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생멸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28. 10:04

 

생멸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 말이 갑자기 와 닿는다. 금강경에 있는 구절이다. 금강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하여, 이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는 말로 풀이된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말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 마음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흔히 ‘생주이멸’이라고 하지만, 응무소주라는 가르침에 따르면 머묾(住)과 변화(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있다면 생과 멸만 있을 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사람은 ‘생노병사’하듯이, 마음도 ‘생주이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맞지 않는 말이다. 마음을 잘 관찰하면 마음은 조건에 따라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 어디에도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송곳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고 했다. 마음이 머무는 기간이 매우 짧음을 말한다.

 

마음에는 생멸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음과 마음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것들에게 중간자는 없고, 그것들에게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Vism.19.23)라고 했다. 전심과 후심사이에 중간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중유(中有), 즉 중간적 존재가 없다는 말과 같다. 죽음 이후 다음 생이 시작될 때까지 49일 동안 머무는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마음은 곧바로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이때 과보를 남긴다. 그래서 마음은 념념상속된다.

 

마음이 머무는 기간은 매우 짧다. 그래서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sm.20.72)라고 했다. 또 “짝”하고 두 손으로 손뼉치는 소리와도 같다고 했다. 마음은 찰나지간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 한마음의 찰나는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Vism.20.72)라고 했다.

 

모든 현상은 찰나지간에 일어난다. 사고도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교통사고도 순간에 일어난다.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나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손뼉을 쳤을 때 “짝”하고 소리가 나는 것은 순간이다. 이를 아는 마음도 순간이다. 그러나 그 아는 마음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오래 간다.

 

아는 마음이 좋은 느낌이라면 갈애가 생겨서 집착하게 된다. 한번 집착이 일어나면 업이 되어서 과보를 받게 된다. 연기가 회전 되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하게 된다. 마음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치통으로 알게 되었다.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이다. 꼬박꼬박 세금 내듯이 건강보험료 납부하는 것이 억울할 정도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이빨에 문제 생겼을 때와 감기에 걸렸을 때 간다. 건강검진도 받지 않는다. 몸에 어떤 병이 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비난받을 일이다. 그러나 건강염려증으로 인하여 마치 마트가듯이 툭하면 병원에 가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일주일전부터 이빨이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라며 가볍게 생각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몹시 아려 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고통이 있지만 치통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없을 것이다. 치과에 전화를 걸었다. 주말이 걸려 있어서 월요일로 예약했다. 그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보고자 했다. 이번 기회에 법(法)을 보고자 하는 만용도 작용했다.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빠라맛타담마(parāmaṭṭhadhamma)이다. 탐욕, 성냄 등과 같은 구경법(究竟法)이다. 물론 통증도 구경법에 해당된다. 느낌도 구경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증에는 장사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야말로 통증과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통증을 관찰해 보았다. 통증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기성을 띠고 있다. 마치 파도가 몰려오는 것과 같다. 제1파가 몰려오고 난 다음에 제2파가 밀어 닥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통증을 잘 관찰하면 휴지기도 있다는 것이다. 잠시나마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짧은 기간이 있는 것이다. 마치 유격훈련하다 달콤한 10분간 휴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은 너무 짧다. 또다시 통증의 파도가 밀려온다. 이번에는 더욱 강렬하다. 마치 집어 삼킬듯한 기세이다. 더구나 주기가 점점 짧아 졌을 때 고통도 점점 커진다. 이럴 때 “닥근닥근 하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닥근닥근 이빨이 아려 올 때 참을 수 없다. 이런 고통을 고고성(dukkhadukkhatā)이라 할 것이다. 괴로운 상태, 괴로움 자체, 괴로운 느낌을 말한다. 치통과 같은 육체적 고통은 괴로움 그자체이다. 그래서 고고성(苦苦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육체적 고통은 곧바로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말한다.

 

치통이 밀려왔을 때 단지 “아, 아프다!”라고 말한다면 육체적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가 “죽겠네!”라는 말이 붙으면 정신적 고통으로 확장된다. 화살을 두 번 맞는 것과 같다. 육체적 고통으로 한방 맞았고, 정신적 고통으로 또 한방 맞은 것이다.

 

주말내내 통증과 사투했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으나 끊임없이 밀려오는 고통의 파도에 당해낼 수 없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제2의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 애썼으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월요일 오후 4시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고통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겨내고자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잠 잘 때는 고통이 없었다. 아마도 아스피린 효과인 것 같다.

 

아스피린은 두통, 치통, 생리통에 진통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해열과 소염효과도 있어서 만병통치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상비약으로서 늘 가까이 두고 있다. 그런데 정말 치통에서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잠 잘 때 먹고 잤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을 하자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아무리 알아차림해도 속수무책이었다. 매맞는 것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치통에도 도인 없을 것이다. 어서 월요일이 되어서 치과에 가야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요일이 되었다. 닥근닥근 아리는 것은 점점 심해졌다. 파도의 주기도 짧아지고 파고도 높아 졌다. ‘일각여삼추’라는 말이 있다. 예약시간이 오후 4시인데 아득하게 남은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 보려 했으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점심먹고 오후 2시에 찾아 갔다. 치과치료를 받음에 따라 통증은 멈추었다.

 

이빨을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아래쪽 이빨 대부분을 씌웠기 때문이다. 앞쪽 몇 개를 제외하고 어금니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씌운 것이다. 엑스레이로 촬영된 것을 보면 나의 이빨이 아니다. 의치가 늘어날수록 살 날이 길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나머지 이빨마저 모두 갈아 버린다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빨이 하나, 둘 부서지는 것을 보고서 무상함을 느꼈다.

 

흔히 인생을 무상하다고 한다. 나이 들어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을 때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빨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서도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렇게 무상함을 느낄 때 슬퍼진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늙거나 병들었을 때 슬퍼하고 절망하게 된다.

 

사람의 일생을 생노병사라고 한다. 인생도 생멸이다. 그런데 생과 사 사이에 늙음(老)와 병듦(病)이 있는 것이다. 생, 노, 병, 사가 사람의 삶이다. 생과 사사이에 머물다 가는 것이다. 이렇게 머물렀을 때 ‘나(我)’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이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일에 대하여 나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에 기반을 두었을 때 몸이 아파도 내가 아픈 것이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인생무상을 말하지만 자아에 기반을 둔 인생무상이다.

 

사람의 일생은 생노병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생윤회가 있다면 순간윤회도 있다. 찰나지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순간적이다. 마치 섬광과 같고 번개 치는 것과 같다. 두 손바닥으로 “짝”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인과 연이 되어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매순간 생멸이 일어난다. 이는 마음이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말한다. 이는 마음이 머물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라고 했다. 몸은 육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한낮한밤을 넘기지 못함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마음은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순간에도 수십만 꼬띠의 마음들이 생긴다.”(Srp.II.99)라고 했다. 이는 마음의 찰나성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하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S12.6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마음은 한순간에 한마음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은 곧바로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이때 과보를 남긴다. 그래서 마음은 념념상속된다.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순간에도 수억개의 마음이 생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르면 “수억개의 의문인식과정이 넘쳐흐르는 강물처럼 일어나서는 사라진다.”(288p)라고 했다.

 

오로지 생멸만 있다면 어느 것 하나 내것일 수 없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내것일 수 없다.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상한 것이다. 무상이라 하여 인생무상이나 자연무상처럼 길게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무상을 말한다. 찰나생멸하는 무상을 보고서 슬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자아가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은 인생무상도 아니고 계절무상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오온의 현상을 잘 관찰하는 것에 대한 무상이다. 잘 관찰하면 생멸만 있을 뿐이다. 한번 일어난 법은 머물지 않고 즉각 소멸한다. 고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통증의 파도가 밀려오지만 머물지 않는다. 다만 제2파, 제3파가 밀려올 뿐이다. 통증은 일어났다가 머물지 않고 즉시 사라진다. 이것이 통증의 성품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들에 대한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하면 보인다. 생멸만 있을 뿐 머묾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머묾에 집착한다. 머묾을 내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파도 내가 아프다고 말한다. 통증을 내것으로 보는 것이다. 더구나 “아파죽겠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번 좋은 사람이면 “죽어도 좋아!”라고 좋아하며, 한번 싫은 사람은 “죽어도 싫어!”라며 미워한다. 이는 다름 아닌 산냐(相)에 대한 집착이다. 누군가 “죽어도”라고 말하면 이는 극단에 빠진 사람이다. 자아의 집착에 따른 것이다. 생멸하는 성품에는 머묾이 없다. 그래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고 했을 것이다. 산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은 산냐의 부숨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생멸에 대한가르침으로도 본다. 찰나생멸하는 것에는 머무는 것이 없다. 생멸만 있어서 무상이다. 머무는 것이 없어서 무아이다.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없다면 괴로운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런 느낌은 일시적이다. 일시적 느낌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죽어도 좋아!”라든가,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죽어도 싫어!”라며 목숨 걸지 않는다.

 

통증이 밀려오지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 괴로움이다. 아라한의 괴로움이라고도 한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에 따른 미세하고 미묘한 괴로움이다. 이를 ‘행고성(saṅkhāradukkhatā)’이라고 한다. 형성된 존재의 괴로움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것으로 조건 지어진 것의 괴로움이다.

 

무상이라 하여 인생무상을 말하면 자아에 기반한 무상이 된다. 자아에 기반한 무상은 ‘괴고성(vipariṇāmadukkhatā)’이라 볼 수 있다. 변화의 괴로움이다. 특히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즐거움이 변할 때 괴로움을 느낀다. 몸이 늙어 인생무상을 느끼는 것도, 계절이 변하여 자연무상을 느끼는 것도 즐거운 느낌이 변한 것을 말한다.

 

자아에 기반한 무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은 찰나생멸에 대한 무상이다. 찰나생멸만 있을뿐 유지가 없어서 무아가 된다. 조건지어진 것이 변함에 따른 괴로움이다. 이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느낌에 대한 것이다. 조건지어져 찰나생멸하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다. 머묾이 없기 때문에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실체가 없어서 무아이다. 무아에 기반한 무상이어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오온에서 찰나생멸을 관찰하면 무상, 고, 무아라는 빠라맛타담마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상과 무아에 기반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다.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무상을 지각한다면 그 어떤 과보 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2020-05-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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