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15. 18:59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차분한 투표날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로 나왔다. 혼자 있어서 산방에 있는 것 같다. 평소와 다르게 유튜브도 보지 않고 인터넷 뉴스도 보지 않는다. 보면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선거날은 빨간날로 쉬는 날이다. 일인사업자에게 쉬는 날 개념은 없다. 주말은 물론 공휴일도 평소와 똑 같은 날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이다. 바깥에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와 가끔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린다.

 

사무실은 일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자기실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매일 쓰는 글은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 경전을 열어 보면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잔잔한 기쁨이 일어난다. 생각한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인터넷에 올리고 나면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감을 맛본다.

 

사무실에 수행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틈날 때마다 앉고자 노력한다. 생업이 있어서 수행처에서처럼 한시간 시간 내기가 힘들다. 선원에 가서 집중수행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공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앉아 있고자 노력한다.

 

오늘 선거날에는 행선(行禪)을 해 보았다. 공휴일과도 같은 날이어서 부담없이 하고자 한 것이다. 하다 보니 한시간 행선하게 되었다. 사실 행선을 한시간 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똑 같은 동작을 매번 반복하는 것은 빨리빨리로 표현되는 광속의 시대와 맞지 않을 것이다.

 

빨리빨리문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빨리빨리라는 말일 것이다. 이번에 코로나19를 조기에 잡은 것도 한국인들의 빨리빨리문화와 관련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빨리빨리라는 말은 이미 국제어가 된 듯하다.

 

2006년도의 일이다. 그때 어느 업체를 도와주고 있었다. 셋톱박스 개발에 있어서 하드웨어를 담당한 것이다. 생산은 중국 동관에서 하게 되었다. 대만에서 현지투자한 공장에 위탁 생산한 것이다.

 

동관에서 현지공장 중간관리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우한출신이라고 했다. 우한공대를 나왔다고 했다. 그는 삼성에서 현지투자한 공장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배운 말이 빨리빨리였다고 했다. 한국 관리자들은 회의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빨리빨리라고 말 했다는 것이다.

 

수행은 빨리빨리 할 수 없다. 책은 빨리빨리 읽을 수 있고, 글은 빨리빨리 쓸 수 있다. 그러나 좌선과 행선은 빨리빨리 할 수 없다. 빨리빨리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일없이 아무 생각없이 하는 것이다.

 

한시간 행선하기가 쉽지 않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5분을 하기 힘들다. 집중이 되지 않았을 때 5분 앉아 있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이럴 때는 빨리빨리 하려는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한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일없이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행선(行禪)공덕이 있는데

 

사무실에 마련된 수행공간은 3평이 되지 않는다. 카펫트 하나를 깔아 놓았는데 작은 걸음으로 십보 걸으면 끝에서 끝까지 이른다. 그런데 최근 구입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가 있다.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가 그것이다. 사야도에 따르면, “열 걸음 정도의 장소면 경행하기에 충분합니다.”(121)라고 했다. 카펫길이는 행선하기에 적합한 거리임을 알 수 있다.

 




행선할 때는 배운대로 했다. 선원에서 집중수행할 때나 개별적으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걷는 것이다. 또 위빠사나 관련 수행서적을 바탕으로 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차원이 아니다. 숙달해야 한다. 일없이 아무 생각없이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하다 보면 집중이 되어서 의미를 알게 된다.

 

행선을 하면 많은 이점이 있다. 좌선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경행으로 개발된 사마디가 좌선으로 개발된 집중보다 더 강하다고 말했습니다.”(120-12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행선의 공덕에 대해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긴 여행을 견디게 하고, 2)정근을 견디게 하고, 3)건강해지고, 4)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5)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A5.29).

 

 

행선에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건강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하시계통의 선원에서는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행선을 원칙으로 한다. 일반사람이 한시간 동안 걷는 다면 4키로가량 될 것이다. 그러나 행선은 천천히 하기 때문에 길이는 길지 않을 것이다. 그대신 지구력을 길러 줄 것이다. 한시간 서 있는 것 자체가 운동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경행공덕 중에도 핵심은 마지막 번째에 있는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Cakamādhigato samādhi ciraṭṭhitiko hoti)”(A5.29)라는 구절이다. 행선을 하면 삼매를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앉으면, 서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누우면, 앉아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경행하면,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

 

 

여기서 인상은 니밋따(表象)를 말한다. 행선은 움직이는 대상을 한다. 행선하는 자는 움직이는 대상을 표상으로 삼기 때문에 표상은 서 있을 때도 앉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순간집중이다.

 

찰라삼매(khaikasamādhi)

 

순간집중을 카니까사마디(khaikasamādhi)라고 한다. 찰라삼매라고도 한다. 위빠사는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에 순간포착을 해야 한다. 이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와는 다른 것이다.

 

사마타는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에 개념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에 매순간 일어나는 감각들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는 실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찰나삼매를 계발해야 오래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우 조띠까 사야도에 따르면 찰나삼매로 머무는 시간에 대하여 그 시간은 몇 초 동안이거나 몇 분, 몇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97)라고 했다.

 

순간집중을 하여 찰나삼매가 계발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 조띠까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깊은 집중이 개발되면 알아차림과 대상을 서로 풀로 붙여놓은 듯이 느껴집니다.”(97)라고 했다. 알아차림이 대상과 밀착되었을 때 대상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알아차림의 연속이 유지됨을 말한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그대로이지만 대상은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아주 짧은 순간만 집중이 이뤄집니다.”(97)라고 말한 것이다.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짐만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찰나삼매에 대하여 몇 초 동안이거나 몇 분, 몇 시간일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순간집중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행선에서 사대(四大)

 

순간집중하면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특히 행선할 때 사대(四大)를 볼 수 있다.

 

발을 올릴 때 가벼움을 느끼면 풍대에 대한 것이다. 풍대는 바람의 성품으로서 운동성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몸의 움직임과 에너지는 풍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발을 바닥에 댈 때 차가움을 느끼면 화대에 대한 것이다. 화대는 불의 성품으로서 온도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따뜻함과 차가움 등은 화대와 관련이 있다. 발을 바닥에 댔을 때 딱딱한 것을 느낀다면 이는 지대에 대한 것이다. 지대는 땅의 성품으로서 단단함과 강도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을 느낀다면 지대와 관련이 있다. 수대는 물의 성품으로서 응집력과 관련이 있다. 우리 몸을 지탱하는 것은 수대와 관련이 있다.

 

행선을 하면 지, , , 풍 사대를 알 수 있다. 발을 들었을 때 가벼움과 경쾌함을 느꼈다면 이는 풍대와 화대에 대한 것이다. 발을 딛었을 때 무거움과 딱딱함을 느꼈다면 이는 지대와 수대에 대한 것이다. 행선하면 좌선할 때와 달리 더 많은 성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선원에서 듣는 말이 있다. 좌선을 하기 전에 먼저 행선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몸풀기라고도 볼 수 있다. 행선을 하여 집중을 해 놓은 상태에서 좌선에 임하면 더 집중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행선할 때 움직이는 순간순간 동작이나 의도를 알아차림하기 때문이다. 그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었을 때 대상이 바뀌더라도 알아차림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를 찾으려해도

 

수행은 왜 하는 것일까? 즐거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외딴 곳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하릴없이 방을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 실재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정신-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나를 아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사람 중에는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본래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실명이든, 필명이든, 주민번호이든, 인터넷아이디이든, 나라고 하는 것은 여럿 된다. 비밀번호도 나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한다. 비밀번호를 바꾸었을 때 이전 비밀번호는 더 이상 나라고 볼 수 없다. 새비밀번호가 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붙여진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이름은 있어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 있다면 오온이 있다. 몸과 마음으로 이루진 다발을 말한다.

 

정신-물질 과정만 있을 뿐

 

나라고 한다면 오온을 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오온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집적된 것이다. 또는 다발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질의 다발, 느낌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의 다발, 의식의 다발을 말한다. 이런 다발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진다. 다섯 가지 다발이 모여 있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수만가지 부품이 모인 것을 자동차라고 이름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 몸과 마음을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로 본다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정신-물질의 과정에 있어서 일어남과 사라짐만 있을 뿐 나라는 주재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알아차림을 나라고 볼 수 없다. 알아차림은 단지 아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의도를 나라고 볼 수 있을까?

 

행선할 때 왼발을 들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 발이 들려진다. 의도가 없다면 발을 들지 못할 것이다. 의도가 있고 나서야 발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발을 올려서 미는 것도 의도에 따른 것이다. 바닥에 딛는 것도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도하는 것일까? 내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의도하고 물질이 따르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은 서로가 조건 지어져 있다. 그래서 정신이 물질을 조건짓고, 물질은 정신을 조건 짓는다. 서로 양방향으로 조건 짓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의도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이런 의도는 조건에 따른다. 내가 발을 들고 발을 밀고 발을 딛는 것이 아니라 의도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에는 의도가 있다. 밥을 먹을 때도 의도가 있어야 먹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먹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의도하고 물질이 따라 가는 것이다. 정신이 의도하고 몸이 먹는 것이지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왼발 오른발 하며 발을 옮긴다. 발을 들어서 밀어서 딛어서 누르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는 의도가 있어서 하는 것이다. 의도가 없다면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발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가벼움과 경쾌함, 그리고 무거움과 딱딱함을 느낀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이 서로 조건이 되어 움직인다. 그래서 정신-물질이 움직이는 것이지 내가 움직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정신-물질과정이 있을 뿐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만약 우파니샤드대로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본다면 이는 단지 개념으로 본 것이다.

 

모든 것이 이름-형태로 된 것이라면 개념만 부수면 깨달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정의해 놓았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마루빠가 이름-형태가 아닌 정신-물질로 정의해 놓은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은 정신-물질의 과정이기 때문에 정신-물질의 과정을 보면 궁극적 실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관찰이 가능하다.

 

우리는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오온은 정신-물질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서의 생멸은 정신과 물질이 서로 조건지어져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북소리 비유를 들었다.

 

여기 큰 북이 있다. 어떤 이가 막대기로 북을 쳤다. 이때 소리가 나는데 북과 소리는 서로 다른 것으로 섞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은 서로 의지하여 조건 발생하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 섞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또 눈먼자와 보행불구자의 비유를 들었다.

 

눈먼자와 보행불구자는 길을 건널 때 서로 의지하면 사고 없이 잘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서로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 쌍의 명색은 양자가 서로 의지해 있다. 하나가 파괴되면, 양자의 조건들이 파괴된다.”(Vism.18.32)고 했다.

 

수행을 하는 것은 편안해지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고행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라는 허상을 부수어 괴로움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마루빠를 알아야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은 단지 정신-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는 것이다.

 

견해의 청정

 

오온이 정신-물질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우리 몸과 마음의 주재자가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 몸과 마음 그 어디에도 라든가 영혼등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물질 과정을 알게 되었을 때 자아나 영혼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사라진다. 그래서 이를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이라고 한다.

 

견청정은 칠청정에서 계청정과 심청정 다음으로 세 번째 청정의 단계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는 첫번째 통찰이 일어나는 것으로 정신-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고 한다.

 

 

2020-04-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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