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느릿느릿한 것이 미덕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6. 12:00

 

느릿느릿한 것이 미덕

 

 

새벽은 사유하기 좋은 시간이다.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홀로 깨어 이것저것 사유하다보면 가닥이 잡힌다. 사유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가장 편한 자세로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다보면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요즘 생업으로 바쁘다. 일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큰 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잊지 않고 찾아 주는 고객사에 감사드린다. 최대한 잘 해 주려고 노력한다. 즉시 답신하고 납기는 반드시 지켜 주어야 한다. 신용을 잃으면 연락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생업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시 여기는 것이 있다. 글쓰기이다. 지난 14년동안 거의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잠시 두 세 시간 틈이 나면 글 하나 나오는데.”라며 자판을 두드린다.

 

요즘에는 틈만 나면 앉는다. 심란할 때도 앉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앉는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편안하다. 좋은 생각이 떠 오를 때도 있다.

 

혼자 있어도 바쁘다. 생업과 글쓰기와 좌선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는 것 같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벌써 3월이다. 경칩도 지났다. 봄은 온 것 같은데 아직 봄이 아니다. 꽃피고 신록이 시작되는 4월이나 되어야 봄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

 




불을 지피는 사람처럼

 

요즘 일상에서 사띠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도 사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앉기 때문이다.

 

걷는 수행이라 행선도 있다. 어묵동정간에 수행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대소변을 볼 때도 사띠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려면 천천히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사띠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할 때는 눈을 감고 가만이 앉아 있을 때이다.

 

앉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름아닌 멈춤이다. 멈추어서 통찰하는 것이다. 멈추어야 보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외부대상과 차단된다. 조용한 곳에 있으면 귀의 문도 차단된다. 오로지 의식의 문 하나만 열려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생각을 차단하려면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과 관련이 있다. 배의 움직음을 따라가다 보면 호흡이 보인다. 계속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진다. 그러나 연이어 집중하기 힘들다. 치고 들어온 생각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우 꾼달라 사야도가 지은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위빠사나 아홉요인을 보면 불을 지피는 사람처럼하라고 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불은 생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부엌에서 불이 꺼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불을 지펴서 불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비벼서 열을 내야 하는 공을 들여야 한다. 그것도 연기가 날 때까지 계속 가열차게 비벼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불이 붙지 않는다. 사띠도 마찬가지리는 것이다.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한다. 그래서 지속적인 알아차림을 요구한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멈추지 않으며 매순간 알아차림을 지속할 것이다.”라고 했다. 어떻게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알아치차림 할 수 있을까?

 

관념을 보지 말고 실재를

 

사띠하는 것에 대하여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눈을 감고 앉아서 배의 움직임을 끊어지지 않고 관찰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우 꾼달라 사야도는 행선 하는 것과 절하기 두 가지 예를 들었다.

 

행선은 좌선과 달리 움직임 속에서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선은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한다. 급하게 할 이유가 없다. 빠릿빠릿하게 한다면 마당 쓸 일 있어요?”라는 소리 듣기 쉬울 것이다. 하인은 밥을 빨리 먹고 마당을 쓸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세월아 네월아 하듯이, “세월이 좀 먹나라는 마음으로 일없이 걷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춤을 추는 것 같고 로보트가 걸어 가는 것 같다. 이 모두가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모양을 보지 말라고 한다.

 

행선을 할 때 겉모양을 보지 말라고 한다. 발을 옮길 때 발의 겉모습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발은 언어화 된 개념을 말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은 관념을 보지 말고 실재를 보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실재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자기원인을 갖는 실재는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고정불변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도들은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있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이를 아뜨만이라고 한다. 홍창성교수는 아뜨만에 대하여 아뜨만이 자기 기원의 시점에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는 것이 새로 생겨날 수는 없으므러 아뜨만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아뜨만이 이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며느 아무것도 무로부터 기원할 수 없으므로 아뜨만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305-306)라고 말했다.

 

홍창성교수에 따르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성이 있을 수 없을 말한다. 그래서 공의 무자성과 연기로 이 세상의 이치를 설명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paramatta dhamma)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며 고유의 성질을 갖는 실재는 있다고 본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82법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열반과 추상물질 10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71법은 수행하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를 하면 궁극적 실재를 볼 수 있다. 겉모양이나 관념으로 보지 않고 현상을 관찰해서 보는 것이다. 이는 행선으로도 확인된다. 행선을 할 때 발을 들 때 들려지는 느낌에서 그 순간순간 실재를 꿰뚫어 보듯이 알아차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의 생김새나 관념을 벗어나면 실재를 알아차림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법의 맛을 알면

 

무엇이든지 재미 있어야 계속하게 된다. 수행도 재미가 있을 수 있을까? 충분히 재미 있을 수 있다. 행선을 할 때 오른발, 왼발 하는 것도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발을 들면 가벼운 느낌이다. 발을 내리면 무거운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중력과는 반대이다. 행선을 할 때 중력의 작용을 생각하면 안된다.

 

발을 올릴 때는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이다. 발을 내릴 때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다. 이런 느낌을 알아차릴 때 재미를 느낀다. 열중하면 할수록 더 재미를 느낀다.

 

행선은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학춤 추는 것처럼, 로보트처럼 걷는 것처럼 싱겁고 재미없게 보일지 모른다. 박력있게 108배를 하거나 고성으로 염불을 해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발을 들고 나아갈 때 가벼운 느낌을 알고, 발을 내리고 딛을 때 무거운 느낌을 아는 것이 재미가 있을 때 수행의 맛을 안다고 한다. 이는 사대(四大)를 아는 것이다.

 

사대에서 풍대와 화대는 가벼움이 두드러진다. 지대와 수대는 무거움이 두드러진다. 이와 같이 사대를 아는 것에 대하여 법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수행에 재미를 붙였다는 것은 법을 보았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우 꾼달라 사야도는 책에서 사대요소를 알고 나면 수행에 빠른 진전을 보게 된다. 이때부터 수행자는 수행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15)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 가르침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sabbarasam dhammaraso jināti)”(Dhp.354)라고 했다.

 

담마라소(dhammaraso)가르침의 맛또는 법의 맛(法味)’이라고 한다. 수행을 하면 법의 맛을 알게 된다. 그런데 모든 맛 중에서 법의 맛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황제식이나 신들이 먹는 감로식이라고 하더라도 윤회의 세계에 빠뜨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떤 고통을 겪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 구체적으로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九出世間法)’의 맛만은 고귀하다는 것이다. 구출세간법은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그래서 가르침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라고 한 것이다.

 

의도를 파악하면

 

행선을 하면 사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도도 알 수 있다. 행선을 하다 멈출 때가 있다. 방향전환을 하기 위해서이다. 멈추었을 때도 알아차려야 한다. 잠시 멈추어서 눈을 감고 머리 꼭대기서부터 발끝까지 관찰하라고 한다. 마치 자루를 벗이는 듯이 스캔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발 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역시 자루를 씌우듯이 스캔하라고 한다. 이렇게 스캔한다음 방향을 전환하는데 이때 오른쪽으로 돌 것인지 왼쪽으로 돌 것이지 결정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돌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의도가 있어야 행위를 할 수 있다. 방향전환할 때 오른쪽으로 돌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의도가 없다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몸은 마치 입구와 출구가 있고 아홉 개의 구멍이 있는 자루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의도가 없으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집중이 깊어지면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 꾼달라 사야도는 의도를 알아채는 것에 대하여 수행에 있어서 큰 진전이라고 했다. 사대를 파악하는 것 보다 더 큰 진전을 말한다. 왜 큰 진전인가?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려고 하는 의도는 정신이고

도는 것은 물질이다.

돌고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신과 물질이라고 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돎을 알아차린다.”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위빠사나 아홉요인, 112)

 



 

의도가 있으면 몸이 움직인다. 오른쪽으로 방향전환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때 몸은 오른쪽으로 돌게 된다. 몸은 단지 로보트와 같은 것이다. 물질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명령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행선하며 방향전환할 때 의도를 알아차리면 수행에 큰 진전이 있다고 했다.

 

수행의 큰 진전

 

의도를 알면 두 가지 지혜를 알게 된다. 하나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고 또 하나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이다.

 

돌려는 의도를 안다는 것은 정신적 현상을 아는 것이고, 몸이 도는 것은 물질적 현상을 아는 것이다. 이로서 수행자는 우리 몸과 마음을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으로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가장 첫 번째인 제1단계 지혜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고 한다.

 

수행자가 몸을 오른쪽으로 방향전환하는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 돌려는 의도는 원인이 되고, 몸이 도는 것은 결과가 된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두 번째에 지혜에 해당되고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라고 한다.

 

행선을 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이를 한자성어로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도 볼 수 있다. 영어로는 겟투(Get Two)’가 될 것이다. 위빠사나 제1단계와 제2단계 지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의도를 알아차림 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의도를 알아차림 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의 큰 진전이라고 했다.

 

하루종일 사띠를 유지하려면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아차림 하면서 천천히 걷는 것도 수행이다. 그래서 걷는 수행(步修行)’ 또는 행선(行禪)’이라고 한다. 앉아서 하는 수행은 좌선(坐禪)이 된다. 그런데 일상이 모두 수행이라고 했다. 이를 일상선(日常禪)이라고 할 것이다.

 

대념처경에서는 행주좌와가 모두 수행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 있다면 앉아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 있다면 누워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분명히 안다.”(D22.4)라고 했다. 심지어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D22.6)라고 했다.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은 물론 어떤 것이든지 알아차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띠가 하루종일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사띠를 유지하려면 천천히 느릿느릿 해야 한다. 수행자가 빠릿빠릿하면 허물이 된다. 뒤 돌아볼 때도 고개만 획 돌려 본다면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알아차림 하며 몸을 돌려 천천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 꾼달라 사야도의 책을 보면 수행자는 빨리 움직여서는 안되고 병자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118)라고 했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를 하면

 

절을 할 때도 천천히 해야 한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를 말한다. 수행자가 수행의 결과에 대하여 점검 받고자 할 때 스승을 찾아 갈 것이다. 스승은 제자가 절하는 동작 하나만 보아도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스승은 알아차림 없이 절을 빨리 하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동작 하나하나를 알아차림하며 천천히 절하는 제자를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하면서 절을 하면 다섯 가지 선업이 따른다고 했다.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선업은 공경을 표하기 위해 절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심념처 수행공덕을 쌓는다.

 

두 번째 선업은 공경을 표하기 위해 몸을 굽힘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신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세 번째 선업은 평화로움 또는 편안함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절을 하면서 가슴이나 등이 아파서 통증,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네 번째 선업은 부처님께 절하면서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 들음, 들음이라고 알아차라면 법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 것이다.

 

다섯 번째 선업은 마음을 부처님께 향하고 경의를 표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공경한 공덕을 쌓는다.”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위빠사나 아홉요인, 128)

 

 

절을 제대로 하면 사념처를 포함하여 다섯 가지 수행공덕을 쌓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심년처 수행공덕을 쌓는다고 했다. 이는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cite cittānupassī)’하는 것을 말한다.

 

이중(二重) 알아차림에 대하여

 

어떻게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일까? 대념처경을 보면 모두 16가지 마음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한가지 예를 들면탐욕에 매인 마음을 탐욕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고 했다.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욕망이라고 알아차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욕망은 이전 마음이 되어 욕망이 멈출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심념처에서는 한번 더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알아차림 그 마음을 다시 한번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이중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한다.”라고 말한다.

 

노팅하는 것은 탐욕을 탐욕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고, 왓칭하는 것은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은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음에 자아가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탐욕에 매인 마음을 탐욕으로 매인 마음이라고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마음을 아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 자신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아라고도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마음마저 없애기 위하여 다시한번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으로 알아차림 하면 탐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념처 16개의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모두 8개 마음의 쌍으로 되어 있다.

 

심념처에서 16가지 마음을 보면 그 중에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해탈된 마음도 알아차림 하라고 했다. 이는 일시적 해탈로 보기 때문이다. 궁극적 해탈로 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해탈된 마음을 알아차림 하지 못한다면 궁극적 해탈로 오인할 것이다. 심념처를 닦는 것은 궁극적 해탈로 가기 위한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소리에 대한 속박이 생겨났을 때

 

절하기 수행공덕 네 번째 선업을 보면 법념처에 대한 것이 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 들음, 들음이라고 알아차라면 법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대념처경 법념처를 찾아보았다. 청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청각을 분명히 알고 소리를 분명히 알고 그 양자를 조건으로 속박이 생겨나면 그것을 분명히 알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속박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버려진 속박을 버리게 되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버려진 속박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D22.22)

 

 

법념처에서 여섯 감역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 청각에 대한 것이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을 때 신경 쓰일 것이다.

 

미얀마수행처에서는 동네에서 스피커 소리가 요란하다. 노래 소리가 들려올 때 집중하기 힘들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야도는 단지 들음, 들음하며 알아차림 하라고 했다. 주석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을 때 신경이 쓰여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를 소리에 대한 속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속박된 마음을 분명히 알라고 했다. 어떻게 아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11가지 속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1)감각적 욕망의 속박, 2)적의의 속박, 3)자만의 속박, 4)사견의 속박, 5)의심의 속박, 7)계율과 의식의 집착에 의한 속박, 8)질투의 속박, 9)인색의 속박, 10)무명의 속박을 말한다.

 

11가지 속박 중에서 두 번째 적의의 속박이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을 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는 이미 적의에 속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원하지 않는 대상을 증오할 때 그에게 적의의 속박이 생겨난 것이다.

 

동네 마이크소리가 요란스럽더라도 속박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단지 들림, 들림하며 알아차림 하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기찻길역 오막살이에 아기가 잘도 자는 것과 같다. 그랬을 경우 소리가 단지 파동으로 들릴 것이라고 한다.

 

느릿느릿한 것이 미덕

 

수행자가 스승에게 수행보고 할 때 절을 한다. 그런데 알아차림 하면서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를 하면 다섯 가지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절 한번 하는 것으로 다섯 가지 이익이 성취되기 때문에 겟파이브(Get Five)’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굴신운동하듯이 절하는 한국방식 오체투지와는 다른 것이다.

 

걷는 것부터 절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수행아닌 것이 없다. 수행이라 하여 앉아 있는 것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관찰대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살아야 한다. 느릿느릿 사는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빨리빨리가 천천히 사는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빠릿빠릿한 것이 미덕이 아니라 느릿느릿한 것이 미덕이다.

 

 

2020-03-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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