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푹신한 방석과 함께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22. 10:47

 

푹신한 방석과 함께

 

 

동이 트는 새벽은 사유의 시간이다. 하루 중에 가장 마음이 깨끗한 때이다.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잠에서 막 깨었을 때는 산천이 비추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기 때문이다. 아직 대상에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TV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켜지 않는다. 당연히 스마트폰도 안본다.

 

이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앉아 있는다. 등을 대고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자세로 있는 것이다. 눈을 감는다. 그러면 마음의 문(意門)으로 생각이 들어 온다. 어제 부끄러웠던 일이 먼저 들어오는 것 같다. 대상에 휘둘려 행위를 하고 만 것이다. 과거의 일도 떠 오른다. 마음이 맑다보니 갖가지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좋았던 것 보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다.

 

새벽에 눈을 감고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포즈를 취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렇게 심신이 편하다보니 가까운 사람 생각이 난다. 집 떠나 있는 가족이 먼저 생각나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금이라도 인연 있는 사람들이 떠 오른다.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속으로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라고 외쳐 본다. 마치 주문 외듯이, “모든 존재들이 안은하기를!”라며 여러번 반복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좌선하라고 한다. 이삼십분도 좋으니 앉아 있어 보라는 것이다. 앉아있다 보면 습관이 되어 자주 앉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새벽좌선은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잠을 잤기 때문에 이미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 눈을 감으면 집중이 잘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바둑에서 몇 점 놓고 들어가는 것과 같고, 백미터 달리기 할 때 이삼십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새벽좌선은 실패할 수 없다.

 

선원에서는 새벽좌선과 마지막 좌선에 빠지지 말라고 한다. 마치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을 잘 시작하고 잘 마무리하라는 말과 같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짝수 시간은 좌선시간이고 홀수시간은 행선시간이다. 각각 한시간씩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표대로 하면 몸이 버텨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좌선이 잘 되는 타임도 있고 효율이 떨어지는 시간대도 있다. 새벽 4시에 시작되는 첫좌선은 날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 잠에서 깨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선원에서 마지막 좌선은 저녁 8시에 앉는다. 이 좌선이 중요한 것은 하루일과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한시간동안 집중했을 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음을 말한다.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잠을 자면 잠이 잘 안온다. 탐욕과 분노에 가득 찬 사림이 잠을 청해도 잠이 잘 오지 않은 이치와 같은 것이다. 마음을 착 가라앉혀 놓고 침상에 눕는다면 곧바로 잘지 모른다. 송장처럼 뒤척이지 않고 자는 것이다.

 

자애수행을 하면 열힌가지 공덕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잠에 대한 것이 무려 세 가지에 달한다. 자애를 닦으면 (1)편안히 잠자고, (2)행복하게 깨어나고, (3)악몽을 꾸지 않는다.”(A11.15)고 했다. 잠자기 전에 수행을 하면 잠을 잘 잘수 있음을 말한다.

 

동트는 새벽에 차를 마시면 좋다. 하루일과를 TV로 시작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TV를 보면 대상에 휘둘린디.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망상으로 전개되기 쉽다. 맛지마니까야 꿀과의 경madhupiṇḍikasutta)’(M18)에서 보는 것처럼 삼사화합촉에 따라 산냐(知覺)가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삼사화합촉에 따라서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된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본 것으로 인하여 온통 마음을 들쑤셔 놓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새벽이나 아침에는 TV, 라디오,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그 대신 떠 오른 좋은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이 깨질 것 같아 스마트폰 메모앱에 메모해 둔다. 머리속으로는 마음의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생각을 붙들어 매기 위하여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거나 사무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다.

 

요즘은 틈만 나면 앉아 있는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앉아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일이 바쁘면 앉아 있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본래 마하시전통에서는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원에서나 가능한 일로 본다. 현실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한시간은 매우 길다. 잠시 틈이 나면 이삼십분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다. 이삼십분으로는 깊이 집중하기 힘들다. 다만 마음을 가라 앉히는 데는 효과가 있다. 살다보면 늘 대상에 부딪쳐야 하기 때문에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서 혼탁해지는데 이럴 때 앉아 있으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선생은 틈만 나면 앉는다고 했다. 번역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니까야강독모임 하기전에도 십분가량 입정을 하는데 마음이 가라 앉은 상태에서 하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좌선하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를 수 있다. 스티브잡스는 복잡한 일이 생겼을 때 골방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일본 선사로부터 참선을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마트폰이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 이전에 신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어 낸 것도 어쩌면 참선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을 때 머리를 싸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를 비우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개발하다 막히면 나가서 담배 한대 피우고 나면 해결되듯이,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도 골방에 앉아 있으면 슬슬 풀리지 않을까?

 

참선과 관련하여 환산스님의 유튜브를 보았다. 유튜브로 본 환산스님은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속한 것이다. 불과 이삼년 전에 유튜브에서 스님의 모습으로 접했는데 세속사람이 된 스님의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참선강의를 들어 보니 스님일때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여전히 수행자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속복 입은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환산스님에 따르면 미국에서 선불교는 혁명적인 것이라고 했다.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이 말해 주듯이 시대에 저항하는 미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이라는 것이 낡고 오래되고 진부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선을 처음 접한 미국인에게 있어서는 선은 새로운 것이고 더구나 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본 것이다. 특히 미국 서쪽 끝에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선을 접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스티브 잡스이다.

 

며칠전 선물을 하나 받았다. 페친(페이스북친구)이 방석을 택배로 보내 준 것이다. 앉는 것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무릎이 시리다고 했다. 말이 씨가 된 것 같다. 또 암시가 된 것 같다. 페친이 보내 주겠다고 메신저를 준 것이다. 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있는 그대로를 썼을 뿐인데 암시로 비추어진 것 같아 당혹한 마음이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마도 대략난감일 것이다.

 




방석은 법당에서 볼 수 있는 푹신한 것이다. 바닥에 카페트만 하나 깔았기 때문에 한기가 그대로 다리에 전달되었다. 또 자동차용 방석은 두께가 얇다. 그런데 법당용 방석은 두께가 10센티가 넘는 것 같다. 앉아 보니 푹신할 뿐만 아니라 한기를 느낄 수 없다. 방석 뒷부위를 접어서 엉덩이에 받치고 평좌로 앉았다. 그 상태로 한시간 유지했는데 다리통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좌선은 혼란된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앉아 있으면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음이 외부 대상만 쫓아 가다 보면 혼탁해지지 않을 수 없다. 때로 격정적으로 되기까지 한다. 이럴 때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면 일단 모든 대상이 차단된다. 귀로는 시계소리, 자동차소리 등이 들려오지만 감정을 유발하는 노래나 격정을 유발하는 유투브와는 다른 것이다. 오로지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배에 집중한다. 호흡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다보면 마음은 점차 안정된다. 마침내 호흡이 미세해지면 노래 듣는 것 보다 유튜브 보는 것 보다 더 낫다.

 

앉아 있을 때 늘 느끼는 것은 이 몸이 자루와도 같다는 것이다. 입구와 출구가 두 개 있는 자루이다. 더 추가한다면 아홉 개의 구멍이 있는 자루이다. 그런데 몸자루에는 부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대념처경에서는 서른 두 가지 부정물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몸관찰 할 때는 서른 두 가지 신체기관이 부정한 것임을 관찰하라고 했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몸에 대하여 정나미가 떨어 질 것이다.

 

사람들은 몸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눈이나 코 등 외적인 신체기관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예쁜 눈을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눈은 나의 것, 눈은 내것이 된다. 이는 갈애와 자만에 따른 것이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얼굴 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나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성형을 하는 것도 몸이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는 갈애와 집착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몸이 망가졌을 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기와 박수로 먹고 사는 사람이 인기가 떨어졌을 때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몸은 단지 의도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로보트와 같은 것이다. 전자제품은 원칩마이콤(One Chip Micom)으로 작동된다. 전자회로로 구성되어 있는 모든 부품은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몸은 의도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좌선을 하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서 의도를 알아 차릴 수 있다. 발을 들 때 의도가 없으면 발을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의도가 없으면 이동할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다. 천천히 세밀하게 관찰하다 보면 의도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의도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빠르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관성으로 사는지 모른다. 습관대로 사는 것이다. 자주 하다보면 익숙해져서 저절로 되는 것이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보트와 같은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습관대로 산다면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알콜중독자나 흡연중독자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과 같다.

 

자유롭게 살려거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온이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자유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니까야를 보면 도처에서 오온이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았을 때 대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우선 앉아 있어야 한다. 앉아서 몸이 자루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의도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똥자루 같은 것을 말한다. 앉아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수행자는 단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뿐이다. 이제 시작이다. 푹신한 방석과 함께.

 

 

2020-02-22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릿느릿한 것이 미덕  (0) 2020.03.06
세상을 떠나고 싶다면  (0) 2020.03.03
호흡이 피난처  (0) 2020.02.20
촛불이 타는 것을 보면  (0) 2020.02.16
진실로 새로운 하루가 되기를  (0) 2020.02.12