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간지러움의 끝을 보고자 했으나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3. 12:21

 

간지러움의 끝을 보고자 했으나

 

 

의무적 글쓰기와 함께 의무적 수행하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책상 바로 옆에 명상공간을 마련해 놓았음에도 앉아 있는 시간은 십분을 넘기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십분집중효과는 있다. 일을 할 때 새로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낮잠을 짬을 내서 잠시 잔 것과 같은 효과이다.

 

명상공간에 들어 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책상의 걸상에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르다. 걸상에 앉아 있으면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집중이 되기 때문에 문제없지만, 인터넷을 보고 있을 때 마음이 혼란해지는 것 같다. 이런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명상공간에서 행선을 하기 위해서이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마치 지기(地氣)를 받는 것 같다. 바닥에 발을 딛는 행위는 마치 어스(Earth)를 하는 것과 같다. 좌선하면 더욱 더 안정된 자세가 된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붕 떠 있는 것 같고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그라운드에 밀착 되는 것 같아 안정적이다.

 

행선하는 거리는 약 열 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늘 언제나 그렇듯이 명칭을 붙이면 효과적이다. 이른바 육단계 경행을 말한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밀어서, 내리고, 닿아서, 누름을 말한다. 이렇게 육단계 동작에 대하여 명칭을 붙이면 천천히 하게 된다. 그리고 집중이 잘 된다. 이렇게 행선을 먼저 한다음에 좌선에 임하라고 수행처에서는 말한다.

 

행선을 한 다음에 자리에 앉았다. 평좌를 하고 타이머를 세팅했다. 삼십분으로 세팅했으나 이내 꺼 버렸다. 오늘은 한번 끝장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앉은지 5분도 안되어서 허리춤이 간지러워 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강력했다. 마치 코가 가려우면 한번 만져 주어야 가시듯이, 허리춤을 한번 바라 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가장 강한 대상에 집중하여 관찰하라고 했다. 대개 호흡이기 쉽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 삼십분 정도가 지나면 통증이 시작된다. 다리통증인 것이다. 평좌를 했을 때 거의 구십프로 이상이 오른쪽 다리통증이다. 마치 다리가 끊어질 듯해도 자세를 바꾸지 말고 통증을 관찰하라는 것이 지도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이렇게 통증을 관찰하다 보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법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통증이라는 느낌, 느낌이라는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한다.

 

허리춤이 간질거렸다. 그것도 왼쪽 혁대 아래 허리춤이다. 한번 허리춤을 잡으면 깨끗이 해결될 일이다. 그럼에도 지켜보기로 했다. 호흡보다 더 강력한 대상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강한 대상을 지켜 보라고 하기 때문에 간지러움을 지켜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힘든 것이었다. 차라리 십일전에 겪었던 치통이 더 쉬었다. 치통은 통증이 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기가 있다. 마치 파도치듯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를 알아차림 하면 육체적 통증이 정신적 통증으로 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심해서 병원 치과의사가 구세주가 되었다. 치과 치료를 받고 나서야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허리춤 간지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호흡에 집중하는 식으로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면승부해 보기로 했다. 간지러운 부분을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지켜만 보는 것이다. 간지러움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나 통증처럼 주기가 없는 것이었다. 왼쪽 허리춤 아래에 간지로운 느낌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이는 접촉에 따른 느낌이라고 볼 수 있다.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나 귀로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코로 냄새를 맡는 것과 달랐다. 직접적으로 접촉에 따른 간지로움이다. 아니 간지럽다는 생각에 따른 것인지 모른다. 예전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간지러움에 따른 불쾌한 느낌은 이숙(異熟)적인 것이 된다. 전의 경험이 되살아 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숙적인 느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이와 같이 “느낌을 느낌인 것으로 유위로 행작해낸다.”라고 설했고, 또한 마찬가지로 “악하고 불건전한 업이 행작되어 집적되는 까닭에 괴로움을 수반하는 이숙적 촉각의식이 생겨난다.”라고 설한 까닭이다. (Vism.14.220)

 

 

청정도론 제14장 존재의 다발(오온)에서 느낌에 대한 설명이다. 대상과 접했을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는데 이전에 경험했던 것이 익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괴로움과 관련해서는 ‘괴로움을 수반하는 이숙적 촉각의식’이라고 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알아차려야 한다.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상윳따니까야 ‘병실의 경’(S36.7)에 따르면 괴로운 느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한 분노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S36.7)

 

 

경에 따르면 괴로움을 분노로 보았다. 괴로운 느낌이 발생했을 때 이는 싫어하는 느낌에 대한 것이다. 싫어 하는 느낌은 밀쳐내려는 성품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분노의 성품과도 같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이 생겨 나는 것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과도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괴로움이 발생했을 때 지켜보아야 한다. 괴로운 느낌을 지켜보았을 때 괴로움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괴로움이 본래 있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져 가다 보니 몸을 조건으로 한다고 했다.

 

몸이 있어서 괴로움이 생겨난 것이다. 몸이 없다면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몸을 보니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 이라고 했다. 또한 괴로움 역시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에서 조건지어져 생겨난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이런 성품을 잘 관찰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다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을 수 없는 것 같다. 허리춤을 흔들어서 바로 잡고 싶은 생각이 불뚝불뚝 일어났지만 참았다. 간지러움과 전쟁하듯이 했다. 간지러움을 극복하고자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자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나중에는 목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몸이 경직되어서 큰일 날 것 같았다. 좌선을 시작한지 삼십분만에 멈추었다. 간지러움에 항복한 것이다. 그러나 삼십분을 버텼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굴복했다. 계속하면 목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쥐가 나서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삼십분만에 그만 두었다. 이는 어쩌면 접촉에 따른 괴로움일지 모른다. 시각이나 청각과 달리 촉각은 직접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몸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접촉에 따른 괴로움에 대하여 경에서는 접촉의 자양분으로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이 찢겨진 소가 벽에 기대어 서 있으면 그 벽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나무에 곁에 서 있으면 그 나무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물 속에 서 있으면 그 물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야외에 서 있으면 그 야외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가죽이 찢겨진 소가 의지해서 있는 곳마다 각기 거기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접촉의 자양분은 이와 같이 여겨져야 된다고 나는 말한다.”(S12.63)

 

 

네 가지 자양분 중에서 접촉의 자양분에 대한 설명이다. 접촉으로 인한 괴로움에 대하여 가죽이 벗겨진 소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가죽이 벗겨진 것도 괴로운데 상처 난 부위를 벽에 대었을 때 더욱 괴로울 것이다. 더욱 더 괴로운 것은 미생물의 침입에 대한 것이다. 이를 접촉의 자양분에 따른 괴로움이라고 했다.

 

좌선할 때 간지러움을 결국 참지 못했다. 허리춤 한번 바로잡으면 될 것임에도 관찰하고자 했으나 삼십분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다음 번에 이런 기회가 온다면 시간을 늘려 나갈 것이다. 그래서 간지러움의 끝을 보고 싶다.

 

 

2020-06-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