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역류도(逆流道), 눈물로 범벅된 고난의 길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8. 18:25

 

역류도(逆流道), 눈물로 범벅된 고난의 길

 

 

오른쪽 다리가 뻐근하다. 오랜만에 한시간 앉아 있었다. 마음먹고 앉아 있은 것이다.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오래 앉아 있고자 하였으나 고작 일이십분이 고작이다. 앉아 있다 보면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마하시’방식대로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고자 하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치고 들어 오면 엉뚱한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반드시 한시간 앉아 있고자 했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한시간으로 세팅해 두었다. 예비동작으로 행선을 십분가량 했다. 행선도 그때 그때 컨디션에 따르다. 어느 때는 집중이 잘 되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때는 발걸음 옮기는 것이 무겁과 뒤뚱거리는 경우도 있다. 좌선도 마찬가지이다. 집중이 잘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망상만 하다가 마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이번에는” 하는 식으로 임해야 한다.

 

평좌를 했다. 방석은 두껍다. 평균 10센티가량 된다. 미얀마 수행센터의 경우 방석이 얇아서 좌선을 시작한지 5분도 안되어서 통증이 찾아온다. 한국에서 방석은 충분히 두껍기 때문에 보통 20분 이상 지나야 통증이 찾아온다. 이번에도 그랬다. 처음 30분 까지는 통증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므로 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배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아니다. 전면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호흡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 경전에 나오는 ‘빠리무카 싸띠(parimukha sati)’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D22.3) 라는 말을 근거로 한다.

 

빠리무카는 얼굴 또는 코를 의미하고, 싸띠가 알아차림을 의미하기 때문에 면전 또는 전면에 호흡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느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배의 모양을 보지 않고 전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을 말한다. 모양을 보면 빤냐띠(paññatti)가 되어 관념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집중해서 관찰해야 잡념이 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전면의 호흡에 집중하다고 보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잡념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그 짧은 순간 치고 들어오면 그것으로 인하여 집을 짓게 된다. 허공속에 커다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생각의 무게’를 느낀다.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빨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알아차림만 유지하고 있으면 힘이 들지 않는다.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관찰하면 된다. 눈을 감고 있으므로 귀로는 끊임없이 소리가 들려오는데 역시 알아차림만 하면 된다. 대상으로 인하여 생각을 하는 순간 생각의 무게로 인하여 피곤해진다.

 

남의 다리 관찰하듯이

 

앉아 있은지 약 30분가량은 좋았다. 그러나 오른쪽 다리 통증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평좌를 하면 90프로 이상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온다. 처음에는 발끝에서 시작되었다. 방석에 닿은 발부위가 점차 찌르는 것처럼 통증이 시작되었다. 이럴 때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단지 지켜볼 뿐이다.

 

다리 통증이 심해져서 끊어질 듯이 아플 때 겁이 날 수 있다. 이럴 경우 다리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겁이 나는 것이다. 때로 불구될 것처럼 걱정한다. 그런데 한번 겁이 나면 마음은 것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육체의 통증이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제2의 화살’을 맞았다고 말한다. 육체의 통증이 정신의 통증의 전이된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다리의 통증이 와도 단지 지켜 보라고 말한다. 이럴 때 하는 말이 “남의 다리 보듯 관찰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자신의 몸을 제3자가 보는 것처럼 지켜보라는 것이다.

 

오른쪽 다리의 통증을 지켜보았다. 정말 남의 다리 보듯 지켜본 것이다. 발에서 시작된 통증은 점차 다리 전체로 퍼져 나갔다. 가장 좋은 것은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통증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느낌은 성품이기 때문에, 통증이 생겼다는 것은 성품을 관찰하기 좋은 찬스인 것이다. 그래서 다리에 통증이 왔을 때 손님 반기듯 하라고 했다. 이럴 때 하는 말은 “통증이여, 어서 오라!”가 될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통증을 관찰했다. 아니 통증과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석 두께가 10센티이기 때문에 통증이 와도 극심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오랫동안 앉아서일까 못견딜 정도가 되었다. 이럴 때 지난 토요일 관악산 등산을 떠 올렸다.

 

배낭에는 3키로 이상 짐이 있었다. 오랜 만에 산을 타서 힘들었고 또한 초여름이라 더워서 힘들었다. 다리도 아프고 힘도 없어서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빨리 약속장소에 가고자 했으나 갈 길은 멀었다. 아득한 곳에 있어서 수많은 암벽 고개를 넘어야 했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경전의 한구절이 떠 올랐다. ‘눈물범벅’이라는 말이 떠 오른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흐름을 거스른다는 말이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ī)’ 라고 한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을 말한다. 역류도(逆流道)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 역류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역류도를 추구하면 ‘얼굴에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청정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청정한 삶’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했다. 브라흐마짜리야는 바라문 인생사주기에서 ‘학습기’에 해당되는 시기를 말한다. 이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하여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수행승이 역류도를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평생 학습기’로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 간다. 세상의 흐름은 어떤 것일까?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저지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흐름을 역류하여 사는 것이다.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귀류하는 것과 같다. 도중에 암초를 만나고 심지어 작은 댐을 만나기도 한다. 본래 태어 났던 곳으로 돌아 가는 과정은 험난한 길이다. 도착했을 때는 상처투성이가 된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물로 범벅된 고난의 길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고 고행의 길과 같다. 감각적 쾌락의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고 고행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역류도의 삶을 살지만 먹어야 산다. 하루 한차례 오전에 탁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로 내려가서 탁발음식을 얻어 와야 그 힘으로 역류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밥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집에 들어서도 어떤 자는 주고 어떤 자는 주지 않는다. 줄 때도 어떤 자는 어제 지은 밥이나 오래된 단단한 음식이나 시어빠진 죽이나 빵 등을 준다. 주지도 않으면서 어떤 자는 ‘존자여, 가세요.’라고 말한다. 어떤 자는 못 본 척하면서 침묵한다. 어떤 자는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어떤 자는 ‘까까중아, 꺼져라.’라는 등의 욕지거리로 조롱한다. 이와 같이 빈궁한 자처럼 마을에서 탁발을 다니다가 나와야 한다.”(Vism.11.12)

 

 

언젠가 현웅스님의 탁발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육조사 일요법회에서 한 것을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현웅스님에 따르면 젊은 시절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서 탁발했다고 한다. 탁발 과정에서 일 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중의 하나는 모욕당한 이야기였다. 주지도 않으면서 “아침부터 재수없게.”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음식에 대한 혐오적 지각수행(āhārepaṭikkūlasaññā)’을 보면 현웅스님이 경험한 것이 그대로 실려 있다. 주지도 않을 것이면서 “까까중아, 꺼져라.”라며 욕지거리 하는 것을 말한다.

 

탁발한다고 하여 모두 정상적 탁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 중에는 성정이 못된 자도 있을 것이다. 주지도 않을 것이면서 모욕을 주는 자를 말한다. 이런 경험을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어쩌면 밥을 얻는 행위가 ‘눈물의 탁발’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역류도의 삶을 사는 자가 겪는 것으로 눈물로 범벅이 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오르는 과정은 힘들지만

 

좌선을 시작한지 30분 정도 되는 시점에서 시작된 오른쪽 다리 통증은 절정을 치달았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이 지켜만 보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통증이 심하다고 해도 치통 만한 것이 없다.

 

치통이 시작되면 하루 종일 간다. 닥근닥근 거리는 것이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치과에나 가야 멈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알아차림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선할 때 다리 통증은 치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주 토요일 관악산 등반할 때의 힘든 것을 생각하면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좌선통보다 더 큰 괴로움도 있다. 구조적 괴로움이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괴로움을 안고 평생사는 것이다. 단지 몇 십분 다리통증 때문에 괴롭다고 하여 “아파 죽겠네!”라며 육체적 통증이 정신적 통증으로 전이 된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다리 통증은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다리를 풀었다. 한시간을 다 채운 것이다.

 

역류도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쉽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다. 욕망대로 본능대로 사는 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욕으로 살고, 성냄으로 살고, 어리석음으로 산다. 그러나 역류도를 추구하면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 간다는 사실 자체가 힘겨운 삶이다. 마치 산에 올라 가는 것과 같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자에게 등산은 쓸데없는 짓이나 다름없다. 대개 “올라 갔다가 금방 내려올 걸 무엇 하러 힘들게 올라가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에 올라 가는 사람들은 산이 있어서 올라 간다. 올라 가야 할 목표가 있어서 올라 가는 것이다. 오르는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꼭대기에 올랐을 때 강한 성취감을 맛본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좌선하면 온갖 잡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알아차림을 놓치면 허공에 큰 집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면의 호흡을 알아차림 하리라고 다짐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개도 놓치지 않겠다고 각오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집중했을 때 일이십분 되면 고요함이 찾아온다. 마치 등산할 때 ‘깔딱고개’를 넘어서 정상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런 평화는 세속의 감각적 욕망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어 하나는 우기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겨울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여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사는 사 개월 동안 궁녀들의 음악에 탐닉하여 밑에 있는 궁전으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나는 감각적 쾌락의 생성이나 소멸이나 유혹이나 재난이나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감각적 쾌락의 갈애를 버리고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를 버려서 감각적 쾌락의 갈증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다른 뭇 삶들을 봅니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의 착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M75.21)

 

 

부처님은 선정의 즐거움에 대하여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한다고 했다. 욕계천상의 즐거움을 말한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에 세 개의 궁전에서 천상의 즐거움에 버금가는 쾌락에 탐닉했는데, 선정의 즐거움은 이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것이라고 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는 감각적 욕망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에 따른 쾌락은 ‘거친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하여 고요한 상태가 되면 이는 미세한 것이다. 이를 ‘잔잔한 즐거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가길에 느끼는 잔잔한 즐거움 같은 것이다.

 

비록 선정 단계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눈을 감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법을 보아야 한다. 통증이 일어나면 그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찌른 듯한 느낌, 끊어지는 듯한 느낌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 제3자적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이다. 명상을 하는 것은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오늘 한시간 버틴 것은 나름대로 성과이다.

 

 

2020-06-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