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좌선 중에 진동이 일어났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18. 22:39

좌선 중에 진동이 일어났는데

 

 

일이 겹치기로 발생했다. 내일까지 해야 하는 것들이다.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집중이 안된 상태에서 해 보았자 효율도 없고 피곤할 뿐이다. 이럴 경우 푹 쉰 다음 몰아치기로 하는 것이 낫다.

 

나른한 오후 몸이 쳐진 상태에서 행선을 했다. 열 보가량의 거리를 약 10분 동안 왕래했다. 어느 정도 발에 집중이 되자 그 여세를 몰아서 좌선에 돌입했다. 좌선하고 나면 일의 효율이 올라 갈 것 같았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온으로 해 놓았다. 한시간으로 세팅된 것이다. 해 보는 데까지 해 보기로 했다. 이전에 30분 이상 앉아 있으면 평좌 자세에서 오른쪽 다리가 통증이 있어서 각오했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한시간 동안 버티기를 말한다. 또 사띠를 놓치지 않기를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따라 가야 한다. 배의 움직임이 주된 대상이긴 하지만 몸 전체에서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호흡함에 따라 들어오고 나감을 전체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삼십분이 지났다. 보통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리의 통증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증이 전혀 오지 않았다. 호흡을 잡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이다.

 

 

호흡을 보셨습니까?”

 

“호흡을 보셨습니까?” 이말은 위빠사나 선원에서 듣던 말이다. 2009년 처음으로 한국명상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그때 당시 지도하던 법사는 늘 “호흡을 보셨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호흡을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 호흡은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인데 호흡을 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는 ‘빠리무카사띠’에 대한 것이었다. 빠리무카사띠와 관련하여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D22.3)

 

 

경에서는 왜 숲이나 나무 밑이나 한가한 곳으로 가라고 했을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외딴 집에서 홀로 수행하라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한 설명이 청정도론에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마음이 흩으러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대상에 마음을 두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생 송아지의 비유를 들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목우자가 야생의 암소 모든 우유를 삼키고 성장한 야생의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암소에게서 떼어내어 한쪽 구석에 커다란 기둥을 박고 거기에 밧줄로 묶으면, 그 송아지가 여기저기 날뛰어도 도망 갈 수가 없고 그 기둥 가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듯이, 그 수행승은 오랜 시간 형상 등의 대상의 맛에 심취한 사악한 마음을 제어하고자 형상 등의 대상에서 떼어내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게 해서 그곳에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 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

 

 

오늘날 사람들은 커다란 명상홀에서 집단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본래 수행은 홀로 하는 것이다. 그것도 외딴 곳에서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커다란 홀은 법문 듣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외딴 곳에서 수행하는 것은 자신을 매어 놓기 위해서이다. 미처 날뛰는 마음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고자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야생 송아지를 기둥에 묶어 두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는다’고 했다. 호흡이 기둥이고 사띠가 밧줄임을 알 수 있다.

 

날뛰는 마음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고자

 

호흡과 사띠의 관계는 기둥과 밧줄과 같다. 미쳐 날 뛰는 마음을 묶어 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찰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과 사띠와 관찰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 이런 설명이 있다.

 

 

“신체의 형성을 멈추게 하는 들숨과 날숨이 신체이고, 토대는 새김이고, 관찰은 앎이다. 신체는 토대이지만, 새김은 아니다.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 그 새김과 그 앎으로 신체를 관찰한다. 그래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Vism.8.185)

 

 

설명을 보면 “들숨과 날숨이 신체이고”라고 했다. 호흡은 신체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까마부의 경’에서도 확인된다. 까마부의 경에 따르면 “장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S41.6)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흡(assāsapassāsa)은 신체에서 풍대에 해당된다. 그래서 호흡은 신체를 토대로 한다. 이런 호흡은 사띠(sati)가 아니라고 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호흡이 사대 중의 풍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신체이지만 사띠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띠는 토대도 되고 또 사띠도 된다고 했다. 두 가지가 다 되는 것이다.

 

사띠는 토대도 되고 사띠도 된다고 했다. 이렇게 두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아는 마음이 있다. 이를 관찰(앎: nāna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호흡과 앎을 연결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둘을 매개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호흡을 보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호흡(assāsapassāsa)과 사띠(sati)와 앎(nānaṃ)을 말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띠이다. 사띠는 호흡과 앎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흡을 기둥이라고 비유했고, 사띠를 밧줄로 비유한 것이다.

 

야생 송아지를 밧줄로 기둥에 꽁꽁 묶어 두면 밧줄의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여기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사람이 기둥에 묶는 것과 같이,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Vism.8.154)

 

 

빠리무카사띠(parimukha sati)에 대하여

 

다음으로 빠리무카사띠(parimukha sati)에 대한 것이다. 빠리무카사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빠리무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얼굴 앞으로”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전면에”라고 번역했다. 빠리무카사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해설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자기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라는 것은 명상주제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혹은 “ ‘자기 앞’ 이라는 것은 ‘출구’의 뜻이고, ‘으로’라는 것은 제어를 뜻하고, ‘새김’은 ‘확립’의 뜻이므로, ‘자기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라고 언급한 것이다.”라고 빠띠쌈비다막가에서 설한 표현을 통해서 여기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Vism.8.161)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빠띠쌈비다막가에서 설한 표현을 근거로 하여 빠리무카사띠에 대하여 설명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빠리무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본래 얼굴 또는 코라는 뜻이다. 그러나 빠알리사전을 보면 ‘in front’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전면에”라고 한 것이다.

 

전재성회장은 빠리무카에 대한 번역의 애로를 각주에 설명해 놓았다. 각주를 보면 “ 역자가 번역한 ‘parimukhaṃ’은 ‘얼굴 둘레로’라는 뜻인데, 적적하게 번역하는 것이 힘들어서 각나라에서는 다양한 번역과 해석들이 공존한다. 역자는 각 니까야마다 다소간 다르게 번역하다가 최종적으로 냐나띨로까의 번역을 따른 것이다.”(1549번 각주)라고 했다.

 

빠리무카는 “전면에” 또는 “자기 앞으로”의 뜻이다. 무카가 코의 뜻도 있다고 하여 호흡을 사띠할 때 코 주변에 둘 수 없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이라는 풍대를 관찰하기 때문에 얼굴이나 코에 사띠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호흡은 몸의 전면에서 관찰하는 것이 된다. 몸 전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따라 가는 것이 사띠이고, 이런 과정을 아는 것이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길게 숨을 들이 쉴 때는 나는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한다.”(D22.3)라고 했다.

 

진동이 일어났는데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호흡을 따라 가게 되어 있다. 계속 따라 가다 보면 집중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몸 전체가 호흡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호흡을 보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일어남과 사라짐만 있게 된다.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몸전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계속 지켜 보았다. 이삼십분 후터 몸에 변화가 발생했다. 마치 시계추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처럼 호흡에 따라 진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진동은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계속 지켜보았다.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았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마주한 것도, 엉덩이를 바닥에 댄 것도 느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몸도 나른해졌다. 기분 좋은 상태가 된 것이다. 속으로 “이런 맛을 보기 위해서 앉아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몇시간이고 앉아 있을 것 같았다.

 

몸이 좌우로 움직이던 몸이 어느 순간 앞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다시 좌우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세지는 것 같았다. 속으로 정말 몸이 움직이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몸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보니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동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집중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몸의 움직임은 사대 중에서 풍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배의 움직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도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다.

 

대념처경에 사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이 몸속에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있다.”(D22.8)라고 했다. 사대는 물질의 일차적 속성으로서 견고성(지대), 유동성(수대), 열성(화대), 확산성(풍대)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바람의 세계(풍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청정도론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기체라는 것은 부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방식으로 바람에 속한 것이 기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팽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Vism.11.37)

 

 

풍대에 대하여 팽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청정도론에서는 팽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상향풍에 대하여는 구토와 트림 같은 것으로 위로 솟는 기체이고, 하향풍에 대하여는 똥과 오줌 같은 것으로 아래로 배출하는 기체라고 했다. 또 “입식풍은 안으로 들어가는 기체이고 출식풍은 밖으로 나가는 기체이다.”(Vism.11.37)라고 했다. 이는 호흡에 대한 것이다. 호흡은 풍대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몸의 진동은 호흡에 따른 풍대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좌선은 상쾌했다

 

타이머 벨 소리가 울렸다. 한시간이 지난 것이다. 이번 좌선은 상쾌했다. 통증도 없었다. 호흡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진동까지 있었다. 벨이 울리자 진동을 중단했다. 의지로 중단 한 것이다. 의지가 개입되지 않으면 계속 진동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한시간 좌선을 마쳤다. 이전 같으면 다리 통증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는데 이번에는 거뜬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툴툴 털고 일어선 것이다. 다시 일에 집중했다. 정신이 맑아서인지 효율이 좋았다. 무엇보다 상쾌했다. 이런 기분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20-06-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