.

 

2020-06-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